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강국 ‘꿈’…정부·기업 똘똘 뭉쳐

‘향후 15년 안에 기술자립형 국가로 성장하겠다.’ 올 1월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은 중국의 저명 과학자들을 베이징 인민대회당으로 불러 ‘15년 과학입국 건설’을 선언했다. “국가의 자주적 기술창조(自主創新) 능력을 배양, 15년 안에 기술자립형 산업 시스템을 구축하겠다”는 얘기였다.‘자주창신’ 전략은 올해부터 시작된 11차 5개년 계획의 핵심 사안이기도 하다. 11차 5개년 계획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R&D)투자 2% 이상, 과학기술의 경제성장 기여도 70% 이상 제고, 기술 대외 의존도 30% 이하 축소 등을 규정하고 있다.‘자주창신’이라는 말은 지금 중국의 과학기술 비전을 상징하는 용어로 등장했다. 중국은 지금 정부와 기업이 똘똘 뭉쳐 자주적 기술개발 전략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그 현상을 추적해보자.◇중국 기업의 적극적인 기술 개발=중국 기업은 흔히 저가, 저부가치 제품을 생산하는 것으로 인식돼 왔다. 그러나 각 업체들의 적극적인 기술개발 노력으로 이 같은 인식에 변화가 오고 있다. 많은 업체들이 스스로 기술을 개발하거나 또는 외국 파트너로부터 기술을 전수받으면서 기술로 무장하고 있는 것이다.맥킨지와 칭화(淸華)대학이 최근 기술 분야 3만9000개 중국기업(사영기업) 및 외자기업을 대상으로 공동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작년 중국 기업의 노동생산성(노동자 1인당 연간 매출액 기준)은 42만1000위안(1위안=약 118원)으로 외자기업의 43만9000위안과 큰 차이가 없었다. 지난 2001년 중국 기업의 노동생산성은 22만6000위안으로 외자기업(50만1000위안)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었다. 불과 4년 사이 기술 분야 중국 기업의 생산성이 외자기업을 턱 밑까지 치고 올라온 것이다.맥킨지 베이징사무소의 스테판 알브레크는 “중국 기업과 외자기업의 생산성 축소는 은행 대출 근로조건 등의 분야에서 중국 기업이 외자기업보다 유리한 때문도 있겠지만 더 주요한 요인은 기술 추격”이라며 “중국 사영기업의 약진으로 외자기업의 중국 내 비즈니스가 위협받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 기업=저기술 제품 생산’이라는 도식이 깨지고 있는 것이다.◇급증하는 R&D 투자=중국 국무원은 오는 2020년까지 GDP 대비 R&D 투자를 현재 1.23%에서 2.5%로 늘리겠다는 ‘자주창신’의 청사진을 마련했다. 이 로드맵에 따라 지금 중국 정부와 기업의 R&D 분야 투자가 쏟아지고 있다.중국의 GDP 대비 R&D 투자 비율은 지난해 1.6%로 미국 2.6%,일본 3.2% 등 선진국에 비해 턱없이 낮은 수준이다. 각 기업의 매출액 대비 R&D 투자의 경우에도 중국은 0.7%에 그치는 반면 미국과 일본이 각각 4.0%, 한국 2.5%에 달하고 있다. 중국의 R&D 투자는 경제 규모에 비하면 아직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얘기다.그러나 R&D 투자 성장률을 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월스트리트저널의 지난 10월 2일 보도에 따르면 지난 1년 동안 중국의 R&D 투자 증가율은 17%로 미국 일본 등의 4~5%보다 월등히 높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올해 중국의 R&D 투자액이 1360억 달러에 달해 1300억 달러인 일본을 제치고 미국에 이은 세계 2위가 될 것으로 예상하기도 했다. 더크 필라트 OECD 과학기술국장은 “중국의 R&D 투자가 급속히 증가해 왔지만 일본을 이렇게 빨리 앞선 것은 놀라운 일”이라며 “중국의 연구개발비는 대부분은 기초과학 연구가 아니라 급성장하는 중국 시장의 생산품을 시장 지향형 제품으로 바꾸기 위한 개발 분야에 투입되고 있다”고 지적했다.◇외국 기업의 R&D센터 중국 러시=중국에 진출한 글로벌 기업의 R&D센터는 중국의 자주창신 전략에 탄력을 불어넣고 있는 또 다른 요소다. 중국 기업들이 중국에 설립된 외국 기업의 R&D센터를 통해 자연스럽게 기술을 흡수하고 있기 때문이다.미국의 에어컨 제조업체인 캐리어는 중국 상하이에 5000만 달러를 들여 국제R&D센터를 세운다고 지난 1일 발표했다. 스위스 노바티스 역시 상하이에 1억 달러를 투자해 기술개발센터를 짓기로 했다. 