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철강 부도에 이어 삼미특수강, 진로그룹 기아자동차 등이 줄줄이 쓰러지던 1997년, 한국의 경제관료들은 “우리 경제의 펀더먼털(Fundamental)이 튼튼하기 때문에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러나 이런 낙관론과는 달리 그해 연말의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사태는 한국경제의 고도성장 신화에 종언을 고하게 만들었다.이후 우리 경제는 다양한 개혁과 변화를 통해 경제의 틀을 바꾸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지만 상황은 쉽게 나아지지 않고 있다. IMF 관리체제 조기졸업이라는 성과를 채 음미하기도 전에 다시 벤처거품 붕괴, 신용불량자를 양산한 신용카드 대란 등이 불어닥쳐 우리의 구조조정 노력과 경제개혁이 얼마나 어설펐는지를 깨닫게 만들었다.LG경제연구원의 조용수 연구위원은 정부정책 가운데 “60년대 이후 수출주도 성장전략이 가장 성공적이었던 반면, 90년대 초중반의 무분별한 금융시장 규제완화와 개방은 외환위기를 초래했다”고 평가한다.혼돈시대(1945~1960) : 준비 없이 해방을 맞은 한국경제는 식민지배 청산과 새로운 자본주의 경제시스템 도입이라는 중대한 과제를 않고 출발했지만, 정정 불안과 자생력 결여로 미래가 암울한 상황이었다. 특히 미국과 소련간의 냉전체제에서 비롯된 6ㆍ25전쟁은 한국경제에 씻기 어려운 타격을 입혔다. 당시 경제적 피해는 68억4,000만달러로 53년 우리나라 연간 GNP 40억8,000만달러의 1.7배에 달하는 규모였다. 54년부터 61년까지 미국에서 받은 원조 규모가 20억8,800만달러에 달할 정도로 자립경제 기반에 엄청난 타격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57년 이후 해외원조가 급감하면서 경제성장률 둔화, 물가폭등, 실업급증 등으로 경제상황이 계속 악화된다. 이런 혼란은 결국 4ㆍ19혁명에 이어 5ㆍ16군사혁명에 이르는 한 원인이 된다.고도성장기(1962~1979) :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으로 시작된 3공화국은 경제개발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착수했다. 이 시기의 특징은 외국차관 도입을 통해 대규모 개발사업을 벌임으로써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고, 공업기반을 닦아 수출중심의 경제성장을 꾀한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또 새마을운동을 통해 국민의 근로의식을 일깨우고 사회분위기를 일소하는 등 경제 전반에 걸쳐 국가가 강력한 통제력을 발휘했다. 62년 울산공업지구 설정, 69년 마산수출자유지역 설치, 70년 포항제철 기공과 경부고속도로 개통 등이 이 같은 국가주도의 성장전략에 따른 것이었다.그러나 수출위주의 경제팽창 과정에서 70년대 초에 사채 누적으로 기업 재무구조가 악화되는 등 불균형이 발생했다. 70년 제조업의 타인자본 의존도가 77%에 이를 정도였으며, 71년에는 차관도입 민간기업 147개 가운데 26개가 부실화되는 지경이었다. 정부는 이에 기존의 채권채무관계를 무효화하는 8ㆍ3긴급조치를 선언하고 기업공개촉진법을 제정해 증권발행 시장을 육성하기 시작했다. 8ㆍ3긴급조치는 이후 금융시장에 대한 정부의 무제한적인 개입을 허용하는 계기가 됐으며, 이 때문에 한국경제의 고질병인 관치금융이 고착화됐다.정부는 73년부터 81년까지 96억달러를 투자해 우리 경제를 경공업 중심에서 중화학공업 위주로 바꿔간다는 중화학공업육성계획을 발표하고, 철강, 조선, 화학, 기계산업에 대대적인 지원을 퍼부었다. 창원공업단지, 울산 현대조선소, 거제 대우조선소, 구미전자단지, 울산석유화학단지, 여천석유화학단지 등이 이때 조성됐다. 그 결과 80년 전체 부가가치 창출액 가운데 중화학공업 비중이 51.4%에 달하는 등 산업구조가 고도화되는 성과를 냈다.반면 재벌의 성장과 함께 부의 편중화가 심화되고, 특히 차입경영을 통한 무차별 중복투자를 통한 외형성장 전략이 한국경제의 동맥경화 현상을 초래한 것도 이 시기 정부주도형 성장전략이 낳은 결과다.개방과 갈등의 시대(1980~1991): 지난 80년 무력으로 집권한 신군부는 고도성장에 따른 각종 부작용을 해소한다는 명분하에 ‘경제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천명한다. 그러나 이 시기의 경제정책은 3공화국 때보다 더욱 강압적으로 집행돼 정부의 장악력과 재벌 폐해를 오히려 부추기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제5공화국은 물가안정과 수출지원 축소, 중화학 투자조정 등을 단행했다. 