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층 변해야 한국 경제 살아납니다’

대담 = 양승득 편집장경제수석비서관, 재무부 장관 등을 역임한 사공 일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66)은 IMF 특별고문, ASEM비전그룹 의장 등 국제적으로 많은 활동을 하고 있는 대한미국의 대표적 경제 원로다. 최근에도 미국, 중국, 필리핀, 싱가포르, 베트남 등지에서 열린 각종 국제경제회의에서 좌장이나 주제 발표자로 참여한 바 있는 그는 <한경비즈니스>와의 인터뷰를 위해 아침 일찍 세계경제연구원 사무실에 모습을 나타냈다.취재진이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사무실을 찾은 까닭에 사공 이사장은 약속 시간에 맞게 도착하고도 약간 당황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이내 경제 원로의 ‘한국 경제 해법을 듣기 위해 뵈러 왔다’는 인터뷰 취지를 설명하자 마치 강연을 준비해 온 듯 많은 얘기를 물 흐르듯 쏟아냈다. 그동안 한국 경제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는 얘기다.“경제 성장은 복리의 게임”임을 강조한 사공 이사장은 “무엇보다 성장잠재력을 제고하는 게 우선”이라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한국 경제의 해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지금 우리가 어떤 시대적 여건 속에 살고 있는가를 잘 알면 해답은 명확하다는 게 인터뷰 내내 그가 반복해 말한 내용이었다. 영상의 기온을 회복한 바깥 날씨처럼 맑고 명쾌한 답변이 이어졌던 사공 이사장과의 일문일답을 소개한다.한국 경제의 현주소를 짚어주십시오.“현재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겨우 2만 달러 수준에 와 있습니다. 선진국까지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지요. 그런데 한국 경제의 성장 잠재력은 예상외로 크게 줄고 있어 문제가 심각합니다. 경제 성장은 복리의 게임입니다. 그래서 경제성장률이 약간만 차이가 나도 10~20년 후에는 그 격차가 엄청나게 커집니다.”그렇다면 성장 잠재력을 끌어 올리는 게 급선무겠습니다.“네, 그렇습니다. 우선 성장 잠재력을 결정하는 3가지 중요 요소를 살펴봅시다. 그 세 가지 요소란 노동 투입량과 자본 축적, 그리고 흔히 경제학자들이 총요소생산성(Total Factor Productivity)이라고 부르는 경제전체의 효율성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 중이고 근로시간도 많이 줄었습니다. 그래서 투자와 경제 전체의 효율성을 더욱 제고해야 합니다.”최근 기업의 설비투자가 무척 저조합니다.“최근 들어 조금씩 늘어나고는 있지만, GDP 대비 설비 투자 비중이 환란 전에 비해 너무 낮아 걱정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하면 기업 환경을 개선해 투자를 늘릴지가 우리 경제의 큰 과제입니다. 그래서 정치를 안정시키고 국가 안보를 튼튼히 하고, 정부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일도 중요하며, 각종 규제 완화와 노사안정, 그리고 현재 우리 사회에 퍼져 있는 반기업 정서의 불식 등도 이룩돼야 하는 것입니다.”역시 기업 환경 개선이 시급하다는 뜻이군요.“오늘 우리는 소위 세계화(globalization)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세계화 시대는 일자리가 국경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시대입니다. 따라서 일자리를 창출하는 기업을 유치하고 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개선하는 일이 시급한 것입니다. 국민 복지 향상을 위해 일할 의욕과 능력을 가진 우리 국민 모두에게 생산적인 일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요즘 경제가 정치에 휘돌리고 있다는 지적이 적지 않습니다.“우리는 강력한 대통령 책임제를 하는 나라입니다. 따라서 대통령의 힘이 실린 경제총수와 경제팀이 소신 있게 일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준다면 정치논리를 최대한 막아낼 수 있을 터인데, 현재 그렇지 못한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국정의 우선순위가 경제에 두어져 있지 못한 데에도 문제가 있습니다.”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서도 하시고 싶은 말씀이 많겠군요.“제가 지난 10여년간 줄곧 주장해온 바이지만, 우선 우리 정부 경제정책의 기획조정기능을 강화해야 합니다. 