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은 회사, 팀장은 사장… ‘가상화폐’ 많이 벌면 1등

“족발! 족발! 족발!”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이 몰아친 지난 1월12일. 경기도 이천의 설봉산 자락에서 20대 젊은이들이 ‘족발’을 목이 터져라 외쳐댔다.이 낯선 이방인들은 신입사원 연수를 받고 있던 SK의 신입사원들. 1월4일 시작된 그룹연수 프로그램 가운데 어렵기로 악명 높은 ‘산악패기훈련’을 받고 있었던 것. 여기서 울려 퍼진 ‘족발’ 구호는 연수에 참가한 한 팀의 개성 넘치는 구호였다. 이 팀에 질세라 다른 팀들은 “아싸아싸아싸 11조, 패기패기 SK!”, “파도, 야아!” 등의 구호를 연이어 외쳐댔다. 특히 이날은 산악패기훈련에 동참한 기자의 취재용 볼펜잉크가 얼어붙을 정도로 추웠지만 신입사원들 얼굴은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취업난의 긴 터널을 쉬지 않고 달려와 대기업 입사를 이뤄냈기 때문일까.SK 계열사 신입사원 682명 가운데 이날 산악훈련에 참가한 인원은 340여명. 회사측은 682명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1기와 2기로 나눠 연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설봉산을 찾은 1기는 그룹연수부터, 2기는 계열사 연수부터 받았다. 이날 산악훈련을 한 1기 연수생들은 용인 소재 SK아카데미에서 새벽같이 일어나 이천으로 이동했다. 오전 7시부터 산행에 들어간 이들은 오전 일정 마감시간인 오전 11시50분 전까지 산 아래 본부로 내려오기 위해 산길을 뛰어다녔다.이들은 단순히 산을 오르내리는 체력단련만 하고 있던 게 아니었다. 각팀은 모두 한개의 회사라는 가정하에 ‘가상게임’을 하고 있었다. 산행을 하면서 재료를 구입해 물건을 만들고 이를 시장에 내다파는 시장경제 시스템을 트레이닝하고 있던 것.훈련코스인 설봉산과 왕배산에는 각각 9개, 총 18개의 지점이 마련돼 있었다. 먼저 각 지점을 지키고 있는 교관(교육하는 SK아카데미 직원)이 ‘시장’(Market) 역할을 한다. 9개 지점 가운데 6개 지점의 교관은 물건 구매자고, 3개 지점 교관은 물건 판매자다. 산행에서 빠른 속도를 자랑하며 각 지점에 가장 먼저 도달한 팀은 물건을 만들 수 있는 재료를 가장 싸게 살 수 있다. 그후에 도착하는 팀들은 도착 순서에 따라 2,000원씩 비싸게 물건을 사야 한다. 첫 번째 도착한 팀이 재료를 4만8,000원에 샀다면 두 번째 팀은 5만원에, 세 번째 팀은 5만2,000원에 사는 식이다. 재료 2개를 구매하면 완제품을 만든 셈으로 친다. 완제품을 되팔 수 있는 지점에 가장 먼저 도착한 팀이 해당 지점의 교관에게 다른 팀보다 비싸게 물건을 팔 수 있다. 산행을 끝마친 후 돈을 많이 번 팀이 1등팀이 된다.‘5-알파’팀의 SK텔레시스 신입사원 김미순씨는 “각팀의 팀장은 사장이고, 재무담당자도 정한다”고 설명했다. 김씨는 ‘5-알파’팀의 재무담당자였고, ‘5-알파’의 ‘사장’은 SK CNC 신입사원인 권재성씨. 권씨는 전날 SKMG라는 경영전략 프로그램에서 쓰러져가는 회사를 살려내 이날 팀에서 사장으로 뽑혔다.산악훈련에서 가상머니를 많이 벌어 1등이 된 팀은 부상으로 MP3플레이어 등을 받게 돼 있었다. 신입사원들은 상품도 상품이지만, 사회 첫발부터 기업의 수익구조와 재무구조를 체험할 수 있어 승부욕으로 가득 차 보였다.기다리던 점심시간. 본부로 내려온 신입사원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화장실부터 가야 한다”고 급히 내려온 사람부터 발에 쥐가 나 마사지하는 사원까지 유니폼은 같아도 반응은 모두 달랐다. 식판을 땅바닥에 놓고 식사하던 이들은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다며 산행전략을 토론하고 있었다. 잠깐의 단꿈 같은 휴식을 뒤로하고 신입사원들은 오후 1시 다시 훈련에 들어갔다.