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영어마을 올해 8천4백명 예약, 전국적 확산 추세

3월16일 오전 11시. 10여명의 학생들이 모여 있는 1층 사이언스교실 책상에는 달걀과 이쑤시개가 어지럽게 널려 있다. 이쑤시개와 접착제로 달걀을 감싸는 구조물을 만들어 깨뜨리지 않고 떨어뜨리는 중력실험이 한창이다. 담당교사 캐빈이 천천히 원리를 설명하자 아이들은 ‘예스’와 ‘오케이’를 연발하며 눈과 귀를 집중시킨다. 딴전을 부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간혹 지시를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손짓과 눈빛으로 만사형통이다. 간혹 한국말이 툭툭 튀어나오기도 하지만 그뿐이다. 모든 대화는 영어가 ‘기본’이다.지하 쿠킹교실로 향하는 복도에서 만난 여학생들이 밝은 얼굴로 인사한다. 높은 톤의 ‘헬로’ ‘하이’라는 인사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쿠킹교실에선 뉴질랜드식 팬케이크 파이클리츠(Pikelets) 만들기가 한창이다. 버터 향기 가득한 교실 한쪽엔 4세트의 주방시설이 갖춰져 있다. 직접 반죽을 풀어 구운 팬케이크에 딸기시럽을 얹어 먹으면서 교사와 아이들은 유쾌한 친구가 된다.2층은 왠지 북적거리는 분위기. 멀티미디어랩에서 아이들이 촬영한 동영상을 영어로 편집하는 수업이 진행 중이다. 맞은편 복도 끝엔 삼삼오오 둘러앉아 숙제를 하는 아이들로 가득하다. 원어민 교사가 아이들 사이를 수시로 오가며 숙제를 도와준다. 간혹 터져나오는 웃음소리에 분위기가 절로 환해진다.낙조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대부도 해안에 자리잡은 경기영어마을 안산캠프는 원래 경기도공무원수련원 건물이었다. 알록달록 다채로운 시설을 갖춘 국내 최초의 영어마을로 리모델링, 재개원한 때가 지난해 8월23일. 지금까지 매주 200명 안팎의 학생들이 이곳을 거쳐갔고 내년 2월까지 입소할 8,400명의 학생 선정도 이미 끝난 상태다. 그만큼 반응이 폭발적이다.38명의 원어민 교사와 19명의 내국인 교사가 매주 200명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이곳은 철저한 ‘영어왕국’이다. 내부시설 어디에서도 한국어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모든 의사소통과 표시가 영어로 돼 있어 이곳에 머무르는 한, 잘하거나 못하거나 어쩔 수 없이 영어와 함께해야 한다.5박6일로 진행되는 기본 프로그램은 경기도 내 중학교 2학년생을 대상으로 한다. 개별신청은 받지 않고 학교별로 신청을 접수한다. 1인당 비용은 숙식 포함 8만원. 물론 이곳에 있는 동안 수업일수 인정을 받게 된다.일단 입소하게 되면 하루 종일 다양한 수업을 하면서 영어에 푹 빠지게 된다. 하지만 이 과정의 ‘목표’는 그리 거창하지 않다. “외국인과 말 한번 안해 본 아이들이 영어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도록 만드는 게 첫 번째 목적”이라는 정동수 교육팀장의 말처럼 그저 ‘외국인과 영어를 만나는 계기’를 만드는 게 목표다. 과학, 예술, 드라마, 방송, 멀티미디어 등 다양한 수업시간이 있지만, 이를 통해 지식을 습득하는 게 첫째 목적은 아니라는 이야기다.원어민 강사들은 미국 등지에서 학사 이상 학위를 받은 이들로 구성돼 있다. 외국인에게 영어를 가르칠 수 있는 교사자격증을 소지한 이들로 연령대도 20~50대로 다양하다. 전공별로 각자 특화교실을 맡고 있어 교육의 질도 높은 수준.엿새 동안 살아 있는 영어를 체험하는 만큼 만족도도 높다. 안산캠프가 지난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86.3%가 외국인 대면의 두려움을 해소했다고 응답했다. 또 71.2%가 다시 영어캠프에 참가하고 싶다는 의향을 밝혔다. 정팀장은 “3~4주 코스의 단기 어학연수를 다녀온 것과 진배없는 효과라는 평이 많다”면서 “최대한 재미를 살리고 구미 현지 영어의 실감을 살려 교육효과를 높이고 있다”고 밝혔다.반응이 뜨겁다 보니 가족이나 학생 개인이 참여하는 프로그램에 대한 요구도 높다. 지난해 10월부터 신설한 주말 1박2일 가족 프로그램은 40대1의 경쟁률을 기록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선착순 접수로 방식을 바꿨지만 인기는 여전하다. 