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나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아버지는 직업이 의사였던 탓인지 매사가 위생 제일주의였다. 익히지 않은 음식은 회는 물론 냉면까지도 먹지 못하게 했다. 수학여행 외에는 자식들이 집 밖에서 자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셨다.아버지는 매사에 지나칠 정도로 조심스러웠다. 돌다리도 두드려만 보고 건너지는 않는 성격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느낄 정도로 고지식하고 답답했다. 식구들에게는 자상스러움을 넘어 세밀한 부분까지 간섭이 심했다. 나는 그렇게 사는 게 싫었다. 내가 법대를 선택한 데는 의대를 권하는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도 작용했던 것 같다.온가족이 절약하면서 살았지만 의사가 집 한채 외에는 별다른 재산이 없었던 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아버지 잘못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부지런하고 착실하게 살았지만 예금만 해서는 부를 축적할 수 없었던 시대상황이 문제였다. 아버지는 한결같은 ‘모범생’이었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다’, ‘털어서 먼지 하나 나지 않을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살았다. 은퇴하기 전까지 지방병원에 15년 넘게 혼자 근무할 때도 혹시라도 구설수에 휘말릴까 퇴근시간 후에는 나돌아다니지 않으셨다. 아버지처럼 평생 집과 병원 사이만 오가는 단조로운 생활을 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나이가 들면서 아버지를 이해하게 됐다. 아버지는 아버지 방법으로 자식들을 끔찍하게 사랑하셨던 것 같다. 인생의 최우선순위를 자식교육에 두셨다. 내가 경기고 입학시험에 합격하자 아버지는 광주에서 서울로 이사했다.또 사법시험 준비할 때 아버지는 안방에서 밤늦게까지 그림을 그리며 밤새워 공부하는 아들을 말없이 격려하셨다. 예나 지금이나 공부에서 좋은 성과를 낸 건 부모님 덕분이라고 생각한다.고희가 지나면서 우리 형제는 아버지에게 은퇴를 권하기 시작했다. 나이 들어 주말부부로 사는 모습이 자식들 보기에 불편했기 때문이다. 아직 더 일할 힘이 있다고 거절하던 아버지가 정작 은퇴를 결심한 건 75세가 돼서다.은퇴 후 아버지는 집 안팎을 직접 수리하고 마당을 가꾸면서 항상 몸을 움직이신다. 가만히 있으면 건강에 좋지 않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은 지 40년 정도 돼 집 천장에서 빗물이 떨어지자 직접 사다리를 타고 외벽 전체에 방수페인트를 칠하기도 하셨다.내가 사는 빌라 주차장 천장에서 물이 심하게 떨어졌을 때도 아버지가 구원투수로 나섰다. 공사업체가 여러차례 방수작업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한 뒤였다. 아버지가 며칠간 철사를 사용해 연구하더니 베란다 물이 내려가는 배관이 주차장 위로 지나가고 그 배관이 깨졌다는 사실을 밝혀내셨다.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었다. 깨진 배관을 고치자 물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아버지는 가족과 휴가 한번 가지 않았다. 어릴 때 여름방학이 지나면 다른 아이들은 바캉스 자랑을 했는데 부러울 뿐이었다. 분가를 한 뒤 필자는 가끔씩 여행가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는 것을 체험하게 됐다.때문에 아버지에게 여행을 같이 가자고 권했지만 한번도 응하지 않으셨다. 평생 지켜온 생각과 습관을 쉽게 바꿀 수 없겠지만 아버지는 그렇다 치고 어머니까지 평생 여행 한번 가지 못하고 사는 게 안타까웠다.부모님이 건강해서 여행에 지장이 없을 때 조금이라도 세상을 구경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난해 결혼을 하고 나서 제주도에 성묘 겸 가서 하루 묵고 오자고 설득했더니 아버지는 성묘에 마음이 끌려서 응하셨다.집 밖에서 먹고 자는 게 불편하다고 생각했던 아버지가 제주도를 다녀오더니 생각이 바뀌셨다. 오히려 먼저 어머니에게 일본여행 계획을 세우자고 해서 온가족이 ‘해가 서쪽에 떴다’며 놀랐다. 그후 우리 부부는 몇 번 부모님을 모시고 1박2일의 여행을 다녀왔다. ‘아직도 마음은 20대인데 거울을 봐서야 나이 든 것을 알았다’는 부모님에게 이제 자식으로서 소망이라면 부모님이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