정부 조직은 정부에겐 목수의 연장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정부조직부터 정비를 해야지요. 그리고 명실상부한 정부 내 경제총수가 있어야 하고 경제를 보는 시각이 비슷한 경제팀과 함께 오래 일할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현재의 각종 정책의 혼선과 일관성 부족은 이러한 정부의 조직과 그 운영에서 비롯된 것이 많습니다.”반값 아파트 등 경제 정책에서도 포플리즘(Populism·인기영합주의)에 근거한 주장이 많은 듯합니다.“얼마 전에 타계한 20세기가 낳은 최고 경제학자중 한 분이었던 밀턴 프리더먼(Milton Friedman)은 “공짜 점심은 없다.”란 말로 더욱 유명했지요. 그것은 점심을 아무 대가 없이 그냥 사주지 않는다는 뜻보다는 점심을 짓는 데는 자원이 소요되었고 누군가는 그 대가를 지불했다는 말이지요. 그런 측면에서 반값 아파트의 반값은 누군가 지불하며, 그것이 가능한가를 따져봐야 합니다. 경제 원리를 무시한 인기 영합적인 정책들은 결국 경제를 멍들게 함으로써 후손들이 큰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결국 지도층이 잘해야 한다는 뜻이군요.“그렇습니다. 오늘의 기성세대와 사회지도층이 잘해야 합니다. 머지않은 곳에 있는 필리핀을 보십시오. 1960년대 초반에 우리의 일인당 국민소득의 3배 정도이던 필리핀은 현재 우리 소득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칩니다. 우리도 잘못하면 다른 나라와 거꾸로 될 수 있습니다.”원화 절상 추세가 한국 경제의 체력을 벗어난 게 아니냐는 견해가 있습니다.“환율이란 화폐 간 교환비율 아닙니까. 그래서 원화 가치의 절상은 미국 달러 가치의 절하를 뜻합니다. 그런데 미국 경상수지 적자 규모라든지 현재 경기가 서서히 하강한다든지 하는 요소 등을 볼 때 미국 달러화는 앞으로 상당기간 약세를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원화의 절상 정도와 속도가 문제가 되겠지만 우리 기업은 원화절상에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소리도 있으나 지금처럼 세계 금융 시장에서 거래되는 외환 규모와 각종 거래 방식 등을 고려할 때 정부가 나서서 시장의 대세를 크게 바꿀 수 없습니다.”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에 대해 의견이 분분합니다.“미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시장인 동시에 제도적으로나 기술면에서 가장 앞선 나라인 만큼 한·미 FTA 추진은 분명 한국 경제에 긍정적인 일입니다. 무엇보다 한·미 FTA를 통해 한국 경제는 제도개선, 경쟁 촉진 등의 효과를 얻고 경제 효율성을 높이는, 단순하게 계산하기 어려운 이점을 얻게 됩니다. 특히 금융, 의료, 교육, 법률 등 전 분야에 걸쳐 서비스 산업이 선진화되는 계기가 될 겁니다.그런데 유독 반대의견이 많지 않습니까.“정해진 시한 내에 끝내야 한다는 점 때문이겠지요. 미국의 무역촉진권한(TPA·Trade Promotion Authority)에 따라 양국 정부는 협상 데드라인을 2007년 3월로 보고 있습니다. TPA는 사실상 통상협상의 권한을 가진 미 의회가 대통령과 행정부에 부여한 무역협상 권한입니다. TPA가 소멸되면 의회는 행정부가 타결한 무역협정을 수정할 수도 있어 통상협상과 비준이 쉽지 않죠. 신중론자들은 ‘왜 미국 법에 우리가 신경 써야 하느냐’는 이야기를 하곤 하는데 문제는 한·미FTA를 더 필요로 하는 쪽이 한국이라는 사실입니다. 미 무역대표부(USTR)가 한국을 협상 대상국 우선순위에서 배제하고 수출 면에서 경합국인 대만이나 일본과 FTA를 추진한다고 상상해보면 한·미FTA가 얼마나 절박하게 필요한 것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한·미FTA가 한국 경제를 한 단계 성장시키고 성장 잠재력을 키우는 중요한 계기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약력: 1940년생. 64년 서울대 상과대 졸업. 66년 미 UCLA 석사. 69년 미 UCLA 박사. 69년 미 뉴욕대 교수. 73년 KDI 재정 금융실장(부원장). 81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자문관. 83년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87년 재무부 장관. 89년 IMF 특별고문. 2003년 대통령 국민경제원로자문회의 위원. 2003년 고려대 석좌교수(현). 93년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현)정리=김소연 기자 / 사진=서범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