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이 중요한 분수령을 넘었다. 미국 공개시장위원회(FOMC)는 5월 초 금리를 0.25%포인트 올리기로 했다. 시장은 일단 금리인상 여부가 결정됐다는 것 자체를 호재로 삼는 분위기다. 금리를 올리는 것은 원론적으로 보면 악재지만, 불확실성이 제거됐다는 데 더 점수를 주고 있다. 물론 앞에 놓인 악재는 많다. 중국의 위안화 절상설이라든가, 북핵문제라든가 여러가지가 첩첩히 쌓여 있다. 투자심리가 쉽게 호전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도 이 같은 문제 때문이다. 특히 증시를 억누르는 악재들이 모두 해외변수여서 내부적인 수습책이 마련되지 못한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하지만 시장은 언제나 그렇듯 한번 불붙으면 이 정도 악재는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사실 중국의 위안화 절상설이나 북핵문제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재료들이다. 문제는 투자심리가 회복되느냐 여부지, 이 같은 악재들이 해결되느냐가 아니다.발빠른 투자자들은 이미 투자심리 회복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기관투자가들의 동향을 보면 확연히 나타난다. 기관투자가들은 최근 LG필립스LCD를 집중 매수했다. 반면 LG전자는 대량으로 매도했다. 우리금융은 팔고, 국민은행은 사고 있다. 사들이는 종목은 하나같이 지난 1분기에 시장의 예상치를 밑도는 실적을 발표한 종목들이다. 반면 팔아치우는 종목은 그런대로 좋은 실적을 낸 업체들이다. 1분기 실적이 기대 이하로 나온 종목은 사고, 예상대로 발표된 종목은 파는 ‘청개구리식 매매’를 하고 있다. 1분기 성적표는 어닝시즌 전에 상당부분 주가에 반영된데다 실적이 나쁠수록 향후 개선 폭도 커질 것이란 기대감이 높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기관들은 주가가 장중 910대로 추락한 4월21일부터 매수를 재개했다. 5월4일까지 10일 동안 매수금액도 5,100억원에 달해 조정장을 떠받치며 매수주체로 재부상하는 모습이다. 기관별로도 증권을 제외한 투신, 보험, 은행, 종금, 기금 등이 일제히 매수우위로 전환했다. 눈길을 끄는 것은 기관들이 사들이는 종목은 업종 내에서도 부진한 실적을 발표한 종목이라는 점이다. 정보통신(IT)업종에선 1분기에 영업적자를 낸 LG필립스LCD가 최근 10일간 321억원 순매수되며 집중적인 ‘러브콜’을 받았다. ‘어닝쇼크’로 불릴 만큼 부진했던 삼성전자에도 213억원의 기관매수가 유입됐다. 반면 대형 IT주 가운데 가장 좋은 실적을 올린 것으로 평가받는 LG전자는 72억원어치 처분했다.철강주에서도 예상을 밑도는 이익을 발표한 INI스틸에는 기관의 매수세가 유입되고 있지만, 사상 최대 실적을 거둔 포스코는 ‘팔자’ 주문에 고전하고 있다. 자동차업종도 1분기 영업이익률이 0.4%로 추락하는 등 최악의 실적을 낸 기아차를 매수하는 반면, 대표주인 현대차는 매도 중이다. 은행주도 국민은행 매수, 우리금융 매도라는 상반된 행보를 보이고 있다.기관의 청개구리식 매매행태에 대해 전문가들은 실적발표 시즌을 활용해 향후 턴어라운드 가능성이 높은 종목을 골라 선취매에 나서고 있다고 진단했다. 임정석 세종증권 팀장은 “실적이 예상보다 부진할수록 오히려 바닥도 가까울 것이란 역설적인 해석이 힘을 얻으며 턴어라운드 기대주에 기관의 매수세가 유입되고 있다”고 진단했다.실제 기관 매수세가 몰리고 있는 LG필립스LCD는 2분기부터 흑자전환이 기대되고 있고, 삼성전자도 2분기를 저점으로 하반기부터 본격 회복세를 보일 것으로 예상되는 종목이다. 1분기 최악의 실적을 낸 기아차도 강도 높은 비용절감 노력과 내수시장 회복에 따라 2분기 이후 실적개선이 가시화될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INI스틸도 당진공장이 5월부터 본격 가동돼 종합철강사로 거듭날 것이란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이처럼 발빠른 투자자들은 강세장에 대비해 매수를 서두르고 있다. 외국인도 마찬가지다. 거래소시장에서 중립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 외국인이 시가총액 500억원도 안되는 소형주를 속속 매집하고 있다. 한올제약, 환인제약, 보령제약, 태평양제약 등의 소형 제약주가 단적인 예다. 한올제약의 경우 최근 외국인의 신규 매수세가 유입되고 있는 종목이다. 외국인은 지난 3월15일부터 5월4일까지 단 하루만 빼고 한올제약에 대해 연일 매수우위를 보였다. 한올제약의 외국인 지분율은 같은 기간 0.96%에서 3.45%로 2.49%포인트 높아졌다.대양금속, 영화금속, 동원금속 등의 소형 철강ㆍ금속주와 남선홈웨어 같은 소형 기계주도 마찬가지다. 