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로 승부 거는 케이블TV 선단의 사령관

영업 3개월차의 CJ 제약부문 신입사원 강석희씨는 어느 날 저녁 오기가 발동했다. 실망과 좌절, 자학이 쌓이고 쌓이자 오기가 됐다. 전임자에게 인계받은 거래처의 실적이 점점 떨어지더니 급기야 3분의 1로 줄어들었기 때문이다.“H와 정면승부해도 이야기가 안 통한다면, 제가 영업을 그만둬야겠다. 나는 아마도 영업이 적성에 맞지 않는가 보다.”그는 이렇게 마음을 다잡고 C병원의 전문의 H에게 전화를 걸었다. 시간을 좀 내달라고 하니 영락없이 “바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끊어지려는 전화선을 간신히 잡고 말했다. “저녁때라도 좋으니 시간 좀 내주세요.” 상대는 ‘그 사람 참 질기네’라듯 “그럼 한 번 보자”고 툭 한마디 던진다. 약속한 날 강씨는 책 한 권을 사서 옆구리에 끼고 병원 앞에서 기다리고 서 있다가 퇴근하는 H를 잡고 포장마차로 향했다. 자리를 잡은 그는 소주 한 잔을 기울이며 대뜸 말했다.“선생님, 인생을 그렇게 살지 마세요.”H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을 보면서 그는 그동안 마음에 쌓아두었던 말들을 쏟아냈다.“지난 3개월 동안 정말 성심성의를 다해 왔는데, 경쟁사 영업사원에게만 물량을 밀어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제약업체 영업으로 잔뼈 굵어말은 한 번 내뱉자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영업맨이라기보다 한 사람의 신입사원으로서 하는 말이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H는 별다른 대꾸도 없었다. 서너 마디 하더니 그만 자리에서 슬쩍 일어섰다. 다음날 아침 강씨에게 H가 아닌 다른 의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당신네 회사의 약을 좀 사야겠으니 카탈로그를 보내라”는 것이었다. H가 “CJ 제약사 강석희 사원을 좀 도와줘야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강씨는 너무 기뻐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나중에 들으니 H는 특별히 강씨에게 감정이 있는 게 아니었다. H는 단지 바빴고, 강씨가 신입사원이라 별로 말도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여러 번 찾아왔어도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강씨는 이 일을 계기로 “이길 수 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지금 CJ미디어를 진두지휘하고 있는 강석희 사장(50)의 사회 초년병 시절은 이렇게 혹독하게 지나갔다. 그러나 그 시절이 자신을 단단하게 만들었고, 오히려 영업에 재미를 느끼게 했다고 술회한다.그런데 제약사 영업과 방송사 경영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CJ미디어는 CJ그룹의 미디어사업분야를 총괄하는 방송채널사용사업자(PP)다. 95년 음악채널 ‘엠넷’을 시작으로 PP사업에 뛰어들었다. 영화채널 ‘CJ CGV’, 스포츠채널 ‘Xports’, 영화오락전문채널 ‘XTM’, 푸드&라이프스타일채널 ‘올리브 네트워크’, 애니메이션채널 ‘챔프’ 등 CJ미디어의 채널은 9개에 이른다.“방송사업은 제약사 영업과 완전히 다른 영역이 아니냐고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본질이 너무나 비슷해서 깜짝 놀랄 정도죠.”강 사장은 “제약사 출신인데 방송사를 경영하게 된 이력이 특이하다”는 말에 손을 내젓는다. 방송업계 PP(프로그램 프로바이더) 사장이 하는 일이 제약사 영업과 크게 다를 바 없더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인적 판매로 귀결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강 사장은 CJ계열의 제약사에서 16년간 일하다가 2004년 4월 CJ미디어 영업본부장을 맡았다. 그리고 이듬해 1월 사장으로 승진했다. 당시 CJ미디어는 유선방송사업자(SO)로 채널을 팔러다녀야 했다. CJ미디어는 후발주자였고, 모회사인 CJ는 방송업계 경험도 없어서 난감한 처지였다.