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8일은 제97회 세계 여성의 날이었다. 때맞춰 미디어마다 정치, 경제, 법조 등 전통적으로 여성의 진출이 취약했던 분야의 여성 리더들이 등장해 달라진 ‘여성파워’를 유감없이 보여줬다. 일과 사랑, 가정까지 완벽하게 쟁취한 그들을 보며 많은 이들이 감탄사를 터트렸음은 물론이다.이제 한국에서 여성은 분야를 막론하고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고위 공직, 대기업 임원 자리에 여성이 올라가고 사법, 외무, 행정, 변리사 시험 등에서 여성이 수석을 차지했다는 소식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시대다.‘여풍’은 지난 2월 각 대학 졸업식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났다. 대학마다 단과대는 물론 전체 졸업 수석도 대부분 여학생 몫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남학생 수가 월등히 많은 공대나 상경대 등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를 두고 “취업이 남학생보다 어려운 상황에서 누구보다 현실을 잘 인식하고 열심히 공부한 대가”라는 평가가 많았다.명석한 두뇌와 빵빵한 경력을 필요로 하는 전문직이 아닌 분야에서는 또 어떠한가. 평범한 여성, 특히 주부들이 활동하는 세계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세기와는 색깔이 다른 여성파워가 사회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특히 창업시장에서 여성들은 대단한 기세로 증가 일로에 있다. 수적, 질적 측면에서 남성을 압도하는 분위기다. 창업 컨설팅업체나 관련 강좌에는 늘 여성들로 넘쳐난다. 하다못해 명물 점포를 소개하는 TV프로그램에서도 여사장들이 목소리를 높일 정도다.양혜숙 한국여성창업대학원장은 “여성창업자는 특유의 섬세함과 끈기, 부지런함을 바탕으로 같은 조건의 남성보다 훨씬 나은 성과를 일구곤 한다”고 말하면서 “창업과 경영에 대한 열의도 여성이 우위에 있음을 느낄 때가 많다”고 밝혔다. 컨설팅 현장이나 강의실에서 접하는 여성사업가들의 사업능력과 관심에 종종 놀라곤 한다는 이야기다.양원장은 여성이 두각을 나타내는 이유를 “가정에서 맡은 역할이 아주 다양한 만큼, 일일이 챙기며 단속해야 하는 소점포ㆍ소기업 운영과 잘 맞기 때문”으로 풀이했다. 제 손으로 집안일을 하듯 치밀하고 꼼꼼하게 사업에 임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남성보다 훨씬 강한 경쟁력을 가진다는 것이다.예를 들어 음식점을 차릴 경우 여성 경영자는 주방과 서비스ㆍ회계 관리 등을 두루 돌볼 능력과 열의를 가지기 쉽지만, 직장 생활만 했던 남성 경영자는 역할에 제한을 받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능력에 아이디어와 차별화 전략을 가미, 성공으로 이끄는 여성 창업자가 적잖다.여성들이 ‘사업가’로 사회에 나서기 시작한 것은 IMF 위기 이후 특히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평생직장의 붕괴로 가정의 기반이 흔들리는 경험을 한 주부들이 ‘더 이상 남편에게만 가장의 역할을 맡길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창업시장 풍토도 변하기 시작했다.생계, 자아실현, 여가시간 활용 등 여성 창업의 이유는 각양각색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용감하고 명석한데다 사업을 풀어내는 능력까지 갖춘 여성들이 최근 부쩍 늘었다는 것이다.실제로 남편의 사업실패, 실직 등의 역경을 딛고 창업을 통해 사업가로 거듭난 여성들이 제법 많다. 이혼, 사별 등으로 졸지에 저소득 가정으로 전락했다가 다시 자립한 경우도 마찬가지다. 특히 극한의 시련을 견뎌내고 희망을 일궈낸 후자의 경우는 사회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인천 남동공단에서 부품가공업체를 운영하는 문유정 사장은 부도와 이혼을 연달아 경험한 후 쓰러져가는 공장을 보란 듯이 되살려냈다. 매년 매출을 올려 잡으며 직원들을 호령하는 그에게선 어떤 그림자도 찾기 어렵다.남편의 사업부도와 이혼으로 전재산을 날리고 두 아이와 남겨진 김정희씨도 오랜 시련 끝에 서울 강남의 미용실 원장으로 새 출발을 했다. 단칸방 얻을 돈도 없이 피폐했던 삶이 이제는 희망으로 피어나고 있다.식물인간 남편을 10년동안 간호한 끝에 떠나보내고 극빈층으로 전락했던 천은경 사장 역시 대형 뷔페업체 사장을 꿈꾸는 명랑한 사업가로 거듭났다. 부족한 설비와 빠듯한 자금이 늘 걸림돌이었지만, 고객만족에서 돌파구를 찾아 성공을 향해 달리는 중이다.이들의 성공 뒤에는 몇가지 공통점이 있다. 오랫동안 자신이 몸담은 분야에서 자립의 실마리를 얻었다는 점과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 품질에 대한 자신감과 서비스 차별화가 그것이다. 못 말리는 집념과 끈기는 기본사항이다. 특히 각 기관의 자금지원을 통해 회생의 기회를 마련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이들은 각각 신용보증재단, 근로복지공단, 사회연대은행에서 받은 창업 및 운영자금을 성공 디딤돌로 삼았다.이곳 외에도 여성경제인협회, 아름다운재단, 소상공인지원센터 등에서도 지원자금을 집행 중이다. 창업을 하고 싶어도 종자돈이 없거나 담보나 보증인이 없어 대출도 쉽지 않은 여성가장들이 이용하기에 적합한 제도들이다.여성경제인협회의 경우 중소기업청과 여성부 지원으로 지난해까지 총 483명에게 점포임대보증금을 지원했다. 윤지선 대리는 “연간 30억원의 자금이 소진될 때까지 지원이 계속되므로 빨리 신청하는 게 유리하다”고 말한다. 근로복지공단도 지난 99년부터 실직여성가장 자영업지원사업을 시작해 총 2,742명에 1,132억원을 지원했다. 올해는 150억원 270명 한도에서 지원이 결정된다. 또 사회연대은행, 아름다운재단 등이 펴는 ‘가난한 사람에게 소액이라도 빌려줘 자립 발판을 만들어주자’는 공익적 취지의 마이크로크레디트 사업을 통해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생계를 꾸리기 위해 일터로 뛰어든 여성을 의미하는 ‘핑크 칼라’는 앞으로도 확산될 전망이다. 더불어 성역할의 경계가 무색해지고, 독립적인 사고로 어려운 상황을 뚫으려는 여성이 늘어나 ‘여성파워’라는 차별적 표현마저 사라지는 때가 올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