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 좌우진영에 유권자 표 몰려

지난 22일 치러진 프랑스 대선 1차 투표에서 집권 UMP의 니콜라 사르코지(52)와 좌파 사회당의 세골렌 루아얄(53) 후보가 각각 1, 2위를 차지해 5월 6일 실시될 결선투표에 진출했다. 이로써 올해 프랑스 대선은 전통적인 좌우 이념 노선 대결로 압축되고 있다.프랑스 내무부의 최종 개표 결과에 따르면 12명의 후보 중 사르코지가 31.11%, 루아얄은 25.84%를 득표해 1, 2위를 차지했다. 주목을 끌었던 중도파 후보 프랑수아 바이루는 18.5%, 극우 후보 장 마리 르펭은 10.5% 득표에 그쳤다. 프랑스 유권자들이 중도나 극단주의 노선을 피하고 전통적인 좌우 진영에 표를 몰아준 것으로 풀이된다.‘바이루 돌풍’은 지나고 보니 일과성 현상이었다. 바이루는 전통적인 좌우 분열 정치로 프랑스가 침체에 빠졌다고 비판하면서 중도로의 통합을 주장, 한때 높은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중도의 애매모호함, 연정이 초래할 수 있는 정치 불안 등을 우려한 유권자들이 표를 몰아주지 않았다. 바이루는 결선에서 사르코지를 꺾을 수 있는 유일한 후보라는 분석이 제기될 정도로 사르코지와 루아얄 모두를 위협했었다.따라서 결선투표 내지 프랑스 대통령 권좌를 차지하는 것의 관건은 바이루 지지표를 자신의 표로 만드는 것이다. 1차 투표 득표율만 보면 사르코지가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것으로 보인다.1차 투표 직후 공개된 여론조사에서도 사르코지가 52~54% 지지율로 46~48%의 루아얄을 이기는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하지만 전문가들은 바이루를 지지하는 18% 정도의 중도파 표심이 루아얄 쪽으로 쏠릴 경우 박빙의 승부가 될 것이란 전망을 내놓는다. 이에 따라 사르코지와 루아얄 측은 ‘바이루 지지표’ 확보에 막판 총력전을 펼칠 것으로 보인다.이처럼 명백한 좌우 대결인 만큼 양 후보의 경제 정책은 판이하게 다르다. 침체된 경제의 성장과 높은 실업률 등을 풀어줄 해법을 정반대 쪽에서 찾고 있다. 사르코지는 공급 측의 효율을 높이는 것, 루아얄은 소비를 진작시키는 것이 시급하다는 처방을 내놓고 있다.사르코지는 기본적으로 세금 감면, 초과 노동이나 노동자 보호를 소홀히 한 데 대한 기업의 책임을 경감시켜줌으로써 기업하려는 의욕을 고취하려고 한다. 반면 루아얄은 고용 안정, 국민연금 지급 확대, 최저임금 인상 등을 통해 소비를 자극한다는 생각이다.재무 장관 출신이기도 한 사르코지는 먼저 노동시장의 규제를 상당 폭 걷어내려 한다. 기업이 근로자 해고를 좀 더 쉽게 할 수 있도록 하고 한 주 35시간 이상 노동을 시킬 경우 기업이 물던 세금과 벌금을 없애려 한다. 상속세도 줄이고 개인이 전체 세금 납부액이 소득의 50%를 넘지 않도록 제한을 둘 방침이다.5월 6일 결선투표 실시이런 정책 공약은 프랑스 경제가 중국 같은 신흥 경제국들의 싼 노동력, 낮은 원가의 생산 제품과 경쟁해야 한다고 심각하게 생각하는 경제학자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 런던 모건스탠리의 에릭 체니 수석 유럽 이코노미스트는 “사르코지는 친시장적인 개혁 프로그램을 견지하고 있다”며 “이런 방향은 잠재 성장을 높일 것”이라고 환영의 뜻을 밝혔다.그러나 정책의 ‘즉효’ 여부로만 보면 루아얄의 프로그램이 더 효과적일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그의 공약대로 최저임금을 2012년까지 20% 높이고 최저 수준의 연금 지급을 상향 조정하고 40만 개의 정부 관련 일자리를 창출하면 경기는 되살아날 것이란 판단이다. 사르코지의 처방이 상대적으로 장기간의 경제 성장을 일궈내는 데 초점이 맞춰진 것과 다른 양상이다.한편으론 루아얄에 대해 “잠재 성장률을 높이려는 노력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라는 비난도 쏟아진다. 설문 조사에서는 사르코지의 경제 정책에 대한 지지도가 높게 나오고 있다. BVA 주최 설문에 따르면 사르코지가 경제 성장을 가져올 것이란 응답이 49%, 루아얄이 옳다는 응답은 39%로 큰 편차를 보였다.