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개 미용실 프랜차이즈… 지구촌 곳곳에 사업 확장

약력 : 1957년생. 87년 이철 헤어커커 압구정점 오픈. 96년 이철 크리에이티브 뷰티 아카데미 오픈. 96년 (주)헤어커커 설립 대표이사 사장(현). 98년 세종대 사회교육원 헤어디자인과 겸임교수. 99년 경북 외국어테크노대 헤어코디메이크업과 겸임교수. 2002년 제1회 서울-도쿄 헤어컬렉션 진행.이철 헤어커커 사장(49)은 사내에서 ‘대장님’으로 불린다. 그의 공식 직함은 (주)헤어커커의 대표이사 사장이다. 헤어커커는 전국에 86개의 미용실 프랜차이즈를 거느린 초대형 뷰티기업. 따지고 보면 각 지역 프랜차이즈 가맹점주들도 모두 사장이고, 그도 사장이다. 이런 이유로 차별화를 위해 ‘대장님’이라는 애칭이 붙었다. 물론 청중을 압도하는 남다른 카리스마 덕도 있다.“(주)헤어커커를 설립한 것은 10년 전인 96년이었습니다. 그후 본격적으로 프랜차이즈사업에 뛰어들어 현재 2개의 브랜드, 1개의 자회사를 꾸려가고 있어요.”고가의 미용실브랜드인 ‘이철 헤어커커’는 전국 63개점, 지난해 시작한 중저가 세컨드 브랜드인 ‘프레시헤어’는 23개점에 이른다. 또 미용전문제품 생산과 유통을 맡은 자회사 ‘모리컴퍼니’도 최근 설립했다. (주)헤어커커가 지난해 올린 매출액은 약 80억원이었다.뷰티업계의 비즈니스맨으로 자리잡은 이사장이 가위를 잡은 것은 약관 20살 때였다. 어릴 적부터 뷰티와 패션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던 그는 서울 명동에 있는 한 미용실에 취직했다. 20대 시절 그는 ‘꿈’ 많고 ‘끼’ 많은 청년이었다.“미용실에서 1년간 일하다가 20대 초반에 명동성당 근방에 제 미용실을 차렸어요. 기존에 있던 미용실을 인수해 운영했는데, 나이도 어리고 실력도 충분히 쌓지 않은 상태였기에 1년 만에 접었습니다.”다양한 분야에 눈을 돌렸던 이사장은 그뒤 사진도 찍으러 다니고 잡지의 화보모델로도 활동했다. 70년대 후반, 80년대 초반 당시에는 흔치 않던 패션운동화를 판매하는 회사 창업도 구상했다. 하지만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천직인 헤어디자이너로 되돌아왔다.“헤어디자이너인 아내를 만났어요. 죽이 잘 맞는 아내와 함께 86년 명동에 우리 부부가 운영하는 미용실을 차렸죠. 1년간 경영해 보니 주변 지역의 주차난이 심각하고 경쟁업소도 지나치게 많았어요. 결국 압구정동으로 옮기기로 결정했습니다.”권리금 3,000만원은 포기하고 보증금만 받았을 정도로 과감한 결단이었다. 당시 그의 선택은 지금의 이사장을 만들었다. 압구정동으로 옮긴 다음부터 폭발적인 성장세를 이어나갔다.잡지모델로도 잠시 활동했던 것처럼 그는 요즘 말로 이른바 ‘꽃미남’ 미용사, ‘메트로섹슈얼’ 사장이었다. 물론 실력도 뛰어났다. 또 패션 트렌드 읽기를 중시하던 그는 헤어에도 늘 새로운 기법을 도입했다. 한 사람의 머리를 10분이면 마무리할 정도로 속도도 빨랐다.“‘빨라서 좋다’는 고객부터 ‘스타일링이 마음에 든다’는 손님까지, 입소문을 타고 순식간에 고객을 확보하게 됐습니다. 연예인뿐만 아니라 정치인, 기업인과 같은 VIP고객도 많이 찾아왔습니다.”전직 대통령과 재벌가 가족도 그를 찾아 단골고객이 됐다. 그에게는 여느 헤어디자이너와는 다른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패션 트렌드에 민감하다 보니 고객이 입은 옷, 가방이 어느 브랜드인지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출시된 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구입하셨네요’라고 말하며 고객에게 관심을 갖고 대화를 이끌어 나갔습니다.”이렇게 고객의 세세한 부분에도 신경을 쓰다 보니 재방문하는 고객이 늘어갔다. 고객의 작은 부분에 대해서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건넸다.또 그는 모든 고객을 치우침 없이 대했다. 가령 늘 바쁜 연예인 고객이 먼저 온 손님에 앞서 헤어커트를 원한다 해도 정중히 거절했다. 모든 고객은 새치기 없이 오는 순서대로 받았다. 연예인 고객보다 일반 고객을 선택한 셈이었다. 결과적으로 더 많은 고객이 몰리게 됐다. 사업확장의 계기가 된 것이다.“처음 압구정점 문을 열었을 당시보다 고객이 두 배로 늘었습니다. 매장도 70평에서 180평으로 확장했어요. 하지만 여전히 고객이 넘쳐서 중대결정을 내리게 됐습니다. 바로 프랜차이즈 체제를 도입하기로 한 거죠.”96년 (주)헤어커커를 설립한 뒤 10년 만에 전국 86개의 미용실 프랜차이즈를 거느리게 됐다. 