‘마음 담아 편지를 써라’… 물질은 후순위

강우석 감독의 영화 <공공의 적>을 보면 조규환(이성재 분)은 펀드매니저로 직장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엘리트다. 우리 시대의 부모가 바라는 전형적인 자식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부모가 사회복지시설에 재산을 환원하려 하자 이에 발끈한다. 부모의 재산은 이미 펀드매니저인 그가 주식에 투자한 터라 기부하려면 그 돈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에게 피해를 주는 게임에 속한다. 그는 아버지에게 “생판 모르는 사람 배불리겠다고 아들을 죽이는 사회 환원”이라며 두 눈을 부라린다. 그는 결국 부모를 살해한다. 규환은 유능하고 성공한 엘리트이지만 돈을 위해 부모를 살해하는 ‘야누스적 인간’이 된 것이다.<공공의 적>에서 주인공의 부모는 아들이 공부만 잘하면 사회적으로 유능한 인간이 되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기대는 참담하게 무너졌다. 그런 아들을 키운 부모는 이런 일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아들을 그렇게 만든 책임은 부모에게 있다.예전이나 지금이나 ‘복수는 나의 힘’이라고 믿는 ‘용감한 부모’가 있다. 아이들은 놀다 다툴 때가 있고 종종 싸움으로 번지기도 한다. 그런데 자신의 아들이 다른 아이에게 맞아 코피라도 흘리고 오면 이를 참지 못하고 아이를 앞세워 아이를 때린 집으로 곧장 달려간다. 그 부모에게 온갖 폭언과 위협을 한다. 심지어 자신의 아이를 때린 아이를 찾아 보복 폭행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마치 개선장군이 된 양 호기스럽게 집으로 오면서 “또 이런 일이 있으면 아빠에게 이야기하라”고 말한다.이 역시 문제는 자녀에게 있는 게 아니라 부모에게 있다. 부모가 아이에게 가르치는 것은 다름 아닌 ‘복수는 아빠의 힘’이 아닐까. 이런 집안에서 자란 아이는 커서 아마도 대부분 자기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인간이 될 것이다. 또 그 아들 역시 ‘복수는 아빠의 힘’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대물림할 것이다.존경받지 못하는 부자들이 끼치는 해악이 세상에 자녀 키우기만큼 힘들고 어려운 게 없다고 한다. 재력과 권력은 노력을 하면 웬만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자식은 부모의 뜻대로 하기 힘들다. 동서고금의 위인들 가운데 자식 때문에 속을 상한 이들이 한두 명이 아니다. 대부분 자녀로 인해 우환을 겪는 부모들의 공통점이 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부모의 ‘과잉보호’에 있다. 그래서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 있다.<주역>(역자 서대원)을 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고(蠱)·존경받지 못하는 부자들에게-홀로 즐기는 부귀영화의 뒤안길”이라는 단락이 있다. 주역의 풀이가 대부분 인생사를 흉(凶)과 길(吉)로 나눠 설명하고 있는데, ‘고’는 흉에 해당하는 교훈이다. ‘고’는 이웃과 나눌 줄 모르는, 사리사욕에 바탕을 둔 나쁜 재물을 상징한다. 말하자면 ‘고’는 큰돈을 벌었지만 사회에 유익하지 않은 부귀영화를 가리킨다. 돈과 권력을 가졌지만 사회를 위해 큰일을 하지 못하는 인물이 ‘고’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돈과 권력을 가졌으되 결코 존경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회적으로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주변에 이런 유형의 인간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러한 사람 때문에 때로 살아갈 의욕을 잃곤 한다. ‘고’는 나쁜 독과 같은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그런데 역자는 이런 풀이를 덧붙이고 있다. “고는 쉽게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다행히 아들이 있어 이를 깊이 생각하고 아버지에게 아비의 잘못을 깨닫게 한다면 달라질 수 있다.” 탐욕을 일삼는 인간의 경우에도 그 아들이 그 탐욕을 경계하고 나누고 베풂의 삶을 살아간다면 그 아들로 인해 흉(凶)이 길(吉)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그러나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말이 있듯이 ‘고’의 아버지 밑에서는 사회를 위해 유익한 일을 하는 아들이 나오기 힘들다. 심하게 말하자면 보고 배운 게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그래서 <주역>에서는 가정교육은 엄하게 할 것을 주문한다. “부모는 믿음과 위엄을 바탕으로 엄하게 길러야 한다. 