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하지 않으면 망한다’…개혁 드라이브

한화그룹은 지난해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계속돼 온 상시 구조조정 시기의 종결을 선언했다. 그룹 부도의 위기 속에서 결의를 다지기 위해 각 계열사 사무실에 내걸었던 ‘필사즉생, 필생즉사(죽을 각오를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라는 비장한 글귀가 담긴 액자를 10년여 만에 떼어냈다. 국내 주요 그룹 가운데 마지막으로 유지하던 구조조정본부를 해체하고, 그룹 미래 전략을 짜는 경영기획실을 신설했다. ‘매각 후 임대방식’으로 팔았던 서울 장교동 그룹 사옥을 되찾았으며, 지배 구조 개선 노력을 인정받아 출자총액제한제도 적용 대상에서도 사실상 졸업했다. 2002년 인수한 대한생명은 알짜 계열사로 자리 잡았고, 그룹 전체로 매년 1조 원이 넘는 순이익을 거둬들이고 있다. ‘구조조정의 모범생’으로서 전혀 손색이 없는 화려한 성적표다.하지만 한화그룹에서 안도의 분위기를 체감하기는 쉽지 않다. 오히려 계열사 임직원들은 최근 들어 전례 없는 팽팽한 긴장감을 토로하고 있다. 그룹의 굵직한 현안만 챙기고 나머지는 최고경영자(CEO)들에게 믿고 맡기던 김승연 회장이 계열사별 해외 사업 진출 현황과 신성장 동력 발굴 성과를 하나하나 직접 챙기고 있는 것도 달라진 모습이다. 지난 1월 새 CI ‘트라이서클’ 선포를 계기로 전사적 혁신의 깃발을 내건 이후 나타난 변화들이다. 외환위기로 시작된 지난 10년간의 구조조정이 당장의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면, 새로운 혁신은 전통 제조업에 익숙한 그룹의 체질 개선, 내수 기업에서 글로벌 기업으로의 대변신 등 그동안 미뤄둔 간단치 않은 과제들을 건드린다.김 회장의 위기감은 올해가 새로운 변화를 시도할 수 있는 사실상의 마지막 기회라는 판단에서 출발한다. 김 회장은 “올해 변혁이 없으면 큰 위기가 온다”며 개혁 드라이브의 고삐를 죄고 있다. 연일 수위가 높아지는 김 회장의 최근 발언에는 변화의 기회를 놓쳐 ‘폐를 도려내는 아픔’을 겪어야 했던 1997년 외환위기 직전의 뼈아픈 실수를 되풀이할 수도 있다는 안타까움이 묻어 있다. 김 회장이 추진하는 혁신 전략의 핵심 키워드는 ‘글로벌 경영’, ‘브랜드 경영’, ‘하이브리드 경영’ 등 3개로 요약된다.◇내수 시장은 좁다, 세계로 나가자= 지난 1월 30일 김 회장의 긴급 호출을 받고 태국 방콕의 로얄오키드쉐라톤호텔에 모인 한화그룹 50여 명의 핵심 임원들은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김 회장이 직접 주재한 이날 ‘해외사업 진출 전략회의’는 오후 2시에 시작돼 다음날 새벽 5시가 돼서야 끝을 맺었다. 김 회장은 무려 15시간 동안 화장실만 다녀오며 흔들림 없이 줄곧 ‘글로벌 경영’을 외쳤다. 이날 회의에서 김 회장은 “내수 중심인 한화는 글로벌 사업 진출에 성공하지 못하면 향후 재계 10위권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며 현재 10%도 안 되는 그룹의 해외 매출 비중을 2011년까지 40%대로 끌어올린다는 구체적인 목표를 제시했다.현재 한화그룹은 화약 석유화학 유통 레저 금융 등 다양한 업종에 진출해 있지만 대부분의 계열사가 내수 중심의 사업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세계 시장에서는 후발 주자인 한화가 단기간에 성과를 올리는 데 일정한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한화그룹은 전략 지역 집중 공략을 통해 이러한 난관을 정면 돌파한다는 구상이다. 한화가 특히 공을 들이고 있는 곳은 ‘포스트 브릭스(BRICs)’로 꼽히는 TVT(태국 베트남 터키) 지역이다. 김 회장이 방콕에서 그룹의 첫 해외 전략회의를 개최한 것도 이 때문이다. 동남아시아는 한화그룹의 기존 해외 사업 기반이 집중돼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한화그룹 관계자는 “중국 인도 미국 등 기존 시장은 전 세계 기업이 모두 뛰어들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며 “시장 잠재력은 크지만 기존 기업들이 아직 진출하지 않은 TVT는 후발 주자인 한화가 시장을 선점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이라고 말했다. 한화는 TVT 외에도 동유럽 중앙아시아 중동 등을 해외 진출의 전략 지역으로 꼽고 있다.한화는 그룹 계열사들의 동반 진출을 통해 시너지 효과를 높이는 데도 주력하고 있다. 사업 연관성이 있는 계열사들이 함께 진출하면 초기 시장조사 비용을 절감하고, 브랜드 마케팅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판단이다. 