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1인 교육비 월 150만원 예사…경기침체ㆍ단속 바람에도 ‘거뜬’

“아침에 문을 열면 전단지가 수북이 쌓여 있는데 대부분 학원 광고예요. 통상 신문보다 양이 많죠.”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아파트에 거주하는 한 학부모는 대치동에 학원이 몇 개나 되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하루에도 여러 곳에서 학원 설명회가 열린다는 것이다. 실제로 대치동의 상가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은 단연 학원이다.대로변에는 수강생이 1,000명이 넘는다는 대형 입시학원과 어학원이 줄지어 들어서 있고 골목마다 수학학원, 과학학원 등 보습학원과 미술학원, 음악학원, 논술학원, 창의력학원 등이 자리잡고 있다. 길가에는 수강생을 모집한다는 플래카드가 펄럭이고 있다.학원 관계자들의 말에 따르면 대치동에는 보습학원만 250여곳에 이르고 과외방, 과외교습소 등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사교육시설을 합하면 전체 학원수는 1,000여곳이 훌쩍 넘는다. 한눈에도 대치동은 ‘대한민국 사교육 1번지’라는 별칭을 얻을 만했다.새로운 교육상품 전시장그 많은 학원들이 생존할 수 있는 것은 대치동에 특별히 사람이 많이 살아서는 아니다. 학부모들의 교육열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영어는 기본 중의 기본이고 기타 교과과정 학습과 예체능학원에도 보낸다. 한 어학원의 부원장은 “4~6개의 학원을 다니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어서 1인당 교육비가 줄잡아 150만원에 이른다”고 말했다. 최근 인기를 모으고 있는 영어유치원의 경우 한달 수강료가 150만원에 달하는 곳도 있다.하지만 중학교 2학년에 이르면 대부분 입시위주로 학원 스케줄을 조정한다. 본격적인 입시준비에 들어가는 것이다. 실제로 대치동 학원의 상당수는 입시학원이었다.학부모들은 ‘잘한다’는 학원을 찾기 위해 학원 설명회를 찾아다니고 정보를 교류한다. 이 과정에서 ‘리더 엄마’(일명 돼지엄마)들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전문가 뺨치는 정보력을 바탕으로 다른 엄마들을 몰고 다닌다. 이들 중에는 학원의 ‘상담실장’을 맡는 엄마도 있다. 아이가 진학한 후에는 직접 학원을 차리는 경우도 있다.대치동 학원의 수강생들은 대치동 주민만이 아니다. 잠실, 수서, 일원, 분당 등 인근지역에서 학원 유학을 오는 학생들도 상당수다. 방학 중에는 전국에서 학생들이 몰려든다. 대치동 학원의 명성은 그만큼 높다.학생과 부모들의 기대치가 높은 만큼 대치동에 신규진입하는 학원이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다른 지역에 비해 긴 시간과 남다른 노하우가 필요하다. 반면 교육열이 높기 때문에 새로운 교육법에 대한 관심도 높다. 대치동에서 주목받지 못하면 다른 곳에서도 성공할 수 없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도는 것도 같은 이유다. 이에 따라 대치동은 새로운 교육상품의 전시장이며 시험무대로 여겨진다.지금까지 ‘사교육 1번지’의 명성을 누려오고 있지만 최근 대치동 학원가에는 불안한 기운이 감돈다. 번영의 시대가 가고 구조조정의 시대가 오고 있다는 우려가 높다. 지난해부터 본격화된 정부의 사교육 단속이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한 학원장은 “오후 10시 이후 수업 금지, 수강료 상한가 제도 등 사교육에 대한 정부의 ‘전쟁 선포’로 수강생 모집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학원가의 성수기라고 할 수 있는 지난 겨울방학에는 학생수가 60~70%까지 급감한 곳도 있고 수강생이 모자라 아예 폐업을 한 학원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실제로 인근 부동산중개소에서 학원 매물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학원 매물은 중개소를 통하기보다 알음알음 이뤄지기 때문에 실제로 폐업한 학원은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고 이 원장은 말했다.“겉으로 보면 달라진 것이 없죠. 학원을 내놓으면 즉각 다른 사람이 인수하기 때문에 학원수에는 큰 변동이 없으니까요. 대치동 교육시장에 대한 기대가 완전히 꺾이지는 않은 셈이죠. 하지만 한 꺼풀 벗겨보면 존폐의 기로에 선 학원이 하나둘이 아닙니다.”보습학원을 운영하는 한 원장의 진단도 다르지 않았다. 정부의 단속이 대치동에 집중돼 차라리 수도권 신도시지역으로 학원을 이전하는 것이 낫다는 견해가 고개를 들고 있다고 이 원장은 전했다. 실제로 얼마 전까지 교육부 관계자들이 상주하다시피 하며 학원가 단속에 열중했다는 것이다.반면 정부의 강한 단속으로 대치동 학원가가 위협받고 있다는 말은 ‘엄살’에 불과하다고 일축하는 관계자도 있다. 악재임에는 분명하지만 ‘생존’을 위협할 정도는 아니라는 말이다. 