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기업들은 배가 부른데 국가경제는 활기가 없고 실업자는 줄지도 않고….’최근 독일경제를 한마디로 정의한 것이다. 영국의 경제잡지 <이코노미스트>는 최근호에서 “독일은 수출이 다시 크게 늘고 있지만 이것이 국가경제 발전과는 따로 놀고 있다”며 “‘수출증가=경제발전’이라는 공식이 최근 독일에는 적용되지 않고 있다”고 보도했다.노이만(Neumann)이라는 브랜드의 독일제 마이크는 엘비스 프레슬리, 프랭크 시나트라, 데이비드 보위, 셀린 디옹 등 한 시대를 풍미한 유명가수들이 애용하던 제품으로 지금도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명품’으로 꼽힌다.노이만은 한때 유명했다가 한동안 수요가 줄어 어려움을 겪었으나 최근 다시 전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독일의 대표적 브랜드 중 하나다. 독일에는 이 같은 브랜드가 다수 있으며 이들 대부분이 내수보다 수출에 주력하는 업체들이다. 이들 업체는 최근 들어 독일 수출이 급증하는 데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이 같은 현상은 ‘유럽경제의 기관차’ 노릇을 자임하고 있는 독일의 입장에서는 좋은 이야기다.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즐거운 소식만은 아니다.수출은 늘고 있지만 내수경기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어 실업률이 줄지 않고 결과적으로 독일경제에 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수출증가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내수로 이어지지 않는 까닭은 아이로니컬하게도 독일 수출기업들이 갖고 있는 높은 경쟁력 때문이다. 소위 ‘메이드 인 저머니’(Made in Germany)는 종종 제품의 질과 정교성을 추구하는 소수정예의 기술자들의 작품인 경우가 많다.노이만 마이크만 해도 마이크 안에 내장된 소리를 전기신호로 바꾸는 변환장치는 22년이나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내구성이 뛰어나다. 이는 록밴드의 엄청난 사운드에도 견딜 수 있게 설계돼 있다. 노이만이 만드는 마이크 중에는 개당 가격이 6,450달러를 넘는 것도 있다. 이 업체는 140만유로를 투입해 디지털마이크도 개발하고 있으며, 디지털마이크는 영화 <반지의 제왕> 사운드트랙 녹음에 쓰이기도 했다.전직 마인츠대학 교수인 헤르만 사이먼은 이 같은 업체들을 독일의 ‘숨겨진 챔피언’이라며 독일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훌륭한 수출기업이 500개 이상 있다고 추산한다. 이들 기업의 상당수는 규모가 작고 아직도 가족경영을 하고 있으나 글로벌 마켓에서 틈새시장을 공략했고 혁신을 위한 투자를 지속, 품질에 신경을 쓴 결과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또 다른 챔피언은 베흐슈타인(Bechstein)이라는 피아노 생산업체다. 이 회사는 그랜드피아노 한 대를 만드는 데 500시간을 들여 최고 품질의 피아노를 만들어낸다. 이 회사의 최대주주이자 피아노 기술자인 클라우스 슐츠는 “우리는 악기에 혼을 담는다”고 말한다. 실제 이 업체는 피아노를 만드는 장인들의 작업환경을 까다롭게 고르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고급 피아노의 경우 주변의 소음이 거의 없는 독일 내 특정 공장에서만 만든다. 피아노 애호가들은 이 업체의 피아노가 미국의 스타인웨이, 일본의 야마하에 비해 더 부드럽고 치밀한 음색을 지녔다고 평가한다.이 같은 소위 독일의 ‘숨겨진 챔피언’들이 탄생한 배경은 이렇다. 독일기업들은 높은 노동비용과 세금 때문에 가격경쟁력을 뛰어넘을 수 있는 높은 수준의 품질을 유지해야만 했다. 가격은 비싸더라도 고도의 기술로 안정성과 내구성이 뛰어난 제품을 생산해 전세계에 톱클래스 제품이라는 인식을 심어왔다. 그런데 이 같은 형태의 비즈니스는 해당 기업의 경쟁력을 높일지는 모르지만 다른 기업들이 유사한 업종에 쉽사리 진입하기 어렵게 만든다. 다시 말해 전후방효과 등 산업 전반에 걸친 파급효과를 거의 기대할 수가 없다. 결과적으로 해당 기업은 경쟁력 있는 고급제품을 만들지만 그에 따른 신규 일자리는 거의 생기지 않는 것이다.반면 단순한 제품으로 대표되는 소비재의 경우 누구나 시장에 참가하는 것이 자유롭고 따라서 전후방 파급효과 또한 매우 큰 것이 일반적이다.