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 다스리고 싶다면 ‘지위 던져라’

요즘 직장인들은 너나없이 한마디로 ‘불안’하다. 직장에서의 자리가 불안하고 집에 오면 남편의 자리가 불안하다. 눈을 돌리면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들만 클로즈업 된다. 심지어 다른 사람이 자신보다 평수 넓은 아파트를 가지고 있어도 불안해진다. 아파트 평수가 작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주목’을 덜 받을 수 있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아파트 평수가 작으면 소유자의 사회적 지위마저 아주 ‘볼품없게’ 느껴지는 것이다.<불안>을 쓴 알랭 드 보통은 현대인의 이러한 징후를 ‘사회적 지위(Status)’로 인한 불안이라고 설명한다. 즉 불안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주목받기 위해 끊임없이 사회적 지위를 추구하는 자본주의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부를 축적하려는 이유도 재산이 많은 사람에게 더 관심을 갖게 되고 주목하게 되는 데서 찾고 있다. 베스트셀러 제목처럼 누구나 부자와 점심 먹기를 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그렇다면 우리의 선조들은 어떻게 사회적 지위에서 비롯되는 불안을 다스렸을까. 사회적 지위로 인한 불안은 신분제 사회에서 오히려 더 컸을 테지만 선인들은 때로 사회적 지위를 미련 없이 버림으로써 불안을 다스리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서애 유성룡의 수제자로 퇴계 학맥을 이은 진양 정씨의 우복 정경세(1563~1633)를 들 수 있다.우복은 경북 상주 청리면에서 태어나 18세에 상주 목사로 부임한 서애 유성룡의 문하에 들어갔다. 그는 퇴계 이황의 양대 제자인 유성룡과 김성일 가운데 유성룡의 학맥을 잇는 수제자가 되었으며 인조 때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다.그는 당쟁이 격화되자 벼슬을 버리고 한양을 훌쩍 떠나 낙향했다. 다시 벼슬길에 오른 우복은 반대파에 탄핵을 받자 또다시 벼슬을 버리고 한양을 떠났다. 그리고 우복은 낙향 길에 상주 외서면에 정착해 초옥을 짓고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다. 그곳이 바로 현재 ‘우복 종가’가 있는 곳이다. 그 입구에는 방 한 칸의 초옥이 있다. 우복은 단출한 초옥에서 제자를 가르치며 청빈한 선비의 삶을 살았다. 그는 스승인 서애가 집 한 칸도 남기지 않고 청빈하게 살다 세상을 뜨자 그를 추모하는 시를 지었는데, 그 역시 서애에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사회적 지위 스스로 반납영조 때 그 후손들에게 땅이 내려졌다(이를 ‘사패지’라고 한다). 후손들은 이곳에 새집을 짓고 우복을 추모하며 대대로 살아왔다. 지금 이곳에는 우복의 15대 종손인 정춘목 씨가 어머니 이준규 씨와 함께 종가를 지키며 살고 있다.우복의 삶은 요즘의 ‘노마드(nomad·유목하는 인간)’를 연상케 한다. 자크 아탈리에 따르면 전통사회에서 노마드는 사회의 주변부 세력, 일탈자로 간주된 개념이다. 우복 정경세는 대제학을 지냈고 또 기호학파의 김장생과 더불어 17세기 조선의 사상의 중심에 선 인물이었지만 스스로 권력의 주변부로 내려와 노마드적 삶을 자처했다. 당쟁이 격화되자 그는 권력을 버리고 초가삼간에 은거함으로써 사회적 지위를 스스로 반납했던 것이다.우복 정경세의 이런 노마드적 삶은 불안의 근원이 되는 사회적 지위를 던져버림으로써 불안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불안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다.우복의 삶은 사회적 지위로 인해 불안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대부분 현대인들은 끝없는 불안을 불러오는 지위를 얻기 위해 투쟁한다. 사회적 지위가 없으면 마치 폐차 직전의 자동차처럼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직장인들의 딜레마일 것이다.최근 <내려놓음>이라는 책이 인기라고 한다. 하버드대 박사학위를 가진 이용규 씨의 이야기로, 그는 몽골로 달려가 초원에 욕망을 내려놓자 오히려 ‘채워짐’을 체험했다고 한다. 물론 종교적 신념에 따른 것이지만, 그의 선택은 끊임없이 부와 사회적 지위를 탐하는 현대인들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우복이 낙향 길에 초옥을 짓고 그의 욕망을 내려놓았듯이 이용규 씨는 몽골 초원에 자신을 내려놓음으로써 자신을 되찾은 것은 아닐까. 이들의 삶이야말로 ‘내려놓음의 인간경영학’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