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호두과자는 지천에 널린 군것질거리다. 고속도로 휴게소마다 없으면 섭섭한 주 메뉴고, 간선도로가 막히면 어디선가 어김없이 나타난다. 어디서 살 수 있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않지만 어디서건 누구나 살 수 있는 간식이다.하지만 30년 전은 아니었다. 호두과자는 오직 ‘천안’ 호두과자였다. 존재의 증명처럼 박혀 있는 호두, 팥앙금과 이를 싸고 있는 육질이 요즘의 길거리표와는 격이 달랐다. 한 번 먹어본 후에는 출장 가신 아버지보다 손에 들려 있을 호두과자를 더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는 한 번도 호두과자를 기다리던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셨다. 바쁜 와중에 호두과자를 챙기려면 꽤나 번잡스러웠을 텐데 언제나 서류뭉치와 함께 과자박스를 풀어놓으셨다.사랑을 이야기하려면 늘 어릴 적 이 추억이 떠오른다. 희망을 배반하지 않는 것. 설렘을 무시하지 않는 것. 그것이 사랑 아닐까. 매번 즐겁게 먹어대는 아들 녀석의 기다림을 아버지는 ‘비토’하지 않으셨다. 비록 다정한 말씀은 많지 않으셨지만 그게 내가 느끼는 아버지의 사랑이었고 지금도 실망을 예견하면서 호두과자를 한 번씩 먹어보는 연유다.기러기가 사람을 수식하지 않고 오로지 조류였던 70년대 후반부터 아버지는 대부분의 시간을 가족과 떨어져 지냈다. 한국경제 중흥의 시절 중견 회사원으로 활약하셨던 것이다. 시대와 화합하며 열심히 일하신 덕에 나는 편안히 공부했고 우리 가족은 가족사진을 한 장도 남기지 못했다. 가족은 핏줄만 아니라 시간도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내가 기억하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가족나들이는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그것도 아버지가 다니시던 공장의 전체 가족 소풍이었다. 울산의 어느 산에서 보낸 그 하루를 색 바랜 사진이 증명하고 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사진이라는 물증이 남아 있기 때문일까. 그날은 무척 유쾌했다고 기억한다.물론 우리 가족만 그런 건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70~80년대 우리의 아버지들은 열심히 일하셨고, 가족생활은 초라했지만 나라는 번영했다. 때문에 나의 아버지도 함께 만들었던 즐거운 기억 속에는 등장하지 않고 그리운 모습으로만 남아 있다. 같이 나누었던 구체적인 일없이 사람을 추억하는 것은 참 허전하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당신이 걸었던 길을 걸어보고 불렀던 노래를 불러보는 일이다. 그래서 새벽의 올림픽대로는 쓸쓸하다.아버지가 일주일에 한 번 이상은 꼭 가셨던 길이다. 아버지가 재직하셨고 나 또한 다니고 있는 폴리플러스는 소재지가 여수다. 첫 비행기 시간은 오전 7시였다(현재는 7시30분). 여름을 제외하고 공항으로 가는 도로는 여전히 어둡다. 2년 반 전부터 같은 시간, 같은 길을 내가 다니기 시작했다. 그 새벽 어스름 속에서 그저 가늠해 볼 뿐이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우리 집 거실에는 두 폭 대련(對聯)이 걸려 있다. 행서로 쓰여진 한자는 알아보긴 힘들어도 잘 썼다는 것은 느낄 수 있다.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는지 기억이 없으나 글의 내용을 안 것은 2년 반 전 겨울 막바지였다.2월 어느 날 식탁에 앉아 있다가 바라본 액자 속의 몇 글자가 전과 달리 확연히 다가왔고 순간 전체 대련의 뜻을 풀었다. 옆에 계시던 아버지는 제법인데 하는 표정이셨고 나는 나름대로 뿌듯했다(불혹을 넘어도 부모의 칭찬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 난데없는 뜻풀이가 사신(死神)을 부르는 주문이었나 보다. 그해 봄바람이 일찍 불었고 벚꽃이 피고 지는 가운데 당신은 영영 못 오실 길을 가셨다. 아직도 벽에 걸려 있는 한자 구절은 이러하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리지 않는다.)글/ 정상진·폴리플러스 대표1965년 경남 진주 출생. 90년 서울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했으며 코오롱에서 근무하다 92년 부친이 창업한 플라스틱 소재 전문업체 폴리플러스에 입사해 밑바닥부터 경영수업을 받았다. 2004년 대표이사에 올랐으며, 올 초 바이오벤처를 인수해 사업다각화에 나서기도 했다. 태껸의 고수이며 여수 본사에 부친이 쓰던 집무실을 아직도 보존해 놓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