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불안, 직장인 학원으로 내몰아 … 의대 진학 위해 수능 재도전도 불사

‘대한민국, 지금 시험공부 중.’교육산업이라고 하면 대개 초ㆍ중ㆍ고 사교육시장과 유아교육시장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교육비즈니스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문이 있다. 바로 성인 대상 사교육시장이다.최근 많은 직장인이 자기계발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다. 굳이 지난해부터 유행하고 있는 ‘샐러던트’(샐러리맨+스튜던트) 열풍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제 공부하는 직장인의 모습은 어디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보편적 현상이 됐다.일본식 호봉제와 평생고용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나라 직장인에게 지난 몇 년간 일어난 변화는 여전히 생소하기만 하다.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외국계 기업, 특히 서구식 성과주의 시스템에 바탕을 둔 회사들이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대다수 직장인이 평생고용과 성과주의의 과도기에 놓인 가운데 방황하고 있다. 지난해 한 채용 포털업체는 직장인 10명 중 3명이 공무원, 자격증 등 시험준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는 설문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고용불안정’이라는 이 시대 키워드는 새로운 교육사업, 일종의 ‘신(新)고시비즈니스’가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신고시비즈니스를 이끄는 선두에 있는 것은 공무원시험이다. 공무원시험 경쟁률이 매년 사상 최고치를 갈아치우는 가운데 전국적으로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은 25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공시’(公試)라는 신조어를 써야 할 정도로 평생직업으로서 공무원 선호도가 높아지자 관련 학원이 덩달아 상종가를 달리고 있다. 아예 사법시험이나 외무고시처럼 전업수험생이 돼서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사례도 늘었다.지난해 공무원시험에 합격, 올해 초 발령을 받은 조지영씨(27)는 대학졸업 후 전문잡지 기자로 1년 6개월 동안 일했다. 기자가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한 조씨는 지난해 6개월 동안 공무원시험을 준비해 당당히 합격했다. 일단 공무원시험 준비의 메카로 알려진 노량진을 찾은 조씨는 종합강좌에 등록해 고3수험생 같은 일상을 경험해야 했다.대개 공무원시험 준비학원은 하루 4시간 정도 수업이 이어지는 종합반과 과목별로 들을 수 있는 단과반이 있다. 종합반은 2개월 코스에 20만~30만원, 단과반은 과목당 7만~8만원 정도다.지방 수험생은 이 일대 강사들의 동영상 강의를 구입해 듣기도 한다. 이들 공시생의 운영은 이들을 타깃으로 한 ‘고시식당’에서 해결할 수 있다. 평균 한 끼에 1,500~2,000원인 고시식당의 운영은 식권판매와 월식판매 등 고시촌 특유의 선불판매 방식으로 이뤄진다. 고시에 장기간 매달리는 사람이 많은 만큼 단골을 대상으로 선불 할인판매를 하는 게 이들 고시식당 비즈니스의 컨셉이다.교육대학 편입학 열기도 어른을 대상으로 한 사교육시장이 커진 배경 중 하나다.올해 서울교대에 학사편입한 유현미씨(32)는 지난해 교육학학원과 피아노학원, 미술학원 등을 평균 1개월 정도씩 다녔다. 교대 편입학을 위해서 갖춰야 할 조건이 많기 때문이다. 영문과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했던 유씨는 “평소 영어공부를 꾸준히 해온 덕에 비교적 운 좋게 시험에 합격했다”면서 “함께 편입한 동기생의 경우 1~3년 정도 준비한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교육학 수강만 9개월 정도 하는 것은 보통”이라고 신종 고시비즈니스의 실태를 전했다.교육대학과 더불어 많은 직장인이 사범대학으로 ‘유턴’하고 있다. 1년 6개월 동안 직장생활을 한 배모씨(28)는 올해 서울의 한 여자대학에 학사편입을 했다.이 같은 학사편입의 경우에도 역시 학원수강은 거쳐야 할 필수코스다. 