한화그룹은 그룹 경영기획실 산하에 ‘해외 사업 진출 테스크포스(TFT)’를 운영하기로 했다. 각 계열사 해외 사업 담당자들이 사업 아이템을 가져와 공동 프로젝트 추진 가능성을 점검, 실행하기 위한 것이다. 현재 한화석유화학 한화무역 한화건설 대한생명 등 그룹 내 10개 계열사가 단독 또는 컨소시엄으로 도시 개발, 플랜트 건설, 자원 개발, 환경 사업 등에 대한 사업 기회를 검토 중이며, 조만간 성과가 가시화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기업 브랜드가 경쟁력이다= 한화그룹은 지난 1월 새 CI ‘트라이서클’ 선포를 계기로 브랜드 경영을 본격화하고 있다. 지난 2002년 대한생명 인수는 한화그룹의 사업 포트폴리오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과거 한화그룹은 중화학 공업, B2B 사업, 장치산업 위주로 성장·발전을 거듭해 왔다. 그러나 대한생명 인수 이후 그룹 내 소비자 접점 산업의 비중이 70%를 넘어서는 ‘소비자 지향형’ 그룹으로 위상이 뒤바뀐 것이다. 2005년 말 기준으로 그룹 전체 매출의 60%, 당기순이익의 41%를 대한생명을 포함한 금융 계열사가 담당하고 있다. 그룹의 전통적인 사업군인 화학·기계 분야를 제치고 금융사가 핵심 주력 계열사로 급부상한 것이다.이에 따라 고객과의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해지고, 브랜드 경영의 필요성이 커졌지만 국가 기간산업 이미지가 강한 기존 ‘한화’ 브랜드는 이러한 요구를 담아내는데 한계를 안고 있었다. 실제로 한화그룹이 실시한 소비자 이미지 조사결과를 보면 ‘한화’는 인지도에 비해 신뢰도나 호감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대한생명 인수 이후 달라진 그룹의 면모가 일반 소비자들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여전히 ‘전통적’이고 ‘국가 경제 발전에 기여하는’ 기업으로만 인식되고 있었다.한화의 ‘트라이서클’은 ‘인류의 발전과 삶의 가치를 향상하는’ 초일류 글로벌 브랜드를 지향한다. ‘트라이서클’에 등장하는 세 개의 원은 한화의 경영 철학인 ‘최고의 고객 감동’, ‘존경받는 기업’, ‘끊임없는 혁신’을 각각 상징한다. 이는 모든 그룹 임직원들이 실천해야 할 행동 강령이자 정신적 지표이기도 하다. 한화그룹이 ‘트라이서클’을 내놓은 이유는 “새 CI 선포를 계기로 의식에서부터 경영 체질까지 대변혁하자”는 김 회장의 말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CI 교체는 새로운 혁신 대장정의 출발점인 것이다.한화는 그룹 차원의 브랜드 경영을 실천하기 위해 브랜드관리위원회를 설치했다. 이 위원회는 초일류 한화 브랜드 구축을 위한 브랜드 관리 사무국 역할을 하면서 그룹 및 주요 계열사의 브랜드 경영 전략을 검토하고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게 된다. 또한 그룹 통합 브랜드인 ‘한화’에 대한 객관적인 위상을 측정하고 브랜드 경영의 전략 지표와 개선 과제를 도출, 관리하기 위해 매년 브랜드 위상 평가를 실시하기로 했다. 지난 1월 중순부터 운영에 들어가 브랜드 아케데미의 활동도 빼놓을 수 없다. 한화그룹 관계자는 “브랜드 경영의 성공 여부는 전 임직원이 새로운 브랜드 비전과 경영 철학을 이해하고 의식에서부터 행동까지 솔선수범하는데 달려 있다”며 “브랜드아카데미는 이러한 전사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 한화는 ‘1만 명의 브랜드 전도사 양성’을 목표로 1개월 과정의 온라인 브랜드 아카데미를 가동하고 있다.◇로마제국의 인재 경영을 배워라= 김 회장은 최근 그룹 임직원들에게 딜로이트컨설팅 김경준 전무가 쓴 <위대한 기업, 로마에서 배운다>의 일독을 권하고 있다. 전 계열사 과장급 이상 간부들에게 책을 한 권씩 선물하기도 했다. 김 회장은 “실력 위주, 충성심, 인수·합병(M&A) 필요성, M&A 후 문화접목 등을 위해 전 임원은 이 책을 읽고 교훈을 되새길 것”을 주문했다.로마는 자신들만의 특별한 조직 관리 기법이 있었기 때문에 광대한 제국을 오랜 세월 동안 유지할 수 있었다. 로마는 핵심 인재를 키우는 단계적 프로그램을 갖고 있었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인재를 활용했다. 뛰어난 인재라면 노예도 귀족이 되고 장수가 될 수 있었다. 반대로 능력이 없으면 귀족도 노예로 추락할 수 있을 만큼 유연한 조직 체계를 유지했다. 김 회장이 특히 주목하는 것은 로마제국의 열린 인재 활용 방식이다. 김 회장은 태국 전략회의에서 “해외 시장으로 적극 진출하는 글로벌 경영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조직 논리, 인재 관리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며 로마식의 열려 있는 인재 경영을 그 대안으로 제시했다. 