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력 : 1944년생. 63년 경기상고 졸업. 67년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94년 서강대 경영대학원 최고금융인과정 수료. 67년 한국외환은행 입행. 77년 홍콩지점 과장. 86~91년 동광동지점, 중곡동지점, 반포지점 지점장. 98년 강동본부 본부장. 99년 신탁부담당 상무이사. 2000년 부행장. 은행장 직무대행. 2001년 나이넥스 회장. 하이닉스반도체 사외이사. 2002년 하이닉스반도체 대표이사 사장(현)지난 7월12일 한국 기업사에 길이 남을 부활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한국 반도체산업의 간판기업이자 풍운의 기업인 하이닉스반도체(이하 하이닉스)가 바닥없는 나락에서 힘차게 솟아오른 날이었다. 3년 9개월간 이어지던 채권금융기관의 공동관리에서 벗어난 것이다. 당초 2006년 12월31일로 예정됐던 워크아웃 시점을 무려 1년 6개월이나 앞당겼다. 모든 사람이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던 하이닉스의 부활이 공인받는 순간이었다.2005년 현재 워크아웃이 결정된 2001년 당시의 남루하고 위태로웠던 성적은 흔적조차 없다. 10조원이 넘는 부채, 5조원에 육박하는 적자는 업계 최고의 영업이익률, 9분기 연속 흑자, 6조원대의 매출액, 연간 순이익 1조원 돌파 등 화려한 실적으로 변신해 있었다. 2,000원대에 불과하던 주가는 지난 12월14일 종가 기준으로 2만7,450원으로 10배 이상 치솟았다. 1조원을 겨우 넘던 시가총액은 12조2,100억원으로 12배 가량 불어났다.지난 3분기 실적만 보더라도 하이닉스의 경영지표는 한국의 대표기업으로 불리는 데 전혀 손색이 없다. 매출액 1조5,990억원, 영업이익 4,950억원, 순이익 5,290억원을 기록했다. 이는 전 분기에 비해 매출액은 26%, 영업이익은 86%, 순이익은 123% 증가한 수치다. 덩치뿐만 아니라 수익성 면에서도 최고 수준임을 확인할 수 있다. 세계적인 IT시장조사업체인 가트너는 하이닉스가 올해 처음으로 세계 반도체업계 순위 10위권 진입이 유력하다며 ‘떠오르는 별’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하이닉스의 부활은 전세계 반도체업계에 뜨거운 관심을 모으고 있다.하이닉스 부활 드라마의 주연배우로는 단연 우의제 사장을 꼽을 수 있다. 우사장이 하이닉스와 연을 맺은 것은 하이닉스가 워크아웃에 들어갈 당시인 2001년 사외이사로 영입되면서부터다. 우사장은 이듬해인 2002년에 가족을 비롯해 누구나 말렸던 하이닉스의 대표이사로 취임했고, 이때부터 부활의 드라마가 시작됐다.구원투수로 나서긴 했지만 우사장이 하이닉스를 부활시키리라 예견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정통 은행원 출신인 그가, 반도체 문외한인 그가 하이닉스라는 부실덩어리 공룡을 치유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게다가 하이닉스의 채권은행인 외환은행 행장 출신인 그는 ‘점령군의 사령관’ 정도로 여겨지기 십상이었다. 이 모든 어려움을 우사장은 정면으로 돌파해냈다.드라마의 1막은 피눈물 나는 구조조정이었다. 1만명이 넘는 직원들과 경영진의 3분의 1을 내보내야 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내부의 동요가 없었을 리 없다. 우사장은 본사는 물론 이천과 청주의 생산현장을 돌며 직원들과 호흡을 함께하고 강력한 윤리경영을 도입, 기강을 바로잡는 데 주력했다. 어려울수록 엄격한 규율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 그 결과 하이닉스는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회복해갔다.하지만 자신감만으로 벼랑에 몰린 기업이 살아날 리는 없다. 객관적인 경쟁력을 확보해야 했다. 반도체산업에서 빠른 기술개발과 양산능력, 양산 후 점차 떨어지는 제품가격을 보완할 수 있는 원가경쟁력 등은 생존의 필수조건이다. 하나같이 대규모 투자가 동반돼야 가능한 것들이다. 하지만 하이닉스에 그런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럼에도 하이닉스는 과감한 투자를 집행해 나갔다. 모험이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그렇다고 경쟁사들의 투자 규모를 흉내낼 처지는 아니었다. 