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2일 밤 12시. 서울을 출발한 지 4시간여 만에 호치민 탄선넛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한밤중인데도 후텁지근하다. 세계전도를 보면 호치민 바로 밑이 적도다. 공항시설은 베트남 ‘No.1 경제도시’란 타이틀이 무색할 만큼 아직 낡고 불편하다. 입국심사장은 부산하다. 심사 때는 아세안(10개국) 국민도 자국민과 같은 줄에 선다. 아세안 국가다운 대접이다.취재팀은 한참을 기다려 ‘외국인창구’로 통과했다. 공항 곳곳엔 한국기업ㆍ제품을 홍보하는 광고판이 수두룩하다. 대부분 삼성ㆍLG 등 대기업 광고다. 놀라운 풍경은 또 있다. 공항 밖에서 본 차량 중 상당수가 한국산이다. 택시는 아예 ‘마티즈’(대우) 천지. 한국어로 말을 거는 택시기사도 적잖다.이튿날 아침. 호텔(리젠드)에서 바라본 메콩강은 그야말로 절경이다. 큼직한 상선과 군 경비정이 뒤섞인 가운데 손바닥만한 작은 배들이 바삐 상ㆍ하류를 오간다. 건너편엔 선상가옥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고, 그 위엔 광고를 위한 대형 전광판이 어지럽게 세워져 있다(저녁에 바라보면 다국적기업의 광고경연장처럼 보인다). 강물은 온통 황토색이다. 호텔과 마주한 왕복 4차선 강변도로는 오전 7시 이후 눈에 띄게 바빠진다. 출근시간대다. 베트남은 오전 8시~오후 5시가 근무시간이다. 더 일찍 출근하는 곳도 많다. 러시아워가 시작되면 순식간에 오토바이가 도로를 가득 메운다. 빈틈이 없다. 웬만한 강심장으로는 끼어들 여지가 없어 보이지만, 이건 이방인의 오해다. 한 치의 틈만으로도 끼어들기는 ‘OK’다. 소란스러운 경적소리와 매연은 베트남의 또 다른 상징. 마스크ㆍ모자로 무장한 채 앞을 주시하는 오토바이군단은 대도시의 주인이다. 반면 자동차는 ‘거북이걸음’이다.호치민의 다운타운은 시청ㆍ우체국 등 관공서가 몰려 있는 ‘다이아몬드백화점’ 근처. 이 건물은 포스코건설이 지었다. 1~3층이 백화점이고, 그 위는 오피스건물이다. 지하엔 주차장뿐이다. 입주회사 중 절반 이상이 한국기업이다. 문재정 한국수출입은행 베트남법인 차장은 “호치민에 진출한 한국의 유명기업 중 상당수가 이곳에 들어와 있다”며 “높은 지가에도 불구, 유명회사가 많아 호치민경제의 블루상권으로 꼽힌다”고 전했다. 백화점 벽면광고도 둘 중 하나는 광고주가 한국기업. 삼성전자ㆍLG전자ㆍ웅진코웨이 등 한국제품만 파는 매장도 적잖다. 모 판매직원은 “평일이라 한산하지만 주말은 꽤 붐빈다”며 “여기서 쇼핑할 정도면 베트남 최고부유층”이라고 말했다.인근엔 한식당도 몇 군데 성업 중이다. 한국기업이 몰려 있어 자연스레 다이아몬드백화점 부근이 주재원들의 단골 약속장소로 정착된 모습이다. 취재팀이 점심을 먹은 D한식당은 한류 열풍을 톡톡히 봤다는 후문. 한국드라마가 방영되면서 입소문을 타 요즘엔 베트남인 단골까지 생겨났다. 물론 현지물가와 비교했을 때 엄청난 고가다.한 끼에 5~20배나 더 비싸지만 신흥부유층에게는 ‘고작’이다. 무역ㆍ자영업으로 2~3년 새 돈을 긁어모은 2030 젊은 부자가 속속 생겨나서다. 이들의 생활수준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낮은 물가(구매력 기준) 때문이다. 외제차에 첨단기기는 기본. 온갖 고가명품으로 무장한 부유층을 만나기도 어렵지 않다. 빈부격차는 ‘하늘과 땅’이다. 누구는 2만~3만원짜리 밥을 먹지만, 또 누군가는 도로변에서 100~200원짜리 ‘퍼’(베트남 쌀국수)를 먹는다. 여기가 바로 1975년까지 사이공으로 불렸지만, 지금은 호치민으로 바뀐 최대 경제도시 호치민의 실상이다.메콩강 근처 구엔후에 거리의 하버뷰타워. 이곳에는 화장품 ‘드봉’으로 일찌감치 한류를 이끈 LGVINA화장품(LG생활건강 베트남법인)이 입주해 있다. 올해 진출 9년째로 인지도 70%를 자랑하는 업계 선두주자다. 방문판매로 시작해 매년 20~30%의 성장을 반복 중이다. 사무실 곳곳엔 현지채용 사무직원들이 바삐 오간다. 화장품회사답게 여성근로자가 많다.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기업은 젊은이들 사이에 취업 1순위 후보다. 그도 그럴 게 월급이 200달러에 달해서다.60~70달러에 불과한 생산직에 비하면 엄청난 고임금이다. 거리에선 낯선 영어라도 사무직 사이에선 곧잘 통한다. 조영규 LGVINA화장품 대표는 “현지직원의 만족도가 꽤 높다”며 “우수인력이 많아 업무성과도 만족스럽다”고 전한다. 물론 맡겨진 업무만 처리한다거나 잘못한 일을 인정하지 않는 문화는 걸림돌이다. 