그러다보면 당연히 어려움도 따르고 후회도 생긴다. 자녀는 불만이 쌓여 반항하게 되니 어려움이 있고, 자녀에게 살갑게 사랑을 표현하지 못했으니 부모 스스로 후회가 생긴다. 하지만 엄격하게 길러야 자녀의 앞길이 트이고 마지막이 길하다.”자녀 교육에서 ‘원칙’의 중요성우리나라의 자녀 교육은 예나 지금이나 극성스러운 것 같다. 우리나라가 배출한 대학자인 퇴계 이황(1501~70)도 자녀 교육으로 속을 썩이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당시 과거시험 전문학원으로 ‘거접(巨接)’이 있었다. 퇴계는 과거를 공부하는 아들과 손자를 영주의 거접에 보내 시험을 준비하게 했다. 대학자인 퇴계도 자신은 학문의 근본을 가르치는 것을 고수했지만 자손들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부모 된 심정은 어쩔 수 없어 그 역시 자녀를 거접에 보내는 고육책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하지만 퇴계는 자녀 교육에서도 원칙만은 저버리지 않았다. 퇴계는 공부를 잘했던 맏손자 안도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안도에게는 갓난 아들(창양)이 있었는데, 부인이 아들을 낳고 6개월 후에 다시 임신을 하는 바람에 젖이 모자랐다고 한다. 안도는 할아버지에게 부탁해 유모를 보내달라고 했다. 퇴계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퇴계는 “내 자식을 키우기 위해 남의 자식을 죽일 수는 없다”면서 여종을 보내지 않았다. 별수 없이 증손자 창양은 계속 밥물로 배고픔을 달래면서 봄을 어렵게 넘겼으나 결국 죽고 말았다.너무 냉정한 할아버지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아들을 귀하게 여긴 시대에 그것도 자신의 대를 이을 증손자인데, 퇴계는 청을 거절했던 것이다. 퇴계는 어쩌면 <주역>에서 말한 ‘고’를 의식했을지 모른다. 유모를 손자에게 보냈다면 그 유모의 아들은 필시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퇴계의 후손 사랑은 지극했다. 퇴계는 생전 외손과 딸을 포함해 90여 명을 직접 교육할 정도로 할아버지의 역할을 다했다.퇴계는 공부를 게을리 하는 후손이 있으면 고기와 함께 편지를 보내면서 위로하며 공부를 독려했다. 또 겨울에 손자에게 줄 귀마개를 사주기 위해 3개월간 하인을 시켜 시장을 꼼꼼하게 돌아보게 했다. 값비싼 귀마개를 사주면 손자가 자칫 물질적으로 나태해질까봐 값이 싸면서도 질이 좋은 것을 사주기 위해 3개월간이나 시장조사를 한 것이다. 결국 싸고 질 좋은 귀마개를 구해 손자에게 주면서 빨리 사주지 못한 미안함을 전하기도 했다. 자녀 교육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요즘 말하는 ‘감성의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다. 감성의 리더십으로 다가가면 자녀 교육은 절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퇴계의 이런 자녀 교육의 원칙에 힘입어 퇴계 가문은 이후 수많은 인물을 배출하면서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 가문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퇴계의 자녀 교육에는 무엇보다 ‘도덕적인 힘’이 있었던 것이다.자녀 교육의 해법은 수없이 많다. 그런데 자녀 교육의 해법 가운데 한번쯤 반드시 시도해 보아도 결코 손해나지 않는 해법이 한 가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편지를 이용한 서신 교육이다. 직접 손으로 쓴 편지를 이용할 경우 가족간의 대화의 장벽을 허무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편지는 얼굴을 보고 이야기할 때보다 감정을 순화해 전달할 수 있기 때문에 교육적인 효과가 훨씬 크다고 한다. 아무래도 화가 날 때 얼굴을 보고 말하면 감정이 그대로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자녀 간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다면 결코 좋은 장면이 아닐 것이다.우리 선인들은 자녀 교육에 편지를 잘 활용했다. 퇴계는 아들과 손자들에게 틈틈이 편지를 보내 공부에 힘쓸 것을 당부했다. 퇴계는 열일곱 살 된 맏아들에게 뜻이 돈독한 친구와 함께 절에 가서 굳은 결심으로 맹렬히 공부하라고 권하기도 했다. 성인으로 추앙받는 퇴계도 자녀 교육에 있어서는 요즘 부모들처럼 극성스러울 정도였다. <안도에게 보낸다>의 서간집은 지금도 자녀 교육의 고전으로 읽혀지고 있다.다산 정약용(1762~1836)은 유배지에서 18년 넘게 보냈다. 다산은 자녀 교육에 가장 힘써야 할 시기(39~57세)를 고스란히 유배지에서 보내 아버지로서 직접 자녀 교육을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컸을 것이다. 자녀 교육의 애로를 누구보다 크게 느꼈을 다산이 자녀 교육을 위해 활용한 것이 바로 편지다. 