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생각하며 찜질방서 ‘와신상담’

1998년 케밥ㆍ스파게티 브랜드 ‘멜리’로 프랜차이즈 사업에 뛰어든 김동현 마운트허몬 사장(45)은 과도한 투자로 2000년에 크게 주저앉은 경험이 있다. 그가 14억원의 빚을 지고 찜질방을 전전하며 와신상담한 이야기는 프랜차이즈업계에서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다. 그는 강인한 정신력으로 이 시절을 이겨내 빚을 갚은 것은 물론 지금은 새로운 파스타 브랜드 ‘파스타리오’ 지점을 38개까지 늘렸다. 이 같은 김사장의 이야기는 많은 창업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이야기로 회자되곤 한다. 그에게 이 찜질방 생활은 가장 힘든 시기였던 동시에 그가 부활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고 계기였다.“<삼국지>나 <초한지> 같은 역사소설을 수없이 읽으며 권토중래의 의지를 다졌습니다. 특히 찜질방에서 여가를 즐기는 가족단위 이용객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주변에서 차라리 부도를 내라고 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가족을 생각하면 결코 무릎을 꿇을 수 없었다. 비록 가족과 단란한 시간을 보낼 수 없는 처지였지만 가족을 생각하면 힘이 났다.그렇다면 아버지가 이렇게 힘들어할 때 아들, 딸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이들은 제가 찜질방에서 생활한 사실조차 모릅니다. 계속 출장 간다고 둘러댔습니다. 특히 빚쟁이가 집에 찾아오기라도 할라치면 ‘내가 갈 테니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제가 험한 일 겪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습니다.”다행히 아이들에게 힘들어하는 자신의 모습을 들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자녀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중학교에 다니는 딸은 지금도 밤 12시가 넘어야 잠이 드는 버릇이 생겼다. 2000년 당시 초등학생이던 딸은 아버지가 빚문제로 고심한다는 사실은 몰랐어도 아빠를 만나기 위해 밤늦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쯤은 알아차릴 나이가 됐기 때문이다.김사장은 “고통은 가장인 내가 혼자 떠안아야 할 몫”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힘든 모습을 안 보인 김사장은 자녀에게 ‘바쁜 아빠’로만 인식돼 있다. 그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아이들은 전혀 모른다. 그저 아빠가 너무 바빠 학교 행사에 얼굴 한번 안 비치는 게 아이들은 불만이다.내년까지 100호점을 내는 게 목표라는 김사장은 ‘세계를 상대로 하는 외식업체를 만들고 싶다’는 원대한 포부를 안고 있다. 외식은 세계를 향한 아이템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반면 아버지로서 그의 포부는 소박하기 그지없다. 너무 바빴던 지금까지의 생활에서 벗어나 평범한 다른 아버지처럼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게 그의 꿈이다.그래서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서도 뚜렷한 소신을 갖고 있다. “큰아이는 본인이 관심 있어 하는 조리사를 시킬 마음도 있습니다. 우리 세대가 고생했다고 해서 아이들에게 억지로 무엇인가를 시키려고 하면 안됩니다.”김사장은 “그저 아이가 원하는 일을 지지해주는 게 이 시대 아버지의 역할이 아니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다시 선 아버지 - 유재상 황장군 돈암점 사장내리막 일본 사업 접고 ‘가족창업’“온가족이 함께 창업에 뛰어들었습니다. 아내와 자녀들이 제 오른팔, 왼팔입니다.”유재상씨(49)는 지난해 12월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에 ‘황장군 불바베큐’ 돈암점 문을 열었다. 사실 유씨는 16여년간 일본에 살았던 사업가였다. 1987년 일본에 건너간 그는 핸드백 제조회사를 차렸던 어엿한 ‘사장님’이었다. 한국에서의 핸드백 공장 운영 노하우를 바탕으로 일본에서 성공, 가족과 함께 여유롭게 살았던 것. 하지만 일본의 장기불황과 값싼 중국제품의 공격이 맞물리면서 난관은 시작됐다.“90년부터 99년까지는 한달에 300만엔(약 2,840만원)을 벌어들였습니다. 이러던 사업이 99년부터 하강곡선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결국 2003년에는 한달에 70만~80만엔 정도까지 수입이 떨어졌다. 처음 벌던 돈의 25% 정도만 손에 쥘 수 있게 됐다. 제조업에서 희망을 찾을 수 없었던 그는 결국 일본에서의 사업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제조업 불황이 피부에 와 닿더군요.”