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적화물 유치에 ‘올인’… 세계 최강

우리 정부가 ‘동북아 물류허브’ 전략을 포기했다. 대신 주요 항구에 거점을 마련해 물류산업을 키우는 ‘글로벌 네트워크’로 선회하기로 했다. 중국의 항만 투자가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이뤄지면서 경쟁이 어렵다는 점을 자인한 것이다. 금융허브 전략도 비슷한 처지에 몰려 있다. ‘허브 정책’의 구호만 남발했지 정확한 수요 예측과 장기 전략은 부재했던 탓이다. 서비스 강국이자 세계 최고 물류허브인 싱가포르는 어떤 경쟁력으로 중국의 추격을 뿌리치고 있는지 현지에서 알아봤다.지난 4일 싱가포르 최신 항만인 파시판장 터미널의 트럭 진입 게이트. 선적할 컨테이너를 실은 트럭들이 20여 개 게이트에서 바삐 수속을 밟고 있었다. 운전사들이 자신의 신원과 컨테이너의 내용물을 알리는 ID카드를 리더기에 가져다 대고 잠깐 트럭의 무게를 체크하자 차단기가 스르르 열렸다. 통과에 걸린 시간은 불과 20여 초. 컨테이너 트럭이 꼬리를 물고 있는 광경을 많이 봐온 기자로선 신선하기 그지없었다.터미널 안의 브리지 크레인(bridge crane)에서도 사람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싱가포르항 중에서도 먼저 개발된 탄종파가 터미널 등에선 크레인마다 기술자가 올라가 작동하지만 파시판장에선 본부 컨트롤타워에 앉은 한 사람이 6대의 크레인을 동시에 조작한다. 이런 항만이 1년 365일 하루, 한 시간도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으니 ‘경쟁력’에 대한 설명을 굳이 듣지 않아도 쉽게 이해됐다.싱가포르항만공사(PSA)의 탄 푸아이 힌 최고운영책임자(COO)는 “여기로 들어온 컨테이너 중 3분의 2는 수일 내에 다른 항으로 떠나고 16% 정도는 하루가 되기 전에 빠져 나간다”며 세계 최고의 컨테이너 처리 속도를 자랑했다. 화물을 찾지 못할 때 그 원인을 파악하고 대처하는 속도도 단연 세계 최고로 꼽힌다. 하루 6만 개의 컨테이너를 처리하면서도 짐을 못 찾는 경우는 공항에서 승객이 화물을 못 찾는 경우보다 적다고 PSA는 비유했다.이처럼 ‘속도’가 유난히 강조되는 것은 환적항(換積港,transhipment)으로 개발된 싱가포르항의 특성 때문이다. 지리적으로 미주와 구주, 아시아와 오세아니아의 한가운데 위치해 수출입 화물이 집결될 수 있는 입지를 최대한 활용한 것이다. 세계적 물류회사인 백스글로벌 싱가포르에서 일하는 최준영 부장은 “예를 들면 커피와 크림, 설탕 등을 한데 모아 커피 세트를 만들어 다시 내보내는 식”이라고 알기 쉽게 설명했다. 이런 환적 화물은 싱가포르항이 처리하는 물동량의 80%를 차지한다. 전 세계 컨테이너 환적 물량의 5분의 1에 달한다.싱가포르항은 작년 2320만 TEU(20피트 길이 컨테이너 한 개를 가리키는 단위)의 컨테이너를 처리해 7년 만에 홍콩을 누르고 세계 1위 컨테이너 항구로 재 부상했다. 이는 전년보다 8.9% 늘어난 물량. 2위로 밀린 홍콩은 2.3% 성장에 그쳐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우리나라 부산항(1184만 TEU)과 비교하면 두 배가량 큰 규모다.결국 환적 화물을 집중 유치한 전략적 선택이 싱가포르항의 명성을 다시 찾게 해준 것이다. 물류산업 육성이라는 국가적 전략, 환적 화물에 특화한 산업 전략 모두 ‘선택과 집중’이란 원칙을 확고히 틀어쥐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전략을 선택한 다음에는 과감한 투자를 실행에 옮겼다. “싱가포르의 물류 경쟁력은 하드웨어(물류시설)가 아닌 소프트웨어(세계적 네트워크와 IT기술 등)”(유진 림 어코드 익스프레스 사장)라는 주장이 있지만 그래도 싱가포르항의 규모는 한마디로 어마어마하다. 현재 PSA가 운영하는 4개 항구에는 43개 버스(berth, 배 1척을 접안할 수 있는 시설)가 설치돼 최대 2400만 TEU의 컨테이너를 처리할 수 있다. 탄 푸아이 힌 COO는 “이 정도 수의 컨테이너를 죽 늘어놓을 경우 지구를 세 바퀴 돌고도 남는 양”이라고 설명했다.PSA의 확장 계획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2011년까지 15개 버스를 추가로 건설해 컨테이너 처리 용량을 3100만 TEU로 끌어올린다는 목표다. 3단계 항만 확장 계획도 검토하고 있다. 16개 버스를 2018년까지 또 건설해 꿈의 5000만 TEU 시대를 연다는 야심 찬 계획을 입안 중이다. 