비용은 1인당 3만원(다른 시도 거주자 6만원).영어마을엔 학생, 학부모뿐만 아니라 영어마을을 둘러보려는 ‘관계자’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다. 매주 화요일을 외부인 투어일로 지정하고 견학기회를 주고 있다. 3월15일 열린 투어에는 전국 지방자치단체와 학원사업 관계자 등 40여명이 참여했다. 특히 지자체의 관심이 대단해 경기영어마을은 공익목적으로 영어마을 설립할 때 자체 교육 프로그램을 무상 제공하겠다는 계획도 세우고 있다.실제로 영어마을 설립 붐은 전국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대도시에 비해 국제화 교육 여건이 떨어지는 지방을 중심으로 지자체가 앞장서 영어마을 설립에 나서고 있다. 자체 예산을 동원해 영어체험프로그램을 만드는가 하면 대학과 연계, 학교 내 시설을 영어마을 캠프로 사용하는 방안 등이 전국 곳곳에서 진행 중이다.서울시는 송파구 풍납동에 서울영어마을을 세워 지난해 11월부터 운영에 들어갔다. 초등학교 5~6학년을 대상으로 5박6일 동안 상황ㆍ학습ㆍ놀이 등 3가지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영어를 습득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참가접수는 홈페이지(www.sev.go.kr)에 개별신청 후 추첨을 통해 선정하며 참가비는 1인당 12만원.서울 강남구도 자체 영어마을 설립을 발표했다. 강남구는 최근 영어와 인성교육을 접목시킨 형태의 영어체험마을인 ‘도산 영 리더 스쿨’을 서울 근교에 짓겠다고 밝혔다. 120명이 2주간 숙식할 수 있는 규모로 영어교육뿐만 아니라 경제, 논술, 문화교실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다. 프로그램 개발을 도산기념사업회가 맡는 게 특징.이밖에 경기권에서는 인천, 하남, 화성, 성남 등도 숙식이 가능한 영어마을 설립을 검토 중이다. 성남시의 경우 분당구 율동 새마을운동중앙연수원에 영어마을을 조성하기로 결정하고 건물 2개동 1,200평을 임대 후 리모델링, 올 하반기에 개원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또 안산캠프를 운영 중인 경기도언어문화원도 내년 3월 파주캠프 개원을 비롯, 양평에도 캠프를 추가로 설치할 계획이다.INTERVIEW 칼 더스티하이머 경기영어마을 안산캠프 지부장‘자신감 심어주는 게 영어마을의 역할’프로그램을 체험한 학생, 학부모의 반응은.원어민 교사와 색다른 경험을 하면서 외국인 만나기의 두려움을 없애고 영어에 대한 흥미를 높였다는 말을 한다. 또 ‘영어로 말하는 자신감’이 생겼다는 반응이다. 굉장히 재미있어하고 흥미로워하며, 실제로 퇴소시 작성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더라도 ‘다시 오고 싶다’는 답변이 지배적이다.경기영어마을 안산캠프 개관의 의의를 꼽는다면.‘일상생활 속에서 영어를 편하게 구사하게끔 한다’는 데 설립의 의의가 있다. ‘죽은 영어’가 아니라 ‘산 영어’를 배우는 것이다. ‘수업’이 아닌 ‘놀이ㆍ체험’을 통해 영어를 받아들이게 한다. 무엇보다 재미가 있어야 한다. 학생들에게도 “여러분은 여기 뭘 배우러 온 게 아니라 즐거워지려고 온 것(You are not here for learning, you are here for fun)”이라고 말한다. 사실 일주일 동안 영어로 생활한다고 영어로 말이 술술 나오겠는가. 중요한 것은 학생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것이고 스스로 영어공부를 적극적으로 할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해주는 것이다.바람직한 영어마을 설립ㆍ운영의 조건은 무엇이라고 보는가.영어를 재미있게 즐기면서 배울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줘야 한다. 외국에 나가지 않아도 외국에 있는 것과 똑같은 환경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학생들이 새로운 경험을 통해 흥미를 갖게 만드는 프로그램의 개발, 시설과 구성원 확보 등이 전제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