이 같은 글로벌 기업의 중국 R&D센터는 지난 10월말 현재 800개를 웃돈다. 지난 2003년 말보다 두 배 규모다.글로벌 기업의 R&D센터는 중국 내 고급 전문 인력을 양성, 중국 기업의 기술 수준을 업그레이드시키고 있다. 설립한 지 3년만인 작년에 1130만 달러의 순이익을 낸 더신무선통신의 창업자 14명은 모두 모토롤라 R&D센터 출신이다. 상하이벨 기술개발센터가 올 초 다탕그룹과 손잡고 3세대 이동통신 제품을 개발한 것처럼, 글로벌 기업의 R&D센터는 중국 업체와의 현지형 기술개발 과정에서 중국 측에 기술을 흘리고 있다.중국은 국가적 차원에서 R&D센터 유치에 나서고 있다. 중국 정부는 베이징현대차가 2공장을 세울 때 기술개발센터 건립을 조건으로 허가를 내줬을 정도다. 기술개발센터에는 각종 장비 도입은 물론 기술 양도로 발생한 이익에도 면세 혜택이 주어진다.◇중국의 의도 및 대응=중국이 이 같은 ‘과학기술 장기 비전’을 제시한 것은 기존 성장 시스템으로는 선진국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중국 정책 당국자들은 단순 노동력과 자원 투입에 의존한 그동안의 성장 정책이 서방에 대한 기술 종속도를 심화시키고 있는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또 투입의존형 경제성장은 자원낭비, 환경파괴 등으로 이어져 장기적인 성장 잠재력을 약화시키는 것으로 지적돼 왔다.일부 기업들은 기술의 서방 의존에서 탈피하기 위해 ‘로열티 연맹’을 결성하기도 한다. 하이얼 TCL 등 중국의 13개 TV 메이커들은 컬러TV 한 대 당 30달러씩 부과되고 있는 로열티를 줄이기 위해 공동 협상단을 구축한 게 대표적 사례다.중국 과기부 과기촉진발전연구센터의 왕위안춘(王元春) 주임은 “8억 벌 옷을 팔아야 보잉기 겨우 한 대를 사는 게 중국기술의 현실”이라며 “산업을 고부가가치형 구조로 바꾸자는 게 기술자립형 국가 추진의 핵심”이라고 말했다.돋보기 자주창신전략의 파괴력한국의 대중국 무역흑자 위협중국의 ‘자주창신’ 전략은 우리나라에 직격탄을 날릴 요소다. 중국이 자주적으로 개발한 기술로 무장하게 되면서 그동안 우리나라에 수입해 갔던 기술제품을 더 이상 수입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나라의 대(對)중국 무역흑자 기조를 위협하는 요소이기도 하다.그동안 우리나라가 중국에 대해 무역흑자를 기록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대 중국 전체 수출의 약 80%에 해당하는 중간재(부품 및 반제품)에 있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은 주요 부품을 한국에서 수입, 이를 가공 조립해 중국이나 한국 또는 제3국에 수출해 왔다. 이는 기술력이 낮은 중국 부품으로는 좋은 제품을 보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중국이 하이테크 산업의 대대적인 육성을 통해 핵심부품 분야에서도 국제 경쟁력을 확보하면서 중국 투자 한국 기업들이 부품을 중국에서 자체 조달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무역협회의 최근 자료에 따르면 중국 진출 기업의 중간재 조달에서 한국 수입이 차지하는 비율은 지난 1999년 44.8%에 달했으나 지금은 35% 선으로 떨어졌다. 대신 중국 기업으로부터의 조달 비율은 34.8%에서 50% 선으로 높아졌다. 중국의 고기술 제품은 한·중 중간재 무역뿐만 아니라 전 세계 시장에서도 한국을 위협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1995년 한국과 중국의 중간재 분야 세계 시장점유율은 각각 3.4%, 2.3%로 한국이 높았으나 지금은 한국 3%, 중국 5% 선으로 역전된 상황이다. 한국은 현재 자동차 반도체 통신설비 등 일부 산업 중간재에서 다소 우위를 차지하고 있을 뿐 나머지 분야에서는 중국에 밀리는 것으로 나타났다.게다가 중국이 철강 화학 등 중공업 분야 설비 투자를 늘리면서 한국의 설비 산업도 위협하고 있다. 기계 설비 등을 포함하는 자본재의 경우 지난 1995년 한국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중국보다 1.5%포인트 정도 높았으나 지금은 중국이 오히려 5.5%포인트 높아진 실정이다.양평섭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연구위원은 “중간재 분야에서 중국에 뒤지면 대중국 무역흑자 기조가 무너질 수 있다”며 “핵심 부품산업 경쟁력 확보를 위한 정책적 지원이 절실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