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 잡아라’…지방 업체 대공세

대전·충남 소주 업체인 선양의 김광식 사장은 지난 2월 6일 이례적으로 서울로 올라와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국내 시장의 절반 가까이 차지하는 수도권 공략을 공식 선언하는 자리였다. 김 사장의 손에는 선양의 ‘중원’ 진출을 이끌 비장의 무기가 들려 있었다. 바로 2005년 출시 후 대전·충남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맑을 린’ 소주였다.김 사장은 ‘맑을 린’의 상품성을 확신한다. 기자간담회에서도 “대전에서만 알리기 아까워서 왔다. 너무 자랑스럽다”며 연신 자부심을 감추지 못했다. ‘맑을 린’은 지난해 말 산소 주입 공법으로 국내 특허를 취득했다. 산소를 분자 단위로 쪼개 소주에 녹여 넣는 방식이다.선양, 산소공법 ‘맑은 린’ 선전 기대선양은 ‘맑은 린’을 내놓으며 진로에 밀려 38%까지 떨어졌던 지역 시장점유율을 1년만에 10% 이상 끌어올리는 대반전을 일궈냈다. 선양 기업문화팀 관계자는 “지난해 11월 진로에 빼앗겼던 지역 소주 시장 정상 자리를 탈환했다”며 “전국 10개 소주 업체 가운데 2006년 시장점유율을 늘린 곳은 두산과 선양 단 두 곳뿐”이라고 말했다.선양이 수도권 진출을 노리는 것은 물론 지역시장의 한계 때문이다. 소주는 다른 제품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시장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10개 업체가 각자 연고 지역을 기반으로 시장을 나눠 갖고 있는 것이다. 이는 1973년 도입된 ‘1도 1사’ 정책에 뿌리는 두고 있다. 1996년 헌법재판소 위헌 결정으로 이 제도는 사라졌고 완전 경쟁 시대가 열렸다. 이와 함께 수도권에 연고를 둔 진로가 소주 시장의 절대 강자로 부상했다.소주 시장은 ‘지역성’이 강하게 나타나는 경향을 보인다. 비교적 지역성이 약한 강원 충청 전북에서는 지역 연고 업체들이 진로에 1위 자리를 내주고 시장점유율이 하락했다. 반면 대구·경북, 영남, 전남은 사정이 달랐다. 한때 지역 업체들의 시장점유율이 50%대까지 하락했지만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지역 기업을 살리자’는 분위기가 강해지면서 오히려 점유율이 급상승했다. 현재 금복주(대구·경북), 무학(경남), 대선주조(부산), 보해(전남)의 지역 시장점유율은 70~90%에 달한다.시장 경쟁에서 밀려난 지역 업체들은 한동안 어려움을 겪었다. 보배(전북)는 1997년 하이트맥주에 인수돼 하이트주조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백학소주(충북) 역시 같은 해 하이트맥주에 인수됐다가 2004년 지역 주류 업자에 재매각돼 충북소주가 됐다. ‘그린(1998)’, ‘산(2001)’을 내놓으며 꾸준히 수도권 진출에 공을 들여온 두산(강원)은 그나마 지난해 ‘처음처럼’의 대히트에 힘입어 12.5%의 시장점유율을 기록, 힘겹게 교두보 확보에 성공했다. 선양의 운명도 순탄치 않았다. 한동안 경영난을 겪던 선양은 지난 2004년 대구의 모바일 콘텐츠 업체 (주)5425의 조웅래 회장이 회사를 인수하면서 회생의 기회를 잡았다.선양은 지난해 두산에 시장을 일부 내주기는 했지만 여전히 수도권에서 절대 아성을 쌓고 있는 진로와 다양한 ‘전투’ 경험을 갖고 있다는 것을 강점으로 내세운다. 대전·충청은 전국 최대 접전지 중 한 곳이다. 진로와 선양이 50% 안팎의 시장점유율을 서로 넘나들며 치열한 경쟁을 벌여 왔다.올 들어 ‘중원’ 진출을 선언한 곳은 선양만은 아니다. 대구·경북의 맹주 금복주도 수도권 시장을 노리고 있다. 김동구 금복주 사장은 최근 “금복주가 지역에서는 90% 이상의 시장점유율을 보이고 있지만 지속적인 성장을 하기 위해서는 수도권 지역 입성밖에 달리 대안이 없다”며 출사표를 던졌다. 금복주의 기대주는 17.9도짜리 저도소주 ‘더블루’다.금복주는 지난 1월 ‘더블루’ 출시에 맞춰 전국지에 대대적인 제품 광고를 싣고 있다. ‘더블루’는 젊은 여성층을 겨냥한 금복주의 야심작이다. 알코올 도수를 17.9도로 크게 낮추고 병 색깔을 기존 녹색 대신 파란색으로 바꾸어 ‘패션성’을 강조했다. 금복주는 지난해 두산에 업계 2위 자리를 내주기는 했지만 여전히 지역 소주 업체 중 선두 기업이다. 경주법주의 전국 유통망을 이미 확보하고 있어 수도권 등 타 지역 진출에 훨씬 유리한 입장이기도 하다.