아무튼 독일이 경제 부흥 기운을 일궈냈듯이 프랑스도 대선 과정에서 침체된 경제와 나라의 활력을 되살리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지 관심이다.프랑스의 병(病)은 경제뿐만 아니다. 지난달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현지 TV에 나와 퇴임 이후 구상을 얘기하면서 국민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극단주의를 배격하고 유럽의 이상을 간직하며 프랑스의 저력을 믿고 프랑스식 사회 모델을 옹호하라”는 부탁이었다. 그리고 “프랑스는 세계를 더 놀라게 할 수 있다”는 말도 남겼다.시라크의 눈에는 프랑스 국민들이 예전보다 자신감을 많이 상실하고 있는 것으로 비쳐진 듯하다. 프랑스가 자랑하는 사회 모델에 대해서도 그렇다. 프랑스식 사회 모델이란 관대한 사회복지 정책과 노동시장 보호를 양대 축으로 하는 이념이다. 영미식 자본주의의 대척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작년 교외지역에서 일어난 무슬림들의 폭동은 프랑스식 사회 모델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사례다.경제 성장도 경쟁국에 비해 뒤떨어지고 있다. 미국 투자은행인 모건스탠리는 최근 이런 프랑스를 ‘유럽의 새로운 병자(病者)’라는 표현을 썼다. ‘유럽의 병자’는 그동안 독일 경제를 비유하던 말이다.사실 프랑스는 나무랄 데 없는 사회 인프라, 적지 않은 다국적 기업, 유리한 지리적 위치 등 세계화 시대에 번영할 수 있는 많은 자산을 가졌다고 자부해 왔다. 풀어야 할 숙제는 많지만 이를 발견하고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문제는 정치적 결단력, 자명해 보이는 개혁 조치들을 수행할 수 있는 용기와 수완이라 할 수 있다.국제통화기금(IMF) 전 총재인 미셸 캉드시는 ‘더 일하라’는 말로 간단히 해법을 제시한다. 그는 “미국의 스미스 씨와 프랑스의 듀퐁 씨를 고용해 이들이 퇴직할 때까지 일을 시킨다면 스미스가 듀퐁보다 37% 정도 일을 더할 것”이라고 예를 들었다. 프랑스인들은 경제 활동을 다른 나라들보다 늦은 나이에 시작하고 노동 시간도 짧으며 일찍 은퇴한다. 그렇다고 일자리를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것도 아니다. 실업률은 지난 25년간 8% 밑으로 내려온 적이 없다. 청년 실업은 특히 높아 22%에 달한다. 성인의 41%만이 일하고 있다. 그 결과 프랑스의 1인당 국민소득은 25년 전 세계 8위에서 지금은 19위로 미끄러졌다.이런 문제는 노동시장의 경직성 때문만은 아니다. 정부 기능이 계속 확대되면서 민간의 활력이 사라지고 있다. 정부 지출은 국내총생산(GDP)의 54%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프랑스 공무원은 1982년 이후 100만 명 더 늘어나 총 500만 명이 됐다. 공공부문 노동자는 프랑스 노동력의 4분의 1에 달한다. 1970년에 비해 비중이 두 배로 늘었다. 또 유권자의 절반가량은 임금 연금 등 혜택을 정부에서 받고 있다. 개혁을 추진하려 해도 이들이 장애물로 작용하는 결과를 낳는다. 지금도 수많은 프랑스 우수 인재들은 공공 서비스 쪽에서 일을 찾고 있다.역사적인 이유를 찾을 수도 있다. 집단주의 내지 전체주의(collectivism), 국가주의(statism)적 전통이 오래도록 프랑스인들의 DNA에 이어져 내려왔다. 그래서인지 20개국을 대상으로 한 한 여론조사에서 자유시장을 최고의 경제 시스템이라고 보느냐는 물음에 프랑스인들의 36%만 그렇다고 응답하고 나머지는 부정하거나 긍정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아무튼 프랑스는 세계에서 점해 온 중량감을 유지하려면 이런 추세를 되돌려야 한다. 시라크 정부의 경험에서 볼 수 있듯이 개혁의 방법론이 철학보다 더 중요하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다.장규호·한국경제 기자 daniel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