상대적으로 리스크가 높은 글로벌 사업을 효과적으로 추진하려면 관리 중심의 낡은 관행에서 벗어난 유연한 사고가 필수적이라는 것이다.김 회장은 이를 ‘하이브리드 경영’으로 요약한다. 김 회장은 올 초 신년사에서 “한화의 새 역사는 하이브리드 시대에 걸맞은 하이브리드 문화, 하이브리드 인재의 성공적인 육성에 달려 있다”고 또 한 번 강조했다. 글로벌 한화를 이끌기 위해서는 국적, 학력, 나이를 따지지 않고 인재를 활용한다는 것이 김 회장의 지론이다. 다원성을 인정하는 하이브리드 문화는 오히려 한화의 경쟁력과 체질을 개선하고 시너지 효과를 강화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김 회장은 “한화의 순혈주의에서 탈피해 외부 인재들과 화학적 융합을 이루는 개방적인 마인드를 가질 것”을 강조하고 있다. ‘트라이서클’ 탄생하기까지고정관념 깨고 산업 디자이너에 의뢰한화그룹의 새 CI ‘트라이서클’(아래 오른쪽)은 세계적인 산업 디자이너 카림 라시드의 작품이다. 새 CI 개발 작업은 지난해 초 김승연 회장이 “강력한 기업 브랜드가 기업의 경쟁력과 운명을 좌우하는 시대이며 고객 주주 국민으로부터 신뢰받고 존경받는 기업이 되기 위해 일류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자”고 제안하면서 본격화됐다. 하지만 한화는 2004년부터 대한생명 인수로 크게 달라진 그룹의 위상을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브랜드 전략을 모색해 왔다. 그룹 사명 변경을 포함한 모든 대안이 검토됐지만, 결국 기존 사명을 그대로 유지하는 대신 CI를 교체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 과정에서 전문 업체로부터 수천 개의 시안을 받았으며 최종 시안이 몇 차례 김 회장의 까다로운 기준에 걸려 퇴짜를 맞았다.한화그룹이 CI 전문 업체 대신 산업 디자이너인 카림 라시드에게 작업을 의뢰하는 파격적인 선택을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집트 출생인 카림 라시드는 그 자신이 영국과 프랑스, 캐나다에서 성장한 전형적인 ‘하이브리드형 인간’이다. 40개 이상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하고 1년 중 절반 이상 해외 출장을 다니는 스타급 디자이너다. 소니의 전자제품, 아우디자동차, 프라다 화장품 용기 등이 그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미래지향적인 디자인을 추구하는 선두 주자로 세계 14개 미술관에 그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현대카드의 프리미엄 카드 ‘더 블랙’과 출판사 열린책들이 창립 20주년을 맞아 한정 제작한 ‘Mr. Know’ 책꽂이도 그의 작품이다.한화그룹이 제시한 가이드라인은 모두 5가지였다. 첫째는 그룹의 핵심 사업인 금융, 유통·레저 사업의 이미지에 부합돼야 하면 기존 제조·건설 분야에도 무리 없이 적용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소비자 접점 비즈니스가 크게 늘어난 만큼 소비자 지향적인 친근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도 전달해야 했다. 또한 한화가 지향하는 ‘세련되고 고급스러우며 글로벌하고 미래지향적인 이미지’를 담아야 한다. 한화의 핵심 철학인 신용과 의리에 부합되고 대기업 위상에 걸맞은 규모감과 대표성도 갖추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카림 라시드는 끊임없는 변화와 혁신을 통해 무한 성장을 해 나가는 세 개의 원을 통해 이러한 까다로운 요구들을 절묘하게 담아냈다. 세 개의 원은 한화의 경영 철학인 신뢰(Trust), 존경(Respect), 혁신(Innovation)을 뜻하며 금융 제조·건설 유통·레저 등 한화그룹의 세 사업부문이 서로 시너지를 이뤄 끊임없이 글로벌하게 변화, 성장하는 모습을 상징한다.한화는 올 초부터 새 CI ‘트라이서클’을 전 계열사 사업장에 적용하고 있으며 신동아화재를 한화손해보험으로, 63시티를 한화63시티로, 동양백화점을 한화타임월드로, 한화유통을 한화갤러리아로, 한화국토개발을 한화리조트로, 한화기계를 한화테크엠으로 각각 사명을 변경했다. 한화그룹은 지난 1952년 창립 이후 3차례 새로운 CI를 적용해 왔다. 첫 번째 CI는 1953년부터 1963년까지, 두 번째는 1964년부터 1994년까지, 그리고 세 번째인 기존 C(위 왼쪽)I는 1994년부터 사용해 왔다. 이번 ‘트라이서클’은 한화그룹의 네 번째 CI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