경쟁력이 떨어지는 학원이 문을 닫는 사례는 예전부터 있어왔고 특별히 최근에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지적이다.또 학원비 가이드라인이 있기는 하지만 학부모와 협의를 통해 학원비를 인상하거나 강의시간을 늘려 수강료를 올리는가 하면 오후 10시 이후에도 버젓이 수업이나 자습을 시키는 학원도 적지 않다고 이 관계자는 전했다. 고등학생 자녀를 둔 한 학부모도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했다.“오후 10시 이후 수업을 금지하면서 학원비가 올랐어요. 야간수업을 하지 못해 학원운영이 어려워져 학원비를 올릴 수밖에 없다고 하더군요. 전에는 15만원 정도이던 학원비가 20만원선으로 인상됐습니다.”경기침체도 대치동 학원가의 위협요소로 지목된다. 서울에 비해 불황의 영향을 많이 받는 지방학생들이 줄고 있다고 학원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교육을 위해 대치동으로 이사를 하는 사례도 눈에 띄게 줄었고 방학이면 몰려들던 지방학생들도 지난 겨울방학에는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대치동 학부모들 중에도 교육비를 줄이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하지만 대치동 부모들의 변화에 대해서도 관계자들의 의견은 엇갈렸다. 살림살이가 다소 빡빡해졌다고 교육비를 줄일 학부모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학부모들이 전문직에 종사하는 고소득자이기 때문에 교육비를 줄일 정도로 어려워진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란 말이다.“사교육 단속이 심한데 잘된다고 얘기할 수 없잖아요. ‘안된다, 안된다’ 말하지만 실제로는 별다른 변화는 없습니다. 다만 외부에서 들어오는 수강생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죠.”인터넷 수능교육의 확산도 수강생이 줄어드는 요인으로 꼽힌다. 학원에 의존하기보다 스스로 공부하는 게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늘고 있는데다 이에 동의하는 부모들도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학원의 수입감소는 교육의 질 저하로 이어질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강사료가 떨어질 수밖에 없어 능력 있는 강사들이 보다 조건이 좋은 지역으로 빠져나갈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아직은 다른 곳에 비해 강사진이 우수하지만 언제 상황이 역전될지 알 수 없다는 우려다.“강북에서 이사를 온 한 학부모가 ‘강북보다 대치동 학원비가 싸서 놀랐다’는 말을 하더군요. 이런 학원으로 우수한 강사진이 이동할 것은 뻔한 일 아닙니까.”또 다른 관계자는 대치동 학원가의 구조 자체가 강사의 질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예전에는 강사의 강의능력이 학원을 선택하는 유일한 기준이 됐지만 최근에는 강사의 질보다 ‘시스템’을 내세운 대형학원이 득세하고 있다는 것이다. 강의시간을 늘린다든가 과제를 많이 내주는 식의 ‘관리’를 통해 성적을 올리는 학원이 늘면서 ‘강의능력’이라는 잣대가 약화되고 있다는 지적이다.이에 따라 대치동 학원가가 관리형인 대형학원과 강의능력을 앞세운 소형학원으로 양극화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이도저도 아닌 중형학원은 설자리를 잃을 것이란 분석이다.학부모들 역시 교육의 질 저하를 염려하고 있었다. 정부가 억지로 학원비를 묶는 바람에 애꿎은 학생들만 피해를 입게 생겼다고 주장한다. 학원측이 편법으로 학원비를 올려도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란 설명이다.하지만 좋은 강사를 찾아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모습은 거의 사라졌다고 관계자들은 말한다. 유명강사의 전성시대는 이미 지났다는 설명이다. 한 학부모는 “대개 강사진의 실력이 좋은데다 아무리 좋은 강의를 해도 학생과 ‘궁합’이 맞지 않으면 효과가 없기 때문에 한번 자리를 정하면 1년 정도는 그대로 다니는 학생이 많아졌다”며 “학원 설명회에 참석하는 사람도 줄었지만 참석한다 해도 학원을 옮기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고 말했다.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치동 학원가에 변화가 올 것이란 전망에는 관계자들이 대개 동의한다.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바뀔지를 확신하는 관계자는 거의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1학기 중간고사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변화가 시작될 것이란 점이다. 인터넷, 대형학원, 그룹과외 등 학기초 선택한 교육방법의 성과에 따라 학원들의 명암이 엇갈릴 것이란 관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