다산은 자녀들과 100여 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두 아들(학연, 학유)을 반듯하게 키웠다.다산이 자녀에게 쓴 편지는 100여 통에 이른다. <유배지에서 쓴 편지>는 오늘날 읽어도 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다산이 100여 통의 편지를 통해 자녀에게 훈계한 내용은 먼저 문명 세계(서울)를 떠나지 말 것, 두 번째는 독서에 힘쓸 것, 세 번째는 재물을 나눠줄 것, 네 번째는 근(勤)과 검(儉) 두 글자를 유산으로 삼을 것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가운데 다산은 자신의 귀양살이로 위기에 처한 자녀들에게 ‘한양 입성’이라는 특명을 내린다. 그는 먼저 “절대로 서울 주변(수도권)을 떠나서는 안 되며, 가능하면 서울 한복판으로 들어가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자녀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따뜻한 관심과 사랑, 신뢰다. 물질적인 지원은 그 다음 순이다. 부모의 마음을 자녀가 가슴으로 느낀다면 자녀 교육은 이미 절반의 성공을 거둔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거친 바다를 항해하면서 자녀에게 쓰는 편지에는 아무래도 인생의 깊은 의미들이 묻어 있을 것이다. 그 편지를 읽는 자녀는 아버지의 노고를 글을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물질만으로 자녀 교육을 해결하려고 한다. 거기서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지면 자녀 교육은 실패하고 만다. 물론 당장은 물질적 혜택을 입은 자녀가 부모 앞에서 웃음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물질적 지원이 끊어진다면 자녀는 어떤 행동을 할까.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김승연 회장의 보복 폭행 사건은 여러모로 자녀 교육에 경종을 울리기에 충분하다. 김 회장은 재력뿐만 아니라 공부 잘하는 아들을 두는 등 그야말로 부러울 게 없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김 회장은 자녀 교육을 위해 결코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고 말았다. 그것은 가진 자의 ‘오만’과 ‘방종’이다. 그 오만으로 부자에 대한 편견이 우리 사회에서 가실 날이 없다. 또 자라나는 아이들이 무엇을 배울 것인가. 이번 사건을 보고 자녀를 둔 부모라면 누구나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오만과 방종, 자녀 교육의 최대 적가정이든 기업이든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산 정약용은 <소학>의 말을 빌려 “3대에 걸쳐 의원이라야 약에 효험이 있고, 또 3대에 걸쳐 글을 읽어야 제대로 된 문장이 나온다”고 했다. 그만큼 명성을 만들고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는 말이다. 김 회장은 재력과 똑똑한 아들을 두었다. 그의 세 아들은 이미 한화의 대주주로 수백억 원대의 부자 대열에 끼었다. 김 회장 일가는 이미 ‘부자 3대’를 이어가고 있지만 <주역>에서 말한 ‘고(蠱)·존경받지 못하는 부자’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자녀 교육은 그 자체가 ‘경영의 조건’을 담고 있다. 폭력적인 부모 밑에서 폭력이 자라고 베풀 줄 아는 부모 밑에서 나눔을 실천하는 자녀가 나오는 법이다. 존경받는 부자가 존경받는 부자를 대물림할 수 있다. 자녀 교육은 그 자체가 부모의 사고와 행동을 대물림하는 ‘붕어빵’과 같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대물림 때 발생하는 리스크를 줄이는 것은 전적으로 부모에게 달려 있다. 부모의 단점을 줄이고 장점을 최대한 높여 대물림해야 한다. 단점을 더 많이 대물림한다면 그만큼 리스크는 높아지는 것이다. 그 리스크를 떠안는 것은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자녀 교육이 자녀 경영이 돼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자녀 경영의 핵심은 부모 자녀가 합심해 누구나 선망하는 ‘블루칩’ 가문으로 만드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군자는 손자는 안아주지만 자식은 안아주지 않는 법이다.” <예기>에 나오는 말로 자식 교육의 엄격함을 강조한 말이다. 가정의 달을 맞아 자녀를 둔 부모라면 누구나 한번쯤 되새겨봄직하다. 그리고 자녀에게 한 통의 편지라도 써보면 어떨까. 매일 사랑만 준 부모라면 엄격함을 전하고 엄한 모습만 준 부모라면 사랑을 전하는 편지를 쓰자.최효찬·자녀경영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