다임러크라이슬러, 폭스바겐, 바스프, 바이에르, 지멘스 등은 여전히 막강한 독일기업들이지만 자기 분야에만 고립돼 독일경제를 이끌어나갈 이니셔티브가 부족하다. 이들 기업은 그나마 아시아의 젊고 활력이 넘치는 기업들로부터 도전을 받고 있다.게다가 독일의 중소기업 오너들은 자신들의 기업 소유권을 남에게 양도하거나 기업의 주된 업종을 바꾸기를 꺼린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제품의 질 향상을 위해서는 노력하지만 새로운 분야에는 도전하려 들지 않는다.결과적으로 독일은 ‘신생 스타기업’이 거의 없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사실 독일에서 기업을 시작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창업절차가 너무 복잡한데다 경직된 노동시장에서 신규고용이나 해고는 말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다.신생기업수가 적다 보니 잘나가는 수출기업들은 점점 더 수입부품의 사용비중을 늘리고 아웃소싱 비율도 높이고 있다. 노동시장의 경직성과 고임금으로 독일기업들은 노동집약적 산업의 대부분을 해외로 돌리고 자본집약적 산업만 국내에 둔다. 실제 독일 수출상품에 들어가는 수입부품 비율은 95년 30%에서 2002년에는 39%로 높아졌다.독일의 유명 연구소인 이포(Ifo)의 한스 베르네르 신 소장은 “기업이 생산원가가 낮은 곳에 공장을 짓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이 같은 움직임이 독일경제를 위해서는 최선이라 볼 수 없다”고 말한다. 그는 독일의 노동시장이 좀더 유연해져야 수출업체는 물론 내수기업들도 살아날 수 있다고 분석한다.독일 실업자의 상당수는 장기실업 상태로 실업자의 40% 이상이 1년 이상 구직활동을 하고 있다. 실업자 중 27%는 아무런 자격증이 없으며 4분의 1 가량은 50세 이상의 고령자다.지금까지 독일 정부의 실업대책은 거의 먹히지 않았다. 더욱 큰 문제는 독일을 대표하는 수출기업들이 실업이나 내수부진을 자신의 문제로 보지 않는다는 데 있다.최근 독일의 컨티넨털 타이어는 오는 2007년 독일 내 한 공장을 폐쇄할 계획이라며 이에 따라 320명의 근로자가 일자리를 잃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 회사의 최고경영자는 “우리에게는 독일 내 근로자도 중요하지만 전세계 8만명의 근로자가 더 중요하다”고 공공연히 말했다.그럼 과연 독일의 대기업들과 수출기업들이 독일경제를 살릴 수 있을까.최근 들어 정보통신기업들이 부쩍 크고 있지만 독일경제에서 자동차, 화학, 기계공학, 전자공학 등 전통적인 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크며 독일경제의 미래 역시 이들 산업의 건전성 여부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자동차산업을 비롯, 이들 산업이 원가절감과 아웃소싱, 기술개발에 나선다 해도 이것이 독일경제의 성장엔진으로 살아남는다는 보장은 없다.따라서 전문가들은 독일의 수출기업들이 내수를 부양하고, 결과적으로 실업률도 끌어내릴 수 있도록 정책적인 뒷받침이 마련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영국은 지난 80년대 중반 독일과 마찬가지로 실업률이 높았으나 서비스산업 육성을 통해 점진적으로나마 해결했다. 독일에서도 이 같은 정책이 요구되고 있으나 아직 어떤 정책을 취할지 독일 정부는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대학 등의 교육과정을 개선, 기초교육의 질을 높임으로써 비숙련 근로자의 양산을 막는 것도 실업률을 낮출 수 있는 한가지 방안으로 제시되고 있다.이포의 신 소장은 “독일이 노동집약산업의 완전한 공동화를 막기 위해서는 독일경제가 진로를 바꾸어야 한다”며 “어마어마한 무역흑자는 오히려 독일경제에는 해롭다”고 지적한다. 국내시장과 소비재시장은 외면하고 중간재에만 집중하는 업체 역시 기회를 놓쳐버리고 있다고 그는 경고한다.신 소장은 푸마, 아디다스 같은 독일 스포츠용품업체들의 성공사례는 독일기업도 글로벌 소비재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좋은 사례라며 독일경제를 위해서는 이 같은 기업이 더욱 많이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김선태·한국경제 국제부 기자 k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