하지만 영업으로 잔뼈가 굵어온 강 사장으로는 SO 영업이 그다지 낯설지 않았다. “거래 고객이 병원이나 의사에서 SO사업자로 달라졌을 뿐”이라고 그는 말한다. SO업계의 큰손인 티브로드, C&M 등은 의약계의 큰손 서울대병원, 세브란스병원 등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영업맨 출신 사장을 둔 덕분인지 CJ미디어는 그가 부임한 2005년 처음으로 흑자전환했다. 지난해 CJ미디어의 매출은 876억원, 당기순이익은 26억원을 기록했다. 강 사장은 올 들어 새로운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원천 콘텐츠의 확보를 위해 자체 제작 프로그램 비중을 늘리는 일이다. 그동안 대부분의 PP들은 지상파 프로그램과 해외수급물에 의존해 왔다. 그러나 외부 프로그램은 아무리 높은 시청률을 올린다 해도 결국 계약기간이 끝나면 더 이상 활용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자체적으로 높은 수준의 원천 콘텐츠를 제작, 확보 필요성은 지난해부터 케이블산업에서 가장 큰 화두로 떠올랐다.CJ미디어가 지난 10월 개국한 종합오락채널 ‘tvN’(total variety Network)은 이런 배경에서 탄생됐다. tvN은 드라마, 영화, 오락 등에 포커스를 맞춘 채널이다. tvN은 개국 초기임에도 자체 제작 프로그램 비율 46.5%라는 높은 수치로 업계를 놀라게 했다. 케이블 가입 1,070만가구 이상을 시청자로 확보했고, 시청률 또한 케이블 시청률 순위 평균 14~16위를 기록하고 있다.tvN은 케이블TV와 위성방송에 시청자 유입이 가장 많아지는 평일 밤 11시 시간대를 ‘파워11’으로 정하고 주요 자체 제작 콘텐츠와 최신 영화들을 본격적으로 편성하는 등 공격적 행보를 보이고 있다.지난 11월부터 케이블TV 최초 HD 16부작 미니시리즈 <하이에나>를 방영 중이다. <하이에나>는 네 남자의 사랑방식을 코믹하고도 유쾌하고 때로는 섬세한 터치로 묘사하면서 시청률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윤다훈, 김민종, 소이현, 오만석 등 스타급 출연배우와 맛깔나는 스토리 전개, 명대사·명장면 등은 숱한 화제를 뿌리며 시청자들로부터 호평을 얻었다.국내 재즈밴드 클래지콰이의 보컬 호란이 진행하는 <리얼스토리 묘>는 독특한 소재와 톡톡 튀는 진행으로 마니아층까지 형성됐을 정도다. 일요일 밤에 방영되는 이 프로그램은 연예와 영화계 소식, 한 주간의 관심사, 실생활에서 일어나는 기상천외한 에피소드를 생생한 현장취재를 통해 공개한다.그는 “채널 라인업이 웬만큼 갖춰진 만큼 이제는 각 채널이 각각의 장르에서 모두 1위를 한다는 목표로 뛸 계획”이라고 말했다. 기업은 해당업종에서 1등을 하지 못하면 퇴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연간 800억원대 매출을 올리는 CJ미디어의 사장이 된 지금도 그는 신입사원 시절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는다. “하루에 한 번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면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그때는 생각했습니다.” 젊은 시절 그에게 영업이란 편치 않은 직업이었고 고민을 많이 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제약사 근무 시절 “공중전화박스에 가방을 내려놓고 회사에 전화해서 ‘가방은 어디어디 공중전화박스 안에 있으니 찾아가시오. 나는 그만 둘테요”라고 말하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털어놓았다.하지만 뒤집어보면 영업의 묘미는 오히려 단순명쾌함에 있다. 실적이 계량화돼 나오기 때문이다. 강 사장은 “각종 인간관계와 얼마간의 정치행위도 필요한 부서보다 실적을 가늠할 수 있는 영업이 더 적성에 맞는다”고 말한다.‘2006년은 싸우는 해, 2007년은 이기는 해’라고 말하는 그가 방송판에서 어떤 수를 보여줄지 CJ미디어의 향후 행보에 국내 케이블방송업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약력:1956년 제주 출생. 75년 제주제일고 졸업. 80년 제주대 졸업. 88년 제일제당(현 CJ주식회사) 입사. 2002년 CJ(주) 제약사업본부 마케팅팀장 상무. 2004년 CJ미디어 영업본부장. 2005년 1월 CJ미디어 대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