다시 시작된 산행길은 파스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여기저기서 “힘들어요”라고 소리치는 팀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를 되받아 “조금만 참아요”라고 토닥이며 손을 잡아끌고 올라가는 사원들도 많았다. 밀어주고 끌어주는 신입사원들 사이로 찬란한 우정의 햇살이 지나갔다.“사장이 사라졌다!” 오후 1시40분, 설봉산 중턱에서 만난 ‘12-베타’팀은 망연자실한 채 어찌할 바 모르고 있었다. 이들은 길을 찾으러 선발대로 떠난 사장, 즉 팀장과 헤어진 상태였다. 지도는 이미 팀장이 갖고 떠났던 터. 팀장과 헤어진 위치를 지키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한 이들은 초조해하면서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이 팀의 이호준씨는 “우리 팀은 휴대전화 회사로 설정했는데 더 이상은 설명하지 않겠다”며 “우리 팀의 기밀이 다른 팀으로 새어나가면 절대 안된다”고 경쟁심을 불태웠다. 화제를 돌려 다음날 개최될 장기자랑 준비상황을 물어보자 이 팀의 변정효씨는 “혼성그룹 코요태의 노래 ‘빙고’와 가수 춘자의 노래와 춤을 연습하고 있다”고 말하며 환히 웃었다.이노종 SK아카데미 원장은 “해마다 장기자랑 실력이 놀라워진다”며 “요즘 젊은 사원들은 춤과 노래 또한 프로급이다”고 감탄했다. 이원장은 “사실 산악패기훈련은 80년대부터 있었다”며 “그당시에는 서울 아차산에서, SK아카데미가 경기도 용인에 자리잡은 이후에는 이천 설봉산에서 열렸다”고 말했다.정해광 SK아카데미 과장은 “예전에는 예절 등을 강조하는 교육 위주였는데 최근 들어 SK 경영철학과 문화를 익힐 수 있는 체험학습 위주로 바꾸었다”면서 “오늘 열린 산악훈련은 SK의 인재상 가운데 하나인 ‘패기’를 가르치는 체험 프로그램”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SK의 인재란 패기, 경영지식, 외국어 등 경영 관련 지식, 우호관계, 사교자세, 가정ㆍ개인 관리법을 제대로 갖춘 사람을 말한다. 산악패기훈련 외의 다른 체험코스들은 사회봉사활동과 SK경영법 토의, SK 울산공장 방문, SK나이츠 농구경기 응원 등이다.11일간의 연수원 생활이 막을 내리는 날에는 4시간 동안 ‘회장과의 대화’가 마련된다. 이 프로그램은 고 최종현 SK 회장 때부터 시작돼 손길승 전 회장, 최태원 회장에 이르기까지 대를 이어 열렸다. ‘회장과의 대화’를 물려받은 최태원 회장의 경우 사전 질문지 없이 즉석에서 질문받는 것을 더 선호한다. 신입사원들은 궁금한 부분은 숨기지 않고 최회장 개인신상에 관련된 당돌한 질문도 마다하지 않는다.같은 날 이천의 다른 장소에서는 SK의 또 다른 신입사원 연수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천IC 인근에 위치한 ‘SK 미래경영연구원’에서는 SK텔레콤 66명의 신입사원이 교육을 받는 중이었다. SK텔레콤은 134명의 신입사원을 한번에 교육하지 않고 반으로 나눠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절반은 먼저 그룹 전체연수를 받게 하고, 나머지 반은 SK텔레콤 계열사 연수부터 받게 했던 것. 오후 2~3시 ‘선배사원과의 대화’가 진행되던 304호에서는 최동호 SK텔레콤 사회공헌팀 과장과 8명의 신입사원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최과장은 ‘노조활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등 새내기 사원의 질문에 차분히 답했다.미래경영연구원에서 사원연수를 진행하던 박태현 SK텔레콤 과장은 “신입사원 전원을 앉혀놓고 강의하는 프로그램은 아예 없다”며 “팀단위의 자율적 과제 수행을 통해 문제해결 능력과 팀워크를 키운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