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도 위기에 몰렸던 팬택계열이 회생의 기회를 잡았다. 팬택 채권단은 지난 12월 15일 산업은행에서 채권은행 자율협의회를 열고 팬택의 ‘워크아웃’ 개시를 최종 결정했다. 이에 따라 지난 11일부터 시작된 채무 유예가 두달간 연장되고, 채권단은 외부 실사기관을 선정해 팬택계열의 재무구조와 사업전망 등에 대해 정밀 실사를 하게 된다. 실사 결과 기업의 회생가치가 크다고 판단되면 팬택과 경영 개선 약정(MOU)을 맺고 본격적인 구조조정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경영 개선 계획에는 부채의 만기 연장과 이자율 조정, 채권을 주식으로 바꾸는 출자 전환 등의 조치가 포함된다. 또 채권단은 이날 조만간 팬택에 자금 관리인을 파견하고 공동 관리에 착수하기로 했다. 현재 팬택의 부채 규모는 1조5000억 원에 달한다.그러나 워크아웃 진행이 순탄치만은 않을 전망이다. 팬택의 기업어음(CP) 및 회사채를 갖고 있는 제2금융권이 자금 회수에 나설 경우 원활한 워크아웃 진행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 ‘기업구조조정촉진법’이 지난해 말로 시한이 만료돼 채권단의 100% 동의를 얻어야만 공동 관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팬택계열 CP는 종합 금융사와 증권사를 통해 단위 신용협동조합과 새마을금고 등에 많이 팔려 나간 상태다. 회사채의 경우 보험 종금 여신전문 신용금고 투신사 증권사 등 제2금융권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채권단은 팬택과 공동으로 제2금융권 및 소액 채권자들과 개별 접촉을 통해 ‘확약서’를 내고 협약에 따르도록 설득할 계획이다. 하지만 증권사 투신사 등은 펀드 가입자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번거로운 절차를 밟아야 한다. 팬택계열 회사채의 70%가량을 수탁하고 있는 5개 증권사는 채권단의 워크아웃 개시 결정에 따라 조만간 입장을 정리하기로 했다.팬택계열은 1991년 자본금 4000만 원, 직원 6명의 무선호출기 전문 업체로 출발해 삼성전자 LG전자와 함께 국내 휴대폰 ‘빅3’에 올랐다. 지난해 3조2000억 원의 매출을 올려 1990년 이후 창업한 국내 기업 중 유일하게 매출액 1조 원이 넘는 기업에 꼽힌다. 2001년 현대큐리텔(현 팬택앤큐리텔), 2005년 SK텔레콤의 자회사 SK텔레텍을 인수·합병해 규모로는 LG전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VK 등 중소 휴대폰 업체들의 연이은 부도 이후 자금 악화설에 시달리면서 만기가 돌아오는 CP 상환에 어려움을 겪다 지난 11일 결국 채권단에 워크아웃을 신청했다. 팬택계열은 현재 팬택 팬택앤큐리텔 등 휴대폰 제조 2개 법인과 지주회사격인 팬택C&I를 계열사로 거느리고 있다.브랜드·법인 통합 자구안 마련팬택은 워크아웃을 신청하면서 신사옥 및 공장 처분, 법인 통합 등 자구안을 함께 제시했다. 서울 상암 디지털미디어센터에 짓고 있는 신사옥을 자산유동화증권(ABS) 형태로 처분하기로 했다. 중국과 멕시코 공장은 물론 김포공장까지 매각한 뒤 재임대해 사용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또한 큐리텔 브랜드를 정리하고 프리미엄 브랜드인 스카이로 일원화한다. 팬택과 팬택앤큐리텔로 이원화돼 있는 법인도 통합을 추진하기로 했다.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휴대폰 모델도 대폭 줄인다. 박병엽 부회장을 비롯한 경영진도 팬택을 살릴 수 있다면 자리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뜻을 이미 채권단에 밝혔다.팬택은 워크아웃 개시로 단기 유동성 위기만 넘기면 조속한 경영 정상화가 가능할 것으로 낙관하고 있다. SK텔레텍 인수 효과가 내년부터 가시화되는 데다 이미 외국에서 대규모 물량을 수주해 놓아 일감은 충분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팬택의 근본적인 위기는 글로벌 경쟁 환경의 변화에서 비롯됐다. 휴대폰 시장은 이미 포화상태에 이르러 ‘공룡’만 살아남을 수 있다. 노키아 모토로라 삼성전자 LG전자 소니에릭손 등 5대 기업이 전 세계 시장의 80% 이상을 과점하고 있다. 팬택은 독자 브랜드가 취약하고 소비자를 끌만한 히트 제품도 내놓지 못했다. 올 초 인원 감축 등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갔지만 상황을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휴대폰 업계는 팬택의 워크아웃 소식으로 뒤숭숭한 분위기다. 비슷한 처지의 많은 중소 휴대폰 업체들이 ‘외환위기 이후 최대 규모’라는 이번 워크아웃의 성공 여부를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