경쟁사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비용으로 월등히 탁월한 효과를 만들어내야 했다. 기존의 방법이 아닌 전혀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하는 과제가 떨어진 것. 이때부터 혁신적인 생산력 향상 기술을 위한 엔지니어들의 ‘오디세이’가 시작됐다. 우사장이 하이닉스 부활의 가장 큰 비결로 꼽는 ‘적은 비용의 기술개발 성공’이 이때부터 본격화됐다.새로운 반도체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생산시설이 있어야 한다는 게 기존의 인식이었다. 하이닉스는 이 공식을 뒤엎었다. 기존의 생산라인을 유지한 채 새로운 규격의 제품을 생산하는 기술을 개발해냈다. 하이닉스가 업계 최고의 영업이익률을 낼 수 있는 것도 신규 시설에 대한 투자비용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우선 2001년 투자비용을 3분의 1 수준으로 줄일 수 있는 0.15㎛급 이하의 블루칩 기술을 개발했다. 뒤이어 90나노급 다이아몬드칩 기술까지 동일한 플랫폼 기술을 유지할 수 있는 칩패밀리 기술 개발에 성공하며 비용절감을 도모했다. 2003년부터는 업계 최고 수준의 수율을 달성하며 시장 평균을 웃도는 50% 중반의 생산량 증가를 이뤄냈다.지난해에는 200㎜ 웨이퍼용 팹인 M5를 개조해 300㎜ 팹인 M10으로 탈바꿈시키면서 세계 최단 기록으로 300㎜ 웨이퍼 생산에 돌입해 화제를 뿌렸다. 기존의 시설을 이용했기 때문에 투자비용을 대폭 줄였을 뿐만 아니라 경쟁사 대비 초기 수율이 2배 이상에 달하는 효과도 거뒀다.양산기술뿐만 아니라 새로운 반도체 제품도 개발해내며 국제적인 반도체 개발 경쟁의 대열에서 꿋꿋이 자리를 지켜나갔다. 2003년에는 세계 최초의 0.18미크론 고전압 공정기술과 1기가 DDR2 D램, 500MHz의 DDR SD램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이듬해인 2004년에는 세계 최초로 550MHz DDR SD램을, 지난 12월 초에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용량이 큰 512Mb GDDR4 D램을 개발했다.우사장은 해외 유수기업들과의 제휴를 통한 글로벌 경영에도 박차를 가했다. 지난해 8월 중국 장쑤성 우시시와 ‘중국공장 설립을 위한 본계약’을 수립한 데 이어 그해 11월에는 ST마이크로와 ‘중국 현지 합작공장 설립을 위한 본계약’을 수립하며 중국진출을 가시화했다. 하이닉스가 67%, ST마이크로가 33%의 지분을 갖는다는 조건이다.2006년 양산을 목표로 하는 중국공장이 가동하면 300㎜ 웨이퍼 생산량을 확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급성장하고 있는 중국시장에서 경쟁우위를 지키는 데 큰 보탬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 정부의 적극적인 재정적 지원과 저렴한 인건비 등을 활용, 원가부담을 더욱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지난 1월에는 대만의 프로모스와 300㎜ 파운드리 서비스 및 D램 제조 기술 라이선스 제공을 위한 본계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하이닉스는 일정 수준의 로열티 수입을 벌어들일 수 있으며 신규 투자 없이 300㎜ 웨이퍼 가공제품의 안정적인 생산능력을 확보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게 됐다.선택과 집중 전략을 채택, 비메모리사업부를 매각하는 결단을 내리기도 했다. 매각대금을 통해 110%대였던 부채비율을 70%대로 낮추고 메모리 전문업체로서의 역량을 강화했다. 이를 통해 조기 정상화의 전기를 마련하겠다는 계산이었다. 우사장의 전략은 멋들어지게 적중했다. 부채비율이 낮아지면서 금융비용이 줄어든 반면, 주력제품인 D램과 낸드 플래시 메모리의 판매량이 호조를 보이면서 하이닉스의 경영지표는 급속도로 호전됐다.하이닉스가 수렁에서 빠져나온 것은 확실해 보이지만 우사장은 여전히 긴장의 고삐를 풀지 않고 있다. 잠시라도 안주해 있다간 삽시간에 도태해버릴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여전하다. 첨단 기술 개발, 수익성 위주 포트폴리오 구축, 지속적인 원가경쟁력 확보 등 할일이 너무도 많다는 것이다. 우사장은 틈만 나면 자신과 직원에게 주문한다. “자신감을 가지되 자만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