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명을 500명으로, 0원을 5,000억원으로’김문선 효성 스판덱스 퍼포먼스유니트 아시아영업팀장ㆍ부장(40)이 지난 17년간 이룬 성과다. 김부장은 1988년 첫 직장인 효성에 입사해 한 회사에 몸담아왔다. 이후 스판덱스 관련 다채로운 업무를 맡아오며 효성의 스판덱스를 세계 2위로 끌어올렸다. 3명이던 스판덱스 인력은 현재 500여명이 됐다. 또 스판덱스로 벌어들인 매출액은 연 5,000억원에 이른다. 한마디로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서울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한 김부장은 효성의 연구원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연구실에 들어가자마자 당시 신소재였던 스판덱스 연구ㆍ개발을 맡게 됐습니다. 효성은 일찌감치 70년대에 스판덱스를 개발하려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죠. 88년 스판덱스에 다시 도전하게 된 겁니다.” 실험용 비커에 화학물질을 따르며 초보적인 연구부터 단계를 밟아나갔다.“그렇게 4년이 흘렀고 설비투자도 해서 기계는 갖추게 됐습니다. 하지만 결과물인 스판덱스 원사, 즉 ‘실’은 구경할 수 없었습니다.” 애타는 마음에 밤에는 기계를 고쳤다. 또 낮에는 기계 테스트를 하며 한 달을 집에 못 들어갔다. “28번 기계를 고친 끝에 결국 92년 대망의 ‘실’이 뿜어나오더군요.” 김부장의 직장생활 17년 중 가장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하지만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본격 생산을 위해 소규모 시범공장을 지었다. 그러나 스판덱스의 품질 수준은 기대에 못미쳤다. 글로벌 수준의 품질을 갖춘 스판덱스 원사를 생산하기 위해 또 다른 4년을 바쳤다. “96년이 되자 완성도 높은 스판덱스 원사를 생산할 수 있게 됐습니다. 스판덱스 생산을 위한 정규 공장도 짓게 됐죠. 그동안 마음 졸이며 하던 고생을 보상하듯이 대박 또한 터졌습니다.” 97년 시작된 IMF 외환위기는 효성 스판덱스에 오히려 절묘한 기회로 다가왔다. 96년 본격 양산된 스판덱스는 수출로 달러를 끌어모았다. 환율상승으로 가만히 앉아서도 달러가 두 배로 들어오게 된 셈이다. 스판덱스는 외환위기 시대 효성의 ‘효자’였다.“공장설비도 늘려 구미 등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 자싱, 주해에도 공장을 짓게 됐습니다. 앞으로 유럽에도 공장준공 계획이 있어요. 제 업무영역도 넓어져서 연구실을 벗어나 기술팀장, 기획관리팀장, 아시아영업팀장까지 하게 됐습니다.” 김부장은 독학으로 CAD(컴퓨터응용설계)를 배워 공장 펄프와 탱크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또 중국에 직접 나가 공장설립에 참가했다. 올해부터 시작한 아시아영업팀장 역시 스스로 지원해서 발령받았다. “고객을 직접 만나 계약을 맺고, 발로 뛰어 성과를 내는 업무에도 보람을 느낍니다.”김부장은 직장을 자주 옮기는 사람을 보면 안타깝다. 회사생활을 하면서 그 무엇보다 일에 대한 애착이 중요하다고 봐서다.“회사를 옮겨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실험실 비커에서부터 시작해 제 손으로 탄생시킨 스판덱스를 더 키워야겠다는 일념뿐이었죠. 또 88년부터 96년까지 시련과 좌절의 시기에도 ‘오직 스판덱스를 성공시키고 말겠다’는 집념 덕에 이직은 아예 관심 밖이었죠.”아울러 김부장은 ‘업무에서 자신의 비전을 찾을 수 있는지’, ‘업무가 자신의 전문분야와 잘 맞는지’, ‘이 분야는 나밖에 없다고 회사가 인정하는지’ 등을 중시한다.“10년차 정도에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다른 회사로 옮기면 연봉 몇 천만원은 오르겠죠. 하지만 좀더 받는다고 직장인이 갑자기 재벌이 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월급을 더 받겠다고 전문성을 살릴 수 없는 곳에 가면 오히려 마이너스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김부장은 요즘 신입사원의 잦은 이직도 우려 섞인 눈으로 바라본다. 특히 어려운 일을 맡길 때 회사를 그만두는 경우가 적지 않다.“제가 신입사원이던 시절에는 스판덱스의 독자기술 개발이 가능할지조차 점칠 수 없었습니다. 또 미래의 수익성이 보장되는 각광받는 섬유도 아니었죠. 하지만 ‘할 수 있다’는 비전을 갖고 본격 생산이 되기까지 8년을 매달렸습니다.”김부장은 “현재 1위인 ‘인비스타’(듀폰의 옛 섬유사업부문)를 꺾겠다”며 “효성의 스판덱스 브랜드인 ‘크레오라’를 1위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또 ‘스판덱스의 대가’로 전세계가 인정할 때까지 한우물만 판다는 각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