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익률 인플레보다 높아야 ‘안심’

퇴직연금이 도입된 지 1년이 됐다. 도입 당시 ‘정착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예상처럼 지난 1년 동안의 성과는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 10월말 현재 퇴직연금 가입 사업자는 14만7057명으로 전체 가입 대상인 997만여 명의 1.47%에 불과한 실정이다. 가입 대상 사업장도 1만2926개 사로 전체의 2.61%에 그치고 있다. 적립금액은 4676억 원에 머물렀다. 이제 겨우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회사 망해도 퇴직금 그대로퇴직연금제도란 기존 퇴직금제도와 달리 회사 외부의 금융사에 퇴직금을 의무적으로 적립하는 제도다. 기존 퇴직금의 경우 대부분의 기업들이 장부상으로만 퇴직금을 쌓아두기 때문에 회사가 망하기라도 하면 근로자는 이마저도 받지 못하는 사태가 자주 발생했다. 하지만 퇴직연금제도가 도입되면 퇴직금이 회사 밖에 적립돼 있기 때문에 회사가 망하더라도 떼일 염려가 거의 없게 된다.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노후생활자금으로 써야 할 퇴직금을 중간정산해 집을 사거나 자동차 등을 사는 데 써버리는 경우가 많다. 이러다 보니 근로자들이 노후에 대해 별다른 대책을 준비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퇴직연금제도가 도입되면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중도 인출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노후준비에 대한 시작이 될 것이다.또 퇴직연금제도는 근로자 스스로 투자 대상을 선택할 수 있고 직장을 옮기더라도 개인 퇴직금 계좌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 등이 특징이다. 물론 퇴직금제도나 퇴직일시금신탁, 퇴직보험 등 기존 제도가 없어지지 않고 당분간 공존하기 때문에 당장 큰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선진 외국의 사례로 볼 때 퇴직연금제도로의 발전은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퇴직연금제도는 확정급여형(DB)과 확정기여형(DC)으로 구분된다. DB형은 기업이 직접 근로자의 퇴직금을 투자하는 제도로 적립금의 운용 실적에 따라 기업의 부담이 변동된다. 근로자 입장에서는 지금의 퇴직금처럼 퇴직 급여 수준이 확정된다. 반면 DC형은 기업이 근로자에게 매년 퇴직금을 정산해 지급하고 근로자들이 퇴직금을 투자하도록 돼 있는 방식이다. 근로자는 퇴직금의 운용 실적에 따라 퇴직 급여 수준이 변동된다.그러나 DB나 DC 중 근로자 입장에서 또는 사용자 입장에서 어떤 제도가 더 유리한지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기업의 규모나 문화, 경영방침, 노사관계, 복리후생 등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퇴직연금제도는 어디까지나 근로자의 노후 준비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어떤 방식으로 운용하는 문제는 행복한 노후를 위한 준비가 될 것인가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퇴직연금은 노후 준비에 있어 얼마나 도움이 될까?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국내 근로자의 월평균 임금은 232만 원이다. 일반적으로 남성의 경우 27세쯤 취직해서 55세까지 회사를 다닌다고 가정하면 약 28년간 퇴직연금을 적립하게 된다. 확정기여형의 경우 매년 임금상승률이 5%, 투자수익률이 7%라고 가정할 경우 퇴직 시 2억7000만 원 정도의 퇴직연금이 마련된다. 이 정도 자금으로는 국민연금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노후 생활에 상당히 부족할 수밖에 없다.결국 1년에 1개월치 월급을 퇴직연금에 저축한다고 해서 충분한 노후 생활비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퇴직연금으로 노후 준비가 모두 해결된다고 볼 수 없는 셈이다.다만 퇴직연금제도를 통해 노후 준비를 시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게다가 퇴직연금제도는 연 1회 이상 사업주가 근로자에게 투자 교육을 실시하도록 법으로 의무화돼 있다. 이는 국민 다수가 퇴직연금 제도를 계기로 합리적인 노후 준비 방법을 학습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오래 살수록 공격 투자 유리그렇다면 퇴직연금 운용과 관련해 근로자 입장에서 고려해야 할 것은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자.우선 DB형의 경우 근로자가 받는 퇴직급여는 미리 정해져 있으며 운용은 회사가 직접 한다. 따라서 근로자는 별달리 고민할 필요가 없다.문제는 DC형이다. 근로자 스스로 펀드매니저가 되어 퇴직자금을 운용해야 한다. 퇴직연금의 운용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노후자금 준비라는 본질적인 목표다. 퇴직연금과 함께 국민연금 개인연금 등을 합쳐 기본적인 노후자금 준비가 되도록 운용해야 할 것이다. 결국 퇴직연금 자체만 놓고 볼 게 아니라 전체적인 관점에서 계획과 원칙을 세워야 한다는 얘기다.따라서 우선적으로 전체 노후에 대한 재무설계가 전제돼야 한다. 재무설계를 거창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 재무설계란 개인의 자산과 부채, 소득과 지출을 효율적으로 관리해 개인이 생각하는 재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계획하고 실행해가는 과정을 말한다. 재무설계 전문가(FP)의 도움을 받아 누구나 쉽게 세울 수 있다. 이처럼 구체적인 운용을 하기 전에 전체적인 그림부터 그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개인의 상황에 따라 적합한 퇴직연금 운용 방식이 다를 수 있지만 공통적으로 해당하는 원칙이 있다. 바로 안정성보다는 수익성을 더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워낙 돈이 많은 집안이라 먹고 사는 데 걱정이 없거나 매일 과도한 술과 담배로 오래 살 가능성을 줄이고 있다면야 굳이 수익성을 추구하지 않아도 된다.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안정성보다 수익성에 더 신경 써야 한다. 특히 우리나라 퇴직연금제도는 마치 5대독자 초등학생을 둔 극성 엄마처럼 이것저것 간섭하는 것이 많아서 어떤 상품을 골라도 원금을 까먹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오히려 너무 안정성만 강조하다 보니 과연 충분한 노후자금이 될 수 있을지 걱정이 되는 상황이다.DC형에 대한 ‘간섭 사항’을 구체적으로 보면 첫째, 3가지 이상의 분산 투자 상품을 제공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둘째, 원리금 보장 운용방법이 하나 이상 포함돼야 한다. 즉 투자자가 선택할 수 있는 투자상품 가운데 무슨 일이 있어도 원금을 돌려받을 수 있는 투자상품을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셋째, 주식 및 외국 증권에 대한 투자를 규제하고 있다. 주식 60% 이상에 투자하는 주식형 상품은 투자 대상에서 금지하고 있다. 위험자산 총 한도를 40% 내로 제한하고 외국 유가증권에 대한 직간접 투자는 30% 이내로 하고 있는 것이다. 주식 및 외국 증권에 대한 과도한 투자를 규제해 안전성 확보에 만전을 기한 셈이다.우리가 정말 피해야 할 위험은 투자 위험이 아닌 오래 사는 장수 위험이다. 퇴직연금을 까먹지 않고 안전하게 잘 운용하는 것도 좋지만 오래 살아 노후자금이 부족하게 되면 난처한 상황에 빠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안정성보다는 어떻게 하면 보다 효율적이고 더 높은 수익률로 노후 대비 자산을 마련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낮은 수익률은 인플레이션 위험과도 직결된다. 인플레이션 때문에 은퇴 준비 자금의 실제 가치가 하락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투자수익률은 적어도 인플레이션율보다 높아야 한다. 결국 퇴직연금은 굳이 수익률이 낮은 안전상품을 찾기보다 한층 공격적으로 운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