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산 날린 뒤 맨주먹으로 새출발, 8년만에 길 찾기 성공

“지난 5개월 동안 일하는 재미에 푹 빠져 살았습니다.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 같았는데도 길은 있더군요. 이제는 착실하게 사업을 키워 지금의 행복을 이어가는 일만 남았어요.”서울 강남구 대치동 원룸밀집지에서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는 김정희 원장(42)은 20년 경력의 숙달된 헤어디자이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유행의 중심 서울 명동의 미용실에서 미용 경력을 쌓아 강남에서도 이름을 날렸다. 결혼 후 정착한 전북 익산에서도 선풍을 일으켰을 만큼 솜씨를 타고 났다.하지만 김원장은 지난 8년 동안 견디기 힘든 고통 속에 빠졌다가 다시 일어선, 오뚝이 같은 사람이다. 6개월 전 지금의 미용실을 다시 차리기까지의 역경은 이루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다.지난 87년 결혼과 함께 익산으로 내려간 그는 미용실을 열어 남부럽지 않은 순탄한 생활을 이어갔다. 상상도 못한 시련은 아이를 키우면서 일을 쉬었던 짧은 시간에 일어났다. 미용실을 처분한 자금 등을 동원해 새로 사업을 시작한 남편이 97년 IMF 위기와 맞물리면서 대형부도를 낸 것이다. 전재산을 날린 것은 물론 빚도 2억원이나 지게 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편과의 사이도 멀어졌다. 돈 한푼 없이 아들 둘과 남겨진 그는 당장 하룻밤 묵을 거처를 걱정하는 신세가 됐다.“갈 곳이 없어 교회 뒷방에서 석달 동안 살았어요. 모든 상황이 죽을 만큼 힘겨웠지요. 생계를 위해서 다시 미용사로 일을 해야 했습니다. 남 밑에 고용된 신세라는 게 서글펐지만 자존심을 따질 형편이 아니었어요. 아이들과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몸부림치듯 일을 했습니다.”이를 악물고 일을 한 덕분에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미용실 분점의 경영을 맡아 하루 100만원 매출을 올리는 우량 미용실로 키워내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는 정작 자신의 형편은 좋아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얼마 안되는 월급으로는 세 식구 한달 살기가 너무 빠듯했다.99년 12월, 고민 끝에 서울로 돌아가기로 했다. 결혼 전 강남에서 미용실을 해 본 경험을 떠올려 대치동 뒷골목에 자리를 잡았다. 주변에서 빌린 돈 1,000만원으로 6평 남짓한 공간을 마련했다. 아이들은 언니집에 맡겨야 했다.사업은 근근이 이어졌다. 단골고객은 차츰 늘었지만 워낙 작은 규모라서 매출은 좀처럼 늘어나지 않았다. 지난해 초, 차라리 큰 미용실에 고용되는 게 안정적이겠다는 판단으로 다시 사업을 접었다.그러나 역경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3개월 만에 미용실이 폐업을 하면서 졸지에 실직자 신세가 된 것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기막힌 상황에 맞닥뜨렸다.돌파구를 찾는 중에 근로복지공단이 눈에 들어왔다. 이전부터 틈틈이 눈여겨봐 온 여성가장ㆍ실직자 창업지원사업에 신청서를 내고 다시 미용실 창업을 모색하기로 결정했다.“전화위복이 이런 경우를 말하는 걸까요. 공단에서 보증금 4,000만원을 지원받아 지난해 9월 아담한 미용실을 개업했습니다. 한동안 웃을 일이 없었는데 오랜만에 크게 웃었지요. 딱한 상황과 열의가 지원을 받게 한 것 같아요. 예전에 그랬듯, 거리로 나가 홍보활동을 펼치고 손님에게 성심을 다하니 매출도 상승궤도에 오르더군요. 지금은 참 행복합니다.”요즘 김원장은 한달 평균 700만원선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매달 조금씩 매출이 올라 일하는 재미가 절로 난다고. 그럼에도 그는 미용실 문을 닫은 후 혼자 연습과 공부를 계속한다. 이번에는 절대 실패하지 않으리라는 굳은 결심에서다.“과거의 아픔을 돌아볼 시간이 없습니다. 그 시간에 고객서비스를 연구하는 게 백배 낫죠. 퍼머를 한 손님에게는 3일 후 전화를 해 무료 머릿결 마사지를 받도록 합니다. 틈틈이 문자메시지를 보내 인사를 하는 것도 잊지 않지요. 주위의 도움으로 새 출발을 한 만큼 늘 최선을 다해 사업에 임해야 한다고 마음먹곤 합니다.”엄마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것은 물론 신문배달로 가계를 돕는 아들들이 있어 더 행복하다는 김원장은 “앞으로 1년 안에 매출 1,500만원을 올리는 탄탄한 미용실로 키우겠다”며 작은 주먹을 쥐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