스테인리스 냉연강판 제조업체인 대양금속은 4월 중순 이후 외국인이 간헐적으로 하루 5,000~1만주씩 매수세를 나타내고 있다. 최지환 세종증권 연구원은 “대양금속은 내수회복에 따른 수혜가 예상되는데다 배당수익률이 7%에 달하고 있는 점이 매력”이라고 설명했다. 남선홈웨어는 5월4일에만 15만주의 외국인 순매수세가 유입되면서 이들의 지분율이 3.73%로 높아졌다.이외에도 국내 1위 간장제조업체인 삼표식품, 대림산업 계열의 건설사인 삼호, 윤활유제조업체인 미창석유 등도 지난 4월 이후 외국인이 꾸준히 매수한 종목으로 꼽히고 있다. 이처럼 외국인이 소형주를 매수하고 있는 것은 해외악재 등으로 대형주 및 중형주의 예상 수익률이 낮아지자 이들의 대안투자를 위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택환 유리자산운용 주식운용본부장은 “현재 주가 수준에서 대형주의 올 예상수익률은 대체로 10~20% 정도에 불과하지만 저평가된 소형주를 발굴하면 그 이상의 수익을 거둘 수 있다는 인식이 외국인 사이에도 점차 확산되고 있는 결과로 풀이된다”고 설명했다. 이본부장은 또 “지난해 하반기부터 외국계 펀드들이 배당수익률이 높거나 잉여현금 흐름이 좋고 사업 안정성이 높은 국내 소형주의 매수를 늘리고 있다”며 “여기에 고배당 등을 겨냥한 국내 기관과 개인의 소형주 관심도 높아지고 있어 소형주 인기는 이래저래 높아지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또 소위 슈퍼칩이라고 불리는 종목들도 인기다. 슈퍼칩은 시장 움직임과 무관하게 일관된 상승세를 보이는 종목을 말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블루칩이라도 주가가 시장분위기나 환경에 따라 부침이 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슈퍼칩 주가는 적은 보폭이지만 꾸준한 오름세를 나타낸다. 심지어 실적이 악화돼도 주가는 좀처럼 떨어지는 법이 없다. 그래서 월봉 차트로 보면 45도 각도로 오름세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아 ‘45도 종목’으로도 불린다. 대표주처럼 화려하지 않지만 업종 내 진입장벽이 두텁거나 가격결정권을 갖고 있어 외부요인에 영향을 거의 받지 않고 안정적인 이익을 낸다는 게 슈퍼칩의 특징이다.대표적인 ‘슈퍼칩’으로는 KT&G, 농심, 신세계, 태평양, 오리온, 빙그레, 삼천리 등이 꼽힌다. 제약주 가운데 한미약품ㆍ유한양행, 제지주 가운데 신무림제지ㆍ한국제지 등도 여기에 속한다. 김석규 B&F투자자문 사장은 “슈퍼칩은 비록 시장 대표주가 아니더라도 해당 업종 내 진입장벽이 두텁거나 가격결정력을 가질 정도로 시장지배력이 커 외부요인에 영향을 받지 않고 일관된 흐름을 보이는 것이 매력”이라며 “대부분 고배당주여서 시장상황이 불투명한 박스권 장세에서는 유력한 투자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KT&G의 경우 민영화된 지난 2002년 말 이후 주가가 꾸준히 상승세다. 차트를 보면 그야말로 45도 각도로 위를 향하고 있다. 정성훈 현대증권 연구원은 “KT&G 민영화 이후 외국산 담배업체 시장잠식에도 불구하고 독점력을 유지하고 있는 데 따른 것”으로 분석했다. 실제 KT&G의 시장점유율은 외국산 담배에 밀려 한때 75%선까지 떨어졌으나 다시 77.3% 수준으로 올라와 있다. 가격인상에 따른 판매감소로 지난 1분기 실적이 다소 저조했지만 주가는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다. 지배력에 흔들림이 없는데다 자사주 매입과 고배당으로 장기적인 투자가치도 우수하기 때문이다.삼천리도 마찬가지다. 이 회사는 경기도와 인천지역 천연가스 독점공급업체로 지난 10년간 이익이 꾸준히 증가해왔다. 최근 일부 성장둔화 우려가 제기되고 있지만 이익의 안정성이 가스주 가운데 최고로 꼽히며 주가는 지속적으로 상승세를 유지하고 있다. 그동안 정부의 보호 속에 커온 업종 대표주인 가스공사가 정부 규제 리스크와 요금인하 등으로 독점력이 무너지며 하락세로 접어든 것과는 대조된다.제약주 중 한미약품, 유한양행의 경우도 주가가 꾸준한 상승세를 유지하고 있다. 시장점유율이나 신약개발력, 매출성장률 등에서 선도적 지위에 있다는 점 때문에 단기간 조정을 받더라도 복원력이 우수하다. 라면시장의 절대강자인 농심, 유통업종 지배적 사업자인 신세계, 화장품업종 1위인 태평양, 음식료업체 대표주인 오리온, 질소화합물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하는 휴켐스 등도 장기간 상승 추세를 유지하고 있는 슈퍼칩들이다.한상수 동원투신 이사는 “이들 종목의 일관된 주가흐름은 기관들이 안정적 수익률을 유지하기 위해 항상 일정 비율로 편입하고 있는 것도 한 이유”라며 “대세상승장에서는 다소 수익률이 뒤처질 수 있지만 여전히 변동성이 큰 국내증시에서는 장기간 투자하기에 안성맞춤인 종목들”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