압구정점에서 만난 단골고객들은 프랜차이즈사업을 할 때 큰 도움이 됐다. 이사장이 고객에게 성심성의껏 대했던 것처럼, 고객들은 비즈니스와 경영에 대해 아낌없는 조언을 해줬다.프랜차이즈 체제로 바꾸면서 교육에도 뛰어들었다. 각 지역에 위치한 프랜차이즈마다 헤어기술의 품질을 고르게 유지하기 위해서다. (주)헤어커커를 설립한 직후인 96년 교육을 위해 ‘이철 크리에이티브 뷰티 아카데미’를 열었다.이뿐 아니다. 전국 미용실의 음악과 인테리어에도 일종의 매뉴얼을 도입했다. 음악은 이사장이 직접 선곡해 월요일용부터 일요일용까지 CD로 만들어 가맹 미용실에 보냈다. 또 매장 인테리어에도 통일된 컨셉을 입히기 위해 꽃꽂이 매뉴얼을 만들었다. 꽃꽂이 역시 이사장이 손수 한다. 꽃꽂이를 전문적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인테리어에도 취미가 있다 보니 꽃꽂이를 자연스럽게 하게 됐다. 꽃꽂이에서도 상당한 소질이 발견돼 주변을 놀라게 했다.“월요일 아침에 양재동 꽃시장에서 전국 매장을 꾸밀 분량의 꽃을 골라옵니다. 제가 압구정 본점 꽃꽂이를 한 뒤 사진을 찍어서 홈페이지에 올립니다. 꽃은 직접 각 매장에 보냅니다. 전국 매장에서 사진 매뉴얼을 보고 똑같이 따라하도록 만들었죠.”이사장은 미용계의 위상 높이기에도 앞장섰다. 99년 미스코리아선발대회 본선 심사위원으로 임명됐던 것. 미용계 최초의 일이었다.“그때까지만 해도 헤어디자이너의 위상이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 헤어디자이너는 미스코리아 심사위원으로 뽑힌 적이 없었죠. 결국 심사위원으로 발탁돼 소개문구가 나갔는데 헤어커커 사장 대신 당시 강의를 하던 세종대 사회교육원 헤어디자인과 겸임교수로 나가더군요.”씁쓸한 마음도 들었지만, 그후에도 미용계의 입지 굳히기에 더욱더 힘썼다. 헤어쇼를 할 때도 혁신을 꾀해 예술과 접목시켰다. 일반적인 헤어쇼는 헤어디자이너들이 모델의 헤어를 스타일링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반면 그는 기존에 볼 수 없던 방식을 택해 나가기 시작했다. 99년에는 스쿠버다이빙을 배웠던 경험을 살려 물속에서 헤어커트를 하는 ‘수중 커트’를 선보였다. 또 2003년에는 헤어를 소재로 한 사진전을 갤러리에서 열었다.“각계각층 100인의 헤어를 디자인한 뒤에 사진작가 김중만씨가 이들의 사진을 찍도록 기획했습니다. 처음에는 미용실이 연 갤러리 사진전이 웬 말이냐는 반응도 있었지만 결국 호응을 얻었습니다.”지난해에는 또 다른 시도를 했다. 미술관을 개조해서 만든 청담동 헤어커커 본사에 사람 신체를 토대로 삼은 오브제를 만들어 전시했다. 물론 이사장의 헤어스타일링이 곁든 오브제다. ‘아우라’(AURA)라는 이름을 단 전시회에는 고객과 예술인 3,000여명이 찾아 대성황을 이뤘다.비즈니스 확장도 한 단계씩 실행해 나가고 있다. 고가 브랜드인 이철헤어커커는 100호점까지, 중저가 브랜드인 프레시헤어는 200~300호점까지 늘릴 계획이다.직원의 재교육에도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 교육아카데미로는 압구정스튜디오, 청담스튜디오, 미사스튜디오 3곳을 갖추고 있다. 미사스튜디오는 지난해 경기도 미사리에 연 700평 규모의 대형 교육장이다.“미사스튜디오는 500명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시청각 강의실 3개, 기술강의실 2개, 간단한 파티와 휴식공간인 메인룸을 갖췄죠. 또 대규모 강연이나 쇼를 할 수 있는 쇼룸, 장기 교육에 대비한 숙박시설까지 마련했습니다.”해외로 뻗어나가기 위한 준비도 한창이다. 이미 영국 런던에 영국 1호점을 열었다. 고객의 60~70%가 영국 현지인이다. 또 올해는 미국 LA에 지점을 연다. 중국에는 오는 6월 베이징에 아카데미를 열어 교육사업으로 진출한다.“생산과 유통도 강화하려고 합니다. 미용전문제품 생산과 유통을 위해 최근 설립한 모리컴퍼니에 힘을 실어야죠. 미용기구뿐 아니라 샴푸와 보디클린저 생산을 할 겁니다.”이렇듯 그의 머리 속은 아이디어로 가득하다. 해외 헤어쇼 참가를 위해 외국출장을 가도 헤어뿐 아니라 패션매장, 호텔 인테리어, 새로 생긴 레스토랑을 늘 유심히 본다. 트렌드를 포착해 비즈니스에 녹여내기 위해서다.“이철 헤어커커보다도 고가인 브랜드를 2~3년 내로 1개 더 시작하려고 해요. 다양한 소비자의 니즈를 만족시키려는 전략도 있고, 기존 미용실과 또 다른 차별화를 꾀하려는 의미도 있죠.” 30년의 헤어디자이너 경험을 사업으로 술술 풀어놓는 이사장은 “헤어커커를 ‘토털 뷰티기업’으로 만드는 날까지 안주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