다시 고국 땅을 밟은 것은 2003년. 그후 5~6개월간 본의 아니게 백수생활을 하면서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다. 그러던 유씨에게 미국에 와서 가방 제조일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하지만 아내는 그에게 “당신이 고생하는 게 싫다”며 “돈 욕심 부리지 말고 마음을 비우자”고 부탁했다. 설상가상으로 아내는 허리수술을 받게 됐다. 병원을 내 집처럼 들락거리던 즈음 그는 병원에서 창업 구상을 하게 됐다.병원 대기실에서 신문을 읽던 중 ‘황장군’이라는 프랜차이즈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가족회의를 거친 후 항아리에 24시간 숙성시켜서 파는 치킨에 승부를 걸어 보기로 결심했다.아내와 2남 1녀 자녀, 대학생 자녀 2명과 초등학생 1명으로 이뤄진 그의 가족은 황장군 1호점을 방문했다. 1호점에서 맛과 노하우를 엿본 뒤 2호점 오픈 날에는 개업 전 과정을 지켜봤다. 치밀한 리서치 끝에 유씨 가족은 곧 불바베큐 프랜차이즈에 확신을 얻게 됐다.“한달 정도의 준비 끝에 지난해 12월 1억원의 비용을 들여 황장군 8호점을 시작했습니다. 일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힘이 됩니다. 일이 없을 때는 더디게 가던 하루하루가 이제는 쏜살처럼 흘러갑니다.”월 700만~800만원의 매출을 올리며 함박웃음을 찾게 된 유씨 가족은 호흡이 척척 맞는다. “아르바이트 학생도 있지만 대학생인 아들이 주변 아파트에 광고전단지를 직접 돌립니다. 주방일은 아내와 제가 함께합니다.” 인건비도 절약하면서 가족 모두가 얼굴을 맞대고 함께 일하는 그의 가정은 따뜻한 가족애로 늘 훈훈하다.다시 선 아버지 - 이경복 수맥돌침대 사장사업마다 실패…역경 딛고 ‘대박’수맥돌침대 이경복 사장(56)은 역경을 극복하고 성공한 기업인이다. 잘나가는 직장을 뿌리치고 나와 고생길로 접어들어 농약을 마시고 자살까지 시도했었다. 그가 죽음의 문턱에서 나와 성공한 기업인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은 가족의 힘이 컸다. 일과를 마치고 퇴근하면 항상 가족에 대한 감사의 기도를 한다는 이사장이다.그가 당시 선망의 대상이던 한국조폐공사의 연구원 생활을 헌신짝 버리듯 나온 것은 1982년 3월 따뜻한 봄날이었다. 충청도 시골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끼니를 굶어가며 주경야독으로 대학을 마친 뒤 73년 잡은 첫 직장이 한국조폐공사였다. 연구원으로 지폐의 재질강도를 높이는 연구에 몰두했던 그는 단조로움에서 벗어나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싶다는 생각에 뛰쳐나왔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직장을 그만두자 아내가 눈물을 흘리더군요.” 이후 이 사장에게 닥친 것은 시련의 연속이었다.하는 사업마다 실패했다. 처음 시작한 건강식품 판매사업과 두 번째 사업인 슈퍼마켓은 1년 만에 문을 닫았다. 또 봉제공장을 차렸지만 이 역시 아파트만 날리고 간판을 내려야 했다. 이어 문구점, 의료기기판매상, 해물탕집 등 이것저것 손대봤지만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집은 경매로 넘어가고 서울 구의동의 3평짜리 반지하방으로 쫓겨났다. 비 오면 물이 새 방 안에는 양동이를 놓아야 할 정도였다. 아내와 초등학생인 두 아들 등 네 식구가 살기에는 비좁았다.“방이 좁다고 불평하는 애들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려야만 했죠. 가슴이 아팠습니다.”빚쟁이는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고 더 이상 버틸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택한 것이 자살. 이사장은 집에서 농약을 마셨다. 병원에 실려가 사경을 헤매고 이틀 만에 깨어났다. “1989년 7월 초로 기억되는데 깨어나 보니 침상 옆에 아내와 두 아들이 앉아 있더군요. 내가 잘못했구나 하고 후회했어요.”이후 아내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파출부를 하며 생계를 도왔다. “허리가 쑤시고 어깨가 결린다며 차가운 방바닥에 드러눕는 아내를 볼 때면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실패를 거듭하자 형제들도 ‘못난 놈’이라고 비웃었지만 아침마다 두 아들은 아빠의 두손을 꼭 잡고 용기를 불어넣어주었다.지난 91년 수맥파를 차단하는 돌침대사업을 하면서 여유를 찾기 시작했다. 이 침대는 한국 식품의약품안전청에서 의료기기로, 미국식품의약국(FDA)에서도 안전성을 인증받았다. 처음에는 발품을 팔았지만 입소문이 나면서 판매량이 늘어났다. 물론 매출도 증가하고 공장도 지었다. 회사가 자리를 잡자 93년부터는 양로원을 찾아다니며 부모님에게 못다한 효를 실천하고 있다.“10년 만인 96년 10월 추석, 가족과 함께 부모님 산소에 찾아가 절을 올리며 회한의 눈물을 흘렸어요.”이계주ㆍ한국경제 벤처중기부 기자 leer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