학사편입에 성공하려면 대개 영어시험을 포함한 몇가지 필기시험과 면접을 통과해야 한다.배씨는 “혼자 공부해도 되지만 아무래도 편입 영어시험 특유의 패턴이 있기 때문에 학원의 도움을 받는 편이 유리하다”면서 “하루에 3~4시간씩 수업을 들었다”고 설명했다.이처럼 재취업을 노리는 직장인과 함께 대학생 수강생도 늘어 학사편입 전문학원은 발 디딜 틈이 없다는 게 수강생들의 말이다. 청년실업이 장기화되면서 학벌에 대한 부담이 커지자 좀더 이름 있는 대학으로 옮기기 위한 대학생이 많아졌다는 이야기다. 아예 1년씩 휴학하고 편입시험을 준비하는 경우도 있다.의사ㆍ한의사 같은 전문직은 여전히 인기직종이다. 하지만 최근 트렌드는 단순히 의대나 약대, 한의대의 입학성적이 높다는 수준을 넘어선다. 전문직의 인기가 곧 직장인의 ‘수능 재도전’으로 이어지고 있다.공무원시험이나 교대ㆍ사범대 편입시험과 달리 의대ㆍ약대는 편입학에 제약이 많다. 이공계 출신인 경우 몇몇 과목을 이수한 뒤 학사편입 전형에 응시할 수 있지만 문과계열 출신은 이조차 불가능하다. 게다가 내년부터 의대 학사편입학은 사라질 것으로 보인다. 평생직장에 대한 고민은 대체로 일반사무직으로 일하고 있는 ‘화이트칼라’ 계층에서 자주 나타난다. 결국 이들은 대학수학능력시험 재도전이라는 마지막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든다는 얘기다.실제 직장인의 유턴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경희대 한의예과의 경우 올해 입학생 77명 중 30대 신입생이 12명에 달한다.상황이 이렇다 보니 입시학원에서 ‘장수생’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정원이 한 학급에 평균 30명 가량 되는 종합입시학원의 경우 한 학급에 1~2명은 직장을 그만두고 온 장수생이라는 게 학원 관계자의 말이다. 서울 청량리 제일학원의 배우영 관리부장은 “특히 지난 연말부터는 직장인인데 대학입시준비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문의해 오는 사람이 많다”면서 “직장인반이나 주말반이 개설돼 있느냐는 문의도 있어 수요가 많으면 주말수업반 개설을 고려 중”이라고 이 같은 열기를 전했다.전문직으로 가는 관문으로 이제는 가장 ‘보편적인’ 사법시험 역시 사교육의 도움을 받는다는 이야기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객관식 시험인 1차시험은 기출문제 정리가 효과적이기 때문에 학원을 찾는 고시생이 많다. 2차시험을 앞두고 학원에서 치르는 모의시험에만 집중하는 경우도 있다. 신림동 고시촌의 경우 고시식당과 고시원, 학원 등이 완벽한 ‘고시비즈니스 클러스터’를 이루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어학 관련 산업의 성장은 그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새로운 직종을 찾아 학교로 유턴하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영어학원은 그야말로 직장인의 필수코스다.특히 최근 영어학원사업은 단순한 수치상의 성장보다 다양한 형태로 진화하고 있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대형 브랜드를 갖춘 어학원 중심에서 회화위주, 독해위주 등 각 영역별로 차별화된 학원이 인기를 끌고 있기 때문이다.예컨대 2003년 문을 연 서울 강남의 신동표어학원은 동시통역대학원 입시학원으로 출발해 고급영어 배양학원으로 직장인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통역ㆍ번역대학원에서 활용하는 통역, 번역기술 습득방법을 도입한 이 학원은 최근에는 오히려 통ㆍ번역 전문직을 준비하는 수강생보다 영어실력 배양을 원하는 직장인과 대학생 비중이 4대6 정도로 우세한 상황이다. 신동표 원장(42)은 “연평균 20% 이상 수강생이 늘고 있다”며 “수강생 중 변호사, 의사, 회계사, 교수 등 전문직 종사자도 상당수”라고 말했다. 그는 또 “많은 기업이 영어로 토론하고 문서를 작성할 수 있을 정도의 영어실력을 임직원에게 요구하는 추세”라며 “따라서 이에 부응하는 영어학습 프로그램과 교육기관의 성장은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미국에 본사를 두고 있는 벌리츠어학원은 영어회화 전문학원으로 차별화를 꾀한 경우다. 이 학원은 일반 영어학원과 마찬가지로 그룹 영어회화 수업을 운영 중이지만 수강생이 원할 경우 일대일 학습이나 기업의 인재교육 프로그램의 하나로 맞춤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게 장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