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스타 인기몰이 불구 열기 내리막… 비즈니스화도 실패

지난 2001년 여름 어느 날. 기자는 취재차 중국 후난(湖南)성을 방문했다. 후난성 성도 창사(長沙)에서 기차를 타고 10시간 정도를 더 달려 도착한 곳 지쇼우(吉首). 말이 현(縣)급 도시지 제대로 된 자동차조차 보이지 않는 시골마을이었다. 저녁식사 시간. 기자가 한국인임을 안 식당 여종업원이 다가와 “안자이쉬(安在旭)를 아느냐”고 물었다. “잘 모른다”는 대답에 그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한국인이 그렇게 유명한 가수를 어떻게 모를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그녀는 한국음악을 매우 좋아한다고 했다. 즉석에서 안재욱의 히트곡 ‘포에버’(forever)를 거의 완벽할 정도의 한국어 발음으로 불렀다. 대중음악과 담을 쌓고 지냈던 기자는 ‘포에버’를 그때 중국 시골마을에서 처음 들었다. 당시 중국에서 불고 있는 한류(韓流)를 실감했다.한류에 관한 한 중국은 ‘원조’라고 할 만하다. 2000년 2월 베이징의 공인체육관(工人體育館)에서 HOT 공연이 열렸다. 젊은이들이 공연장을 가득 메웠고, 공연은 크게 히트를 했다.중국 학생들은 어지간한 노래는 모두 따라불렀다. 그 이튿날 중국언론에 ‘한류’(韓流)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했다. 이 공연을 기획했던 베이징의 우전소프트 김윤호 사장은 덕택에 ‘한류 대부’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 중국에 과연 한류는 얼마나 존재하고 있고, 또 얼마나 성공했는가. “성공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게 베이징, 상하이 등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류 비즈니스 관계자들의 중론이다. 중국에서 한류가 뚜렷한 문화현상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지 못했다는 얘기다. 한류의 원조 중국에서 한류가 시들해지고 있는 것이다.무엇이 문제인가. 그 이유를 추적해 보면 현재 일본, 동남아 등지에서 불고 있는 한류의 발전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전문가들은 우선 한류에 대한 개념을 명확하게 정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중국에서 한류는 드라마, 음악, 영상 등 대중문화에서 시작됐다. 한류를 ‘단순한 대중문화’에 국한해 본다면 지금 중국에는 예전과는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어느 정도의 한류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영화배우 장나라, 김희선 등이 여전히 인기를 누리고 있고 최근에는 가수 비가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그러나 한류의 개념을 ‘단순한 대중음악을 넘어선 한국의 문화, 한국적인 것’으로 확대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대중음악 이외의 한국문화가 중국에서 아직까지는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다는 얘기다. 뮤지컬, 연극, 음악회 등 다소 고급에 속하는 문화활동의 경우 중국에서 여러차례 공연이 있었지만 대부분 실패했다. 중국인을 끌어들이지 못한 것이다. 연극 <기차역>,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 리틀엔젤스의 한국 고전음악 등의 공연장은 중국 거주 한국인이 자리를 지켰을 뿐 중국인은 많지 않았다. 결국 중국에서의 한류는 대중문화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한 것이다. 그게 한류의 한계였다.한류가 정착하지 못한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한탕주의’ 때문이다. HOT 공연이 성공하자 한국의 음악기획사들이 떼지어 중국으로 몰려왔다. 기획사들은 베이징에 사무소를 차리기도 했다. 이들은 경쟁적으로 공연을 기획했다. 베이징에서는 1년에 5차례 이상 한국가수 공연이 벌어지기도 했다. 공연은 부실해지기 시작했다. 