영남 시장을 놓고 격렬한 ‘국지전’을 벌이고 있는 무학과 대선주조도 언제든 수도권 진출을 선언할 수 있는 잠재적 경쟁자로 꼽힌다. 이들은 지난해 11월 일제히 16.9도 신제품 ‘좋은데이(무학)’, ‘씨유(대선주조)’를 각각 내놓은 채 정면 대결을 펼치고 있다.한동안 주류 전문가들은 저도주의 마지노선을 20도로 잡곤 했다. 20도 밑으로 내려가면 소주 특유의 씁쓸한 맛 대신 ‘밍밍한 물맛’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무학과 대선주조는 이런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깨버렸다. 그동안 ‘남쪽’ 소주는 대체로 다른 지역보다 알코올 도수가 낮았다.무학과 대선주조가 16.9도를 선택한 것은 17도 이하 제품부터 밤 10시 이후 제한적으로 TV 광고가 가능하다는 점도 고려한 것이다. 무학은 영화배우 정준호와 가수 채연 콤비를 광고모델로 내세워 부산지역 3개 공중파 방송을 통해 TV광고를 내보내고 있다. 대선주조도 이에 맞서 영화배우 겸 탤런트 한효주를 모델로 기용했다. 소주 TV 광고가 20여년 만에 부산 경남 지역에서 부활한 것이다.무학과 대선주조는 상대의 텃밭을 공략하며 양보 없는 경쟁을 벌이고 있다. 두 회사의 라이벌 관계는 상당히 뿌리가 깊다. 1997년 부도 처리된 대선주조를 타깃으로 무학이 공개 인수·합병(M&A)에 나서면서 양측의 관계는 결정적으로 틀어졌다. 결국 대선주조는 최병석 전 회장과 사돈 간이던 롯데햄·롯데우유 신준호 부회장이 인수해 롯데그룹에 편입됐고 무학의 M&A 시도는 무산됐다. 이후 두 업체는 갈등을 빚는 일이 잦았다.천문학적 마케팅 비용이 관건지난해 두산이 ‘처음처럼’으로 거둔 대성공이 지역 소주 업체들의 수도권 러시를 촉발한 것은 분명하다. ‘처음처럼’은 두산이 6.1%에 불과하던 수도권 시장점유율을 불과 1년 만에 15.2%로 2배 이상 끌어올릴 수 있게 한 일등공신이다. 두산의 소주 업계 순위도 6위에서 2위로 4계단이나 뛰었다. 하지만 뒤늦게 수도권 공략에 나선 지역 업체들이 제2의 성공 신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지방 소주 업체들에 수도권 시장의 벽은 여전히 높다. 지난 2000년 당시 업계 2위이던 보해는 신제품 ‘천년의 아침’을 앞세워 수도권의 문을 두드렸지만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한 업계 전문가는 “서울에만 200여 명의 영업사원을 둘 만큼 대대적인 공세를 벌였지만 결국 빈손으로 철수했다”며 “오히려 진로의 역공으로 텃밭인 전남 지역의 시장을 빼앗기기도 했다”고 말했다.첫 번째 관건은 ‘실탄’ 확보다. 진로 관계자는 “수도권은 이미 진로와 두산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성숙 시장”이라며 “경쟁이 치열한 성숙 시장에 신규 진입하기 위해서는 유통 채널상의 진입 장벽 해소와 대대적인 광고, 판촉을 위한 마케팅 비용 투입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지방 소주 업체들은 수도권 시장의 거래처 관리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대적인 마케팅을 전개할만한 인적, 물적 자원도 턱없이 부족하다. 업계는 지난해 진로가 850억 원, 두산이 300억 원을 마케팅 비용을 투입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반면 선양의 지난해 매출은 주세 등을 빼면 440억 원에 불과하다. 금복주는 이보다 매출 규모가 크지만 천문학적인 마케팅 비용을 감당하기는 버거운 상황이다.선양이 수도권 진출에 앞서 지역시장 점유율에 신경을 쓰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역에서 안정적인 점유율을 유지해야만 수도권 공략에 필요한 ‘실탄’을 마련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올해 진로가 지역 시장 공략을 한층 강화할 것으로 보여 시장 방어가 쉽지만은 않을 전망이다. 2005년 진로를 인수한 하이트맥주는 올해 진로의 재상장을 추진할 계획이다. 이에 따라 몸값을 높이기 위한 진로의 대대적인 시장 공세가 예상된다. 업계 2위로 올라선 두산도 지난해 말 출고가 인상으로 수익성이 개선된 상황이다. 적극적인 마케팅에 나설 수 있는 여력을 확보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