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재계 인사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수시 인사와 조기 인사다. 글로벌 경기침체, 미국 대선, 우크라이나·중동발 지정학 긴장 등 불확실성이 지속되며 상시 인사를 통한 선제 대응의 필요성이 커졌다.
또한 급변하는 경영환경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해 경영전략을 수시로 점검하고 사업계획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적합한 인재를 적시에 배치하고 조직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서다.
각종 변수와 위기 상황에 대한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가정하고 각 시나리오별 대응책을 마련하는 시나리오 플래닝 전략이 확산하면서 이런 인사 기조는 뉴노멀(새로운 표준)로 자리 잡았다.
“모든 건 경영진 잘못”…삼성, 인사 태풍 예고
삼성전자는 반도체 부문 실적 악화로 위기감이 확산하며 올해 대대적 조직 개편과 인적 쇄신이 예고됐다. 삼성전자는 올해 3분기 영업이익이 시장 전망치를 밑도는 9조원대를 기록했다. 삼성 위기론이 나오는 데는 초격차 기술력 실종, 관료화된 조직문화, 사법리스크 등 여러 가지 원인이 지목된다.
최근 주가도 ‘5만전자’로 내려앉았다. 해외투자사 맥쿼리는 삼성전자를 ‘허약한 반도체 거인’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반도체(DS)부문을 이끄는 전영현 부회장은 10월 8일 3분기 잠정실적을 발표하며 “시장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과로 근원적인 기술 경쟁력과 회사의 앞날에 대해서까지 걱정을 끼쳐 송구하다”며 반성문을 냈다. 삼성전자 최고위층이 실적 발표와 관련해 별도 메시지를 발표한 것은 이례적이다.
삼성전자는 인공지능(AI) 시장 확대로 수요가 폭증한 고대역폭메모리(HBM)에서 SK하이닉스에 주도권을 빼앗기며 반도체 위기의식이 고조됐다. 반도체 위기 타개를 위해 정기 인사철도 아닌 지난 5월 원포인트 인사로 반도체 사업부 수장을 경계현 사장에서 전영현 부회장으로 교체했다.
전 부회장이 사과 메시지에서 “모든 책임은 사업을 이끌고 있는 경영진에 있다”고 언급한 만큼 DS부문 사업부장 교체를 포함해 반도체 부문에서 대대적인 인적 쇄신이 전망되고 있다. 경쟁사인 SK하이닉스보다 두 배 이상 많은 임원을 대폭 감축해 조직 효율성을 끌어올릴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는 통상 12월 초에 사장단·임원 인사에 이어 조직개편을 해왔으나 지난해는 예년보다 빠른 11월 말 인사를 단행했다. 올해 정기 인사는 11월 중순경으로 당겨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다가오는 이건희 선대회장 4주기(10월 25일)와 이재용 회장 취임 2주년(10월 27일), 삼성전자 창립기념일(11월 1일) 등 주요 이벤트와 맞물려 이 회장이 삼성 위기론과 ‘뉴삼성’에 대한 경영 메시지를 낼지 주목된다. ‘리밸런싱 SK’ 임원 20% 이상 감축설
SK그룹도 조기 인사 가능성이 높다. SK그룹은 통상 12월 초에 단행하던 정기 인사 시기를 11월로 앞당겨 내년 사업에 대비할 것으로 예상된다. SK그룹은 10월 31일부터 11월 2일까지 사흘간 경기도 이천 SKMS연구소에서 주요 경영 현안을 논의하는 ‘CEO 세미나’를 개최한다.
이 자리에서 그룹 미래 먹거리인 AI 전략과 11월 1일 공식 출범하는 SK이노베이션·SK E&S 합병 법인과 리밸런싱 진행 상황을 중간 점검하고 최창원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의 주도로 연초부터 각 사별로 진행 중인 운영개선 강화 방안도 공유할 것으로 보인다.
SK그룹은 지난해 10월 정기 인사에서 7년 만에 부회장단을 전면 교체하는 파격 인사로 고강도 체질 개선의 신호탄을 쐈다.
SK그룹은 올해 연중 수시 인사를 통해 SK에코플랜트, SK스퀘어 등 계열사 수장을 교체한 바 있다. SK그룹 주요 계열사에 임원 감축 지시가 내려진 것으로 전해지면서 임원이 최소 20% 이상 감축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실적 부진으로 이례적으로 연중 최고경영자(CEO)를 교체했던 SK에코플랜트는 최근 임원 수를 20% 이상 줄이는 조기 임원 인사를 단행하며 대대적인 조직 개편에 나섰다. SK에코플랜트는 지난 17일 반도체 종합 서비스를 제공하는 하이테크사업 조직 신설을 핵심으로 한 조직 개편을 단행했다.