공연장조차 잡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공연입장권을 판매, 결국 ‘사기꾼’이라는 비난을 받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중국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하지 않고 기획된 공연은 그나마 형성되던 한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국가이미지 악화도 영향우전소프트의 김윤호 사장은 “보다 체계적인 중국 문화시장 접근이 필요했다”며 “당시 우리는 한국 대중음악의 우월감에 빠져 기획만 하면 소비자들이 몰려올 것으로 착각했다”고 말했다. 보다 체계적인 중국 문화시장 접근이 필요했다는 얘기다. 그는 “한류를 단순한 이벤트가 아닌 종합 비즈니스의 차원으로 접근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한다.우리는 ‘한류의 비즈니스화’에도 서툴렀다. 한류를 단순한 문화의 영역에서 끌어내 기업활동과 연결시키는 작업이 부족했다는 지적이다.물론 우리나라 상품의 이미지 개선에 한류가 어느 정도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중국에서 삼성 애니콜, 현대자동차 등이 급속하게 시장을 넓혀간 데는 한류의 도움이 컸다. 중국의 어지간한 한국식당에는 한류스타의 사진이 걸려 있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한류를 기업의 한 경영자원으로 인식, 기업활동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데는 한계를 보였다. 한류의 주 대상층인 중국 청소년들의 구매력이 낮다는 이유에서다.KOTRA 중국본부의 박한진 차장은 “우리나라 기업들은 한류를 단순한 청소년들의 유행쯤으로 해석, 이를 비즈니스와 접목하지 못했다”며 “많은 기업이 한류를 단순한 눈요기 행사로, 또는 손님 끌기에 활용하는 수준에 그쳤다”고 말했다.이런 점에서 중국의 대표적인 IT업체인 TCL의 사례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가전제품에서 시작한 이 회사는 3년여 전 휴대전화시장에 진출했다. 휴대전화의 인지도를 어떻게 끌어올릴지가 문제였다. 이 회사는 당시 한류스타로 인기를 끌었던 영화배우 김희선과 거액의 모델계약을 맺었다. 김희선은 무명에 가까웠던 TCL 휴대전화를 중국 최고의 브랜드로 끌어올리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그러기에 ‘한류의 가장 큰 수혜자는 TCL’이라는 얘기가 나온다.콘텐츠에도 문제가 있었다. 중국인을 끌어들일 수 있는 한류 콘텐츠가 지속적으로 생산되지 못해 한류가 단절되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대중음악이 대표적인 사례다. HOT 세대 이후 중국 청소년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강력한 한류 상품은 드물었다. 중국에서 해체된 지 오래된 HOT가 아직도 인기를 끄는 것이 이를 반영한다.우전소프트 김사장은 “한류 비즈니스의 성공여부는 결국 콘텐츠에 있다”며 “중국인을 끌어들일 수 있는 높은 수준의 문화 콘텐츠를 끊임없이 개발하지 않는다면 한류는 곧 시들어버릴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드라마와 영화부문에서 우수 콘텐츠가 나왔다. 그러나 중국에서의 영상분야 한류 상품은 일본에서와는 달리 반응이 빨리 나오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배용준 상품’ 하나로 커다란 금전적 효과를 봤지만 중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한국영화는 불법 DVD 제작업체들의 배만 불렸을 뿐이다. 영상부문 콘텐츠가 한류 비즈니스로 전환되기가 어려웠다는 얘기다.중국에서 한류가 시들해진 것은 국가이미지와도 관련이 있다. 중국 청소년들이 초기 한국음악에 끌린 것은 음악 그 자체도 있겠지만 한국이라고 하는 독특한 국가이미지가 받쳐줬기 때문이었다.금 모으기를 통해 IMF 외환위기를 극복한 나라, 세계 4강의 막강 축구, 국산 자동차만 타는 애국심 등 한국의 이미지가 한류의 원동력이었다는 얘기다.그러나 최근 들어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훼손되면서 한류의 파괴력도 떨어지고 있다. 중국 학생들에게 한국은 이제 대통령탄핵, 이라크 인질, 일부 중국 거주 한국인들의 불손한 행동 등으로 기억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국가적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한류는 직접적인 효과보다 간접적인 효과가 크다. 한류의 가장 큰 수혜자는 역시 중국에서 제품을 판매하는 우리나라 기업이다. 기업이 한류 문화사업을 지원, 육성해야 할 이유다. 한류를 단순한 이벤트가 아닌 장기적인 관점에서 경영의 한 자원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