특히 강압적으로 이뤄진 중화학 투자조정은 공장 가동률이 크게 떨어진 화학(80.3%), 기초금속(71%), 기계(53.1%) 등의 설비를 정부 계획에 따라 통폐합하거나 축소해 산업경쟁력 회복에는 도움이 된 반면, 산업에 대한 정부개입을 강화하고 민간기업의 시장진입을 가로막는 폐해를 낳았다.85년부터 시작된 3저(저금리, 저유가, 저달러) 현상으로 경제는 다시 고속성장을 할 수 있었지만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를 소홀히 함으로써 90년대 이후 물류비용 상승 등의 부작용이 초래된다. 또 각종 관세 및 비관세장벽을 통한 보호무역에 대한 통상압력이 거세지기 시작하면서 대외적으로 관세정책 개혁을 통한 시장개방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금융기관 민영화, 불공정거래 감시강화, 규제완화 등의 개혁조치를 시도했다.이 시기는 특히 민주화에 대한 요구로 사회 전반에 걸쳐 갈등이 심화됐으며 6ㆍ29선언 이후 폭발적인 노사분규는 제조업의 생산기반을 약화시키는 한 요인이 됐다. 노동조합수가 87년 2,472개에서 89년 말 7,883개로 늘었으며 80~86년에 200여건이었던 노사분규가 87년에는 3,749건으로 늘어날 정도였다. 87년 이후 10년 만에 월평균 임금이 3.8배 상승하고, 연평균 임금상승률(14.3%)이 노동생산성 증가율(10.4%)을 웃돌면서 제조업의 인건비 부담이 심화돼 국내 산업공동화 현상의 원인이 되고 있다.개혁의 실패(1992~1997) : 민간인 출신 대통령의 집권으로 시작된 92년 이후의 개혁시대는 경제정의 실현과 한국경제의 세계화 등을 기치로 내걸고 다양한 개혁조치에 착수했다. 특히 금융 및 부동산 거래실명제를 도입하며 자본편중 및 정경유착 등의 고리를 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다. 또 신경제 100일 계획과 규제개혁안을 발표하고 정부조직 개편, 금융개혁 등을 단행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정부는 업종전문화 정책과 세계화 선언 등을 내놓으며 글로벌 경제에 부응하는 개방형, 민간주도형 경제체제 수립을 의욕적으로 밀어붙였지만 구체적인 성과보다는 전시성, 선언성 정책남발에 그쳐 오히려 정부 신뢰만 떨어뜨리고, 경제의 부실화를 빠르게 진행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김영삼 정부 집권말기인 97년 한보철강을 시작으로 진로, 기아자동차 등이 잇달아 무너지면서 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을 요청하는 사상 초유의 위기를 맞았다.위기의 극복과 재도전(1998~현재) : IMF 관리체제 극복이라는 과제를 안고 출범한 김대중 정권은 금융시스템 정비, 기업구조조정 마무리, 노동개혁, 공공부문 개혁 등을 목표로 내걸었다. 당시 정부는 IMF의 권고를 받아들여 금융 구조조정과 기업 구조조정을 통해 시장질서를 확립하면 대외신인도가 높아져 외국자본을 유치할 수 있으므로 경제가 회생된다는 정책을 취했다. 또 구조조정 과정에서 발생하는 실업문제도 근본적인 기업 경쟁력 강화와 창업증가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방식을 취했다. 이 같은 조치를 통해 대외신인도 제고와 금융시장 안정이라는 목적은 달성한 반면, 과도한 공적자금 투자에도 불구하고 잔존 부실 처리문제가 여전히 남아 있으며, 산업별로 명암이 극명하게 교차하는 등의 부작용이 발생한 것도 사실이다. 특히 고용불안감의 지속과 소비양극화 등은 사회갈등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신용카드 정책을 비롯해 경기부양을 위한 과도한 시책은 나중에 신용불량자 양산과 부동산가격 폭등 등의 파장을 낳았다.전영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IMF 사태 이후 그동안 한국경제의 발전을 가능하게 했던 정부 리더십과 대기업체제, 노사협력의 장점까지 부정하는 경향이 강해졌으며 이에 따라 기업의 투자의욕 상실, 소비위축과 사회분위기 침체 등이 확산됐다”고 지적했다.한편 참여정부 들어서는 과거청산을 위한 4대 개혁입법 등 정치적 이슈가 현재 경제이슈를 압도하고 있는 가운데 정부정책의 불확실성으로 경제주체들이 자신감을 상실한 것이 문제로 지적된다. 부동산 투기 억제와 공정거래법 강화 등을 추진하면서 ‘성장과 분배’ 논쟁까지 벌어지고 있는 것이 이 같은 불확실성을 가중시키고 있다.민경휘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원은 “국민의 정부 시절의 각종 정책을 통해 위기극복에는 성공했지만 과도한 인위적 경기부양책의 여파로 최근의 내수부진이 초래됐다”고 진단했다. 또 참여정부 이후 현재의 경제상황에 대해서는 “정부정책의 불확실성과 분배중시 철학으로 인해 대기업들이 투자를 기피하는 것이 최대의 문제”라고 지적했다.정부 주도의 강력한 성장모델이 효력을 상실한 지금, 새로운 정책방향에 대한 국민적 컨센서스를 형성하지 못한 채 혼란스러운 시험과 파괴가 되풀이됨으로써 한국경제의 앞날이 아직은 흐리기만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