이와 함께 기존 임원 17명이 물러나고, 신규 임원 2명이 승진했다. 지난 6월 말 기준 SK에코플랜트의 전체 임원은 66명이다. 재계에선 SK에코플랜트 임원 인사가 SK그룹 전체 임원 감축의 신호탄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출범 이후 11개 분기 연속 적자를 내며 비상경영 체제에 돌입한 SK온은 창사 이후 처음으로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SK온은 조직 슬림화 차원에서 최고관리책임자(CAO), 최고사업책임자(CCO) 등 일부 C레벨직을 없앴다.
꾸준한 흑자를 내고 있는 SK텔레콤에서도 직원 1인당 최대 3억원의 위로금을 주는 퇴직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있다. 성장 정체와 AI 분야에 대한 대규모 투자 단행이 맞물려 인력 구조조정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현대차 대규모 인사·LG 부회장 승진자 주목
현대차그룹은 대규모 승진 기조를 이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현대차그룹은 2022년 처음 연간 글로벌 판매 3위에 오른 이후 올해 상반기까지 도요타, 폭스바겐과 함께 ‘글로벌 빅3’ 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정의선 회장 취임 4년을 맞은 올해도 역대 최고 수준의 실적이 예상된다. 올해 1분기 현대차·기아의 합산 영업이익(6조9831억원)이 폭스바겐그룹의 영업이익 45억8800만유로(약 6조7935억원)를 넘어서기도 했다.
올해 외국인 사장 숫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인사에서 글로벌최고안전책임자(GCSO)를 역임하던 브라이언 라토프 부사장이 사장으로 승진하며 피터 슈라이어 고문, 알버트 비어만 전 사장, 호세 무뇨즈 글로벌담당 사장, 루크 동커볼케 CCO(최고창조책임자) 사장에 이은 현대차의 다섯 번째 외국인 사장이 된 바 있다. LG그룹은 지난 9월 구광모 회장과 주요 계열사 경영진이 참석하는 ‘사장단 워크숍’을 열고 차별적 고객가치 실행 가속을 통한 경쟁력 확보 방안 등을 논의한데 이어 10월 말부터 약 한 달간 계열사별로 사업 보고회를 할 예정이다.
매년 사업보고서 결과를 토대로 11월 말~12월 초 조직개편과 임원인사를 실시했던 만큼 올해도 비슷한 시기에 인사가 이뤄질 전망이다.
구 회장 취임 이후 부회장단 숫자를 점진적으로 줄여가며 지난해 권봉석 (주)LG 부회장, 신학철 LG화학 부회장 등 2인 부회장 체제를 구축한 LG그룹에서 올해 새로운 부회장 승진자가 나올지 주목된다. 업계에서는 LG전자의 체질 개선과 역대급 실적을 이끌고 있는 조주완 LG전자 사장의 부회장 승진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롯데·한화는 3세들의 약진
롯데그룹은 계열사 임원 평가 시기를 예년보다 앞당긴 것으로 알려져 조기 인사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통상 매년 11월 마지막 주에 정기 인사를 단행했으나 지난해에는 신동빈 회장의 부산엑스포 유치 활동 등으로 늦어져 12월 초에 이뤄졌다.
지난해 말 인사에서 계열사 대표이사 14명을 교체하는 큰 폭의 인사를 단행한 만큼 올해는 실적이 부진한 계열사에 대한 쇄신 인사를 실시하되 인사 폭은 크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경영 보폭을 넓히고 있는 신 회장의 장남 신유열 전무의 승진 가능성에도 관심이 모아진다.
한화그룹은 지난 7월 26일 한화솔루션 케미칼 부문, 한화솔루션 큐셀 부문, 여천 NCC 등 3개 계열사 수장을 전격 교체했다. 주요 그룹 중 가장 빠른 인사였다. 한화그룹은 지난 9월 27일 주요 계열사 정기 인사를 실시했다.
일찌감치 3세 경영체제로 승계구도 밑그림을 그린 김승연 회장의 세 아들의 역할 확대에도 이목이 쏠렸다. 이번 인사에서 장남 김동관 부회장은 한화임팩트 투자부문 신임 대표에 선임됐다. 이로써 김 부회장은 (주)한화, 한화솔루션,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전략부문 대표에 더해 4개 계열사 대표를 맡게 됐다.
삼남인 김동선 한화갤러리아 부사장은 10월부터 한화인더스트리얼솔루션즈 미래비전총괄도 맡게 됐다. 이번 인사로 김 부사장은 기존에 맡고 있던 유통·레저·로봇 사업에 이어 기계·장비업체도 담당하며 역할이 확대된다.
김 부사장은 한화갤러리아(유통)와 한화호텔앤드리조트(레저)에서 미래비전총괄(부사장)을, 한화로보틱스(로봇)에서 전략 기획 부문 총괄(부사장)을 맡고 있다. 차남 김동원 한화생명 사장은 금융 부문을 안정적으로 이끄는 데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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