여기 설치될 신설 키 크레인(배에서 컨테이너를 내리는 크레인)들은 초대형 선박에 적재된 22열의 컨테이너 끝 열까지 팔을 뻗어 작업할 수 있도록 대형으로 제작된다.글로벌 기업들이 선호하는 최적의 입지를 제공한 것도 성공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물류허브가 됐든, 금융허브가 됐든 모두 사람이 하는 일이어서 싱가포르 정부는 숙련된 인력을 길러내는 데 집중했다. KPMG 보고서에 따르면 싱가포르는 코스트 경쟁력이 가장 높은 나라로 꼽히고 있다. 미국의 코스트 지수를 100으로 봤을 때 싱가포르는 77.7을 기록했다. 2위인 캐나다(94.5)와도 큰 격차를 보였다. 세계은행 보고서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기업하기 좋은 곳으로 평가받고 있다.현재 싱가포르 내의 외국 물류기업은 무려 1000여 개. 싱가포르 전체 고용의 52%, 국내총생산(GDP)의 35%가 외국 기업에서 창출되고 있다. 전반적으로 강력한 리더십을 갖고 있는 싱가포르 정부의 특성, 정교한 사회 시스템, 미래에 대한 혜안, 정부의 의지를 믿고 따르는 국민성이 있었기에 이런 투자가 결실을 볼 수 있었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았다.돋보기 야심찬 항공산업 육성책아시아 최고 물류·제조 중심 꿈꿔싱가포르는 창이공항으로 대변되는 항공물류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작년 창이공항 이용객은 총 3200만 명으로 전년 대비 5% 늘어났다. 올 1분기에는 820만 명으로 25년래 최고치를 기록할 전망이다. 항공사와 운항 항공기 수도 계속 증가하고 있다. 83개 국제 및 역내 항공사들이 매주 4100편의 항공기를 띄워 55개국 180개 도시로 사람들을 실어 나른다.이보다 더 놀라운 것은 싱가포르를 항공산업 전반을 아우르는 허브로 육성한다는 목표를 세웠다는 점이다. 이미 싱가포르 항공산업은 아시아 지역 항공, 소모성 자재사업(MRO) 서비스 시장의 25%를 차지하며 급성장하고 있다. 관련 시장만 2004년 44억 싱가포르달러에서 작년 52억 싱가포르달러로 성장했다.싱가포르 경제개발청(EDB)은 6000만 싱가포르달러를 들여 서북쪽 셀레타공항 인근에 항공우주공원(aerospace park)을 만들 방침이다. 장장 12년에 걸친 공사가 끝나면 이 파크에는 항공기 MRO 전문 업체, 부품과 장비 메이커, 훈련센터, 항공물류 민간 기업이 들어설 예정이다. 고겡화 EDB 청장은 “이 파크가 완성되면 싱가포르가 아시아 최고의 항공기 MRO 허브가 되는 것은 물론 이 분야에서 아시아의 성장 잠재력을 현실화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S 자야쿠마 부총리는 지난 2월말 열린 아시아 항공우주산업 2006 행사에서 밝힌 연설에서 “싱가포르는 아시아 최대, 가장 광범위한 MRO 입지로서 롤스로이스(항공기 엔진 제작), GE 항공 서비스, 프라트&휘트니 같은 세계 주요 항공 업체의 보금자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싱가포르는 세계적 수준의 항공기 디자인과 제조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미 연방항공국(FAA)과 국제항공운송협회(IATA)의 아시아지역 본부가 있다.싱가포르는 항만과 공항에만 투자하는 것은 아니다. 기업이 물류와 관련해 요구하는 것은 하이브리드 린(Hybrid Lean, 항만 공항 철도 페리 등을 한데 묶어 물류비용을 최적화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리콴유 전 총리는 “먼 훗날엔 말레이시아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른바 SKRL(Singapore Kunming Rail Link) 사업으로 일컬어지는 철도 계획은 싱가포르에서 출발해 말레이시아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미얀마를 지나 중국 쿤밍까지를 연결하겠다는 것이다. 세계 컨테이너 화물의 블랙홀인 중국을 직접 공략하기 위해 싱가포르는 주변국들과 국제기구를 설득하면서 ‘블루오션’을 개척하고 있다.싱가포르=장규호 한국경제 국제부 기자 daniel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