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B(옛 경제기획원) 출신 아니면 안 된다?’참여정부 말기 들어 옛 경제기획원(EPB) 출신 관료들이 행정부 내 주요 포스트를 ‘싹쓸이’하고 있다. 과거 정권에서도 EPB 출신들의 중용 현상은 마찬가지였다.국가 발전 전략 등 큰 그림을 그리는데 능하고, 시장에 휘둘리지 않고 정책을 짤 수 있는 객관성이 담보되는 ‘엘리트’라는 점에서 EPB 출신 관료들은 항상 경제 정책 라인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러나 참여정부 말기엔 그 정도가 너무 심하지 않느냐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왜 이런 얘기가 나올까. 우선 그 수치를 보면 짐작이 간다. 현재 행정부 내 장관(장관급 포함) 40명 중 EPB 출신 장관은 모두 8명이다. 5명 중 1명이 EPB 출신인 셈이다.한명숙 총리 후임으로 거론되는 전윤철 감사원장(부총리급)이 행시 4회로 가장 연장이고 △권오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15회) △김영주 산업자원부 장관(17회) △장병완 기획예산처 장관(17회) △노준형 정보통신부 장관(21회) △김성진 해양수산부 장관(15회) 등이 모두 EPB에서 한솥밥을 먹던 사이다. 사실상 현 정부의 경제 정책을 주도하고 있는 변양균 청와대 정책실장(14회)도 예산과 기획을 담당하면서 이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했고, 지난 1월 4일 개각 때 국무조정실장이 된 임상규 씨(17회)도 같은 배경을 갖고 있다.여기에 현재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의 정책위의장을 맡고 있는 강봉균 씨(6회)까지 포함하면 경제 정책과 당·정·청의 모든 채널이 EPB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차관(차관급 포함) 101명 중에서도 과거 EPB 출신이 7명 정도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박병원 재정경제부 제1차관(17회)과 윤대희 청와대 경제정책 수석(17회)은 행시 동기로 EPB 경제기획국과 예산실에서 함께 일했다. 지난해 보건복지부 차관으로 나간 변재진 씨(16회)도 EPB에서 기획과 예산분야를 섭렵한 정통 EPB맨이고 김대유 통계청장(18회)도 EPB에서 재정경제부로 자리를 옮긴 케이스다.경제 부처의 내부 사정을 들여다보면 가히 EPB판이라는 말이 실감 난다. 재경부는 장관(권 부총리)과 차관(박병원 차관)이 모두 EPB 출신 기획통이고, 정보통신부 역시 노준형 장관과 유영환 차관이 EPB 출신의 행시 21회 동기다.정부 관계자들은 “참여정부는 외환위기 뒤처리를 담당했던 DJ정부 때와 달리 경기안정과 투자활성화, 동반성장형 예산 배분 등 거시적인 경제 이슈들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EPB 출신 관료들을 더 중용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해석했다.반면 경제 부처에서 EPB 출신들과 경합을 벌이던 재무부(MOF) 관료들의 몰락은 EPB 출신들의 중용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대부격인 이헌재 전 부총리가 외환은행 매각과 관련해 검찰수사를 받은 것을 비롯해 변양호 보고펀드 대표, 연원영 전 자산관리공사 사장, 김유성 전 대한생명 감사 등 재무부 출신 인사들이 줄줄이 돈 문제로 구속되거나 재판을 받고 있다.외환위기 후 이규성 전 재무부 장관과 이헌재 부총리로 대표되던 모피아(재무부 MOF의 영문 명칭과 마피아의 합성어) 집단이 몰락하게 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한 재무부 출신 관료는 “지난 정권에서 금융 구조조정을 하는 과정에서 담당자들이 상처를 많이 입어 온전한 이를 찾기 어렵게 됐다”고 말했다. 민감한 사안을 처리하다 보니 각종 이권 관련 사건에 개입되는 경우가 많았고 이에 따라 여론과 정치권에서 뭇매를 맞게 돼 중용되는 케이스가 줄게 됐다는 것.이런 모피아의 몰락을 대표적으로 보여준 게 최근 청와대 인사에서 있었다. 그동안 재무부 출신 관료들의 몫으로 여겨지던 청와대 경제정책비서관 자리를 놓고 재무부 출신과 EPB 출신 간의 힘겨루기가 벌어졌으나 결국 김대기 전 기획예산처 재정운용기획관(22회)으로 낙점된 것. 이로써 청와대 주요 경제 정책 라인이 윤대희 수석과 김대기 비서관 등 EPB 일색으로 꾸며지게 된 것이다.EPB 출신의 중용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한 관료는 “EPB 출신 관료들은 경제 정책의 기획이나 예산 배분 등 거시분야에는 능할지 몰라도 금융이나 세제 등 실물경제에 대해서는 약할 수밖에 없다”며 “경제 정책 라인이 EPB 일색으로 이뤄지고 있어 거시와 미시 정책의 균형이 깨지고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