그럼에도 불구, 조대표는 “베트남만한 투자환경은 없다”며 “향후 뻗어나갈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고 전망했다.‘꿈틀대는 호치민’은 빈말이 아니다. 호치민 외곽의 공업단지까지 뻗은 대로변은 역동적인 성장, 그 자체다. 마치 신도시건설 현장처럼 대로변 곳곳에 신ㆍ개축 중인 건물로 넘쳐난다. 벽돌과 흙무더기가 줄지어 쌓여 있다. 아스팔트 냄새도 끊이지 않는다. 인터넷이 씌어진 대형 PC방 옆에는 60년대 구멍가게가 먼지에 덮여 있다. 과거와 현대의 공존이다. “잠자고 있는 땅에서 깨어나고 있다”는 이한철 KOTRA 호치민무역관장의 말 그대로다. 이관장은 “베트남은 이제 자본주의의 맛을 봤다”며 “WTO 가입 후 금융ㆍ서비스의 제한까지 풀리면 가능성은 무한대일 것”이라고 진단했다.INTERVIEW노형종 수은 베트남 리스금융회사 대표‘국고는 비어도 개인금고는 그득’수은 베트남 리스금융회사는 한국수출입은행의 베트남(호치민) 현지법인이다. 본사지분이 100%다. 주로 한국산 기계류를 갖고 와 리스해주는 업무를 담당한다. 한국기업뿐 아니라 로컬기업도 고객리스트에 올라 있다. 약 600건에 금액(잔액)으로는 5,500만달러 규모다. 리스 대상은 섬유봉제 기계류나 라인에 깔리는 일관생산설비가 대부분이다. 20명의 임직원 중 한국주재원은 3명. 노형종 대표는 “최근 한국기업의 베트남 진출이 늘면서 리스 규모도 증가세”라며 “향후 베트남 금융시장의 개방이 가속화되면 시장규모는 훨씬 더 커질 것”이라고 전한다.노대표가 꼽는 베트남경제의 최대 약점은 취약한 금융산업이다. 노대표는 “채권추심을 비롯해 제반법규가 금융인프라의 발전을 막는다”며 “외환보유고만 해도 확실한 수치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고 아쉬워한다. 실제로 베트남의 외환보유고는 고무줄이다. WTO 가입을 위한 국제조사단의 실사 때조차 국가기밀을 이유로 확실한 금액을 밝히지 않았을 정도다. 대략적인 통계로는 얼추 21억~50억달러로 추산되지만, 그나마 신빙성이 낮다. 시장은 적어도 60억~80억달러로 내다본다. 보트피플의 공식적인 해외송금액만 연 27억달러에 달해서다. 여기에 개별가정이 보유한 달러도 엄청나다. ‘국고는 비어도 개인금고는 그득하다’는 말까지 들린다. 반면 환율은 확실히 지켜지는 편이다. 변동환율제지만 연초계획대로 통제되는 게 일반적이다.정치상황에 대한 노대표의 조언도 재미나다. 역사적 변란이 많아 중앙ㆍ지방간 협력구조가 취약하다. 정경유착ㆍ부정부패도 문제. 최근에는 도가 지나칠 정도로 부정부패의 단위ㆍ범위가 확산되고 있다. 높은 지가도 부담거리다. 호치민 시내의 노트르담성당 근처는 평당 2,000만~3,000만원에 달한다.남성호 노브랜드 베트남법인 대표‘합작보다 단독투자가 유리해요’1994년 연매출 500만달러로 시작해 올해 매출 1억8,000만달러로 급성장한 섬유업체다. 자체 브랜드 없이 ODM(제조자개발생산)으로 만든다고 회사이름도 ‘노브랜드’로 정했다.ODM은 R&D 비중이 높은 대신 영업력이 높아지는 장점을 갖는다. DKNY, 바나나리퍼블릭 등 명품브랜드를 일괄 기획ㆍ디자인ㆍ생산한다. 주력은 여성용 니트다. 내년 2억5,000만달러가 매출목표다. 섬유수출업계에선 ‘다크호스’로 통한다. 베트남엔 2002년 진출했다. 해외공장 중에선 베트남이 첫손가락에 꼽힌다. 총생산량의 50% 이상을 베트남이 맡는다. 원부자재의 80%가 한국서 들어온다.약 4,500명의 현지고용 생산직이 근무 중이다. 수당까지 합해도 한국의 10분의 1 수준(월 120달러)에 머물러 경쟁력이 있다. 남성호 노브랜드 베트남법인 대표는 “숙련도와 충성도가 굉장히 높다”며 “노조가 있지만 정부가 어느 정도 통제해줘 일하기 좋다”고 전한다. 남대표에 따르면 이들의 손재주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어려운 걸 맡겨도 기막히게 해온다”며 “기능올림픽에 나가면 상을 휩쓸 것”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노브랜드가 베트남에 들어온 건 신흥투자처로서 매력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2001년 미국과의 무역협정이 풀리면서 수출이 쉬워진데다 인력수준과 사고방식, 국가안정도 등이 뒷받침됐다. 올해만 10여개 섬유업체가 베트남에 진출했을 만큼 가능성도 여전히 엄청나다. 본사의 러브콜도 확실하다. 조대표는 “향후 베트남을 허브화해서 5년 내 10억달러의 매출을 기록할 계획”이라며 “현지에서의 원부자재 구매까지 가능해질 것”이라고 전한다. 외국인투자법을 챙기되 가능하면 합작보다 단독투자가 낫다는 경험담도 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