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전체 수출액의 15% 차지…세계 1등제품 8개 보유

1974년 12월6일. 이날은 삼성이 파산 위기에 처한 한국반도체를 인수한 날이다.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건희 회장(당시 동양방송 이사)이 사재를 출연, 인수했다. 1974년은 1차 오일쇼크의 영향으로 전세계적으로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한 시기. 세계적 반도체기업인 페어차일드가 인원을 감축하고 인텔이 생산시설을 축소하는 등 사업전망이 어두웠지만 이회장은 두말 없이 밀어붙였다.삼성전자는 반도체사업으로 지난 30년간 매출 110조원, 이익 29조원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또 반도체산업은 94년부터 국가 수출의 10% 이상을 차지하며 80~90년대 고속성장을 이끈 중추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반도체 하나만으로도 이미 삼성전자는 ‘국가경제에 가장 크게 이바지한 기업’을 묻는 설문조사에서 선두권에 오르는 성적을 거둔 셈이다.하지만 반도체는 삼성전자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반도체 이외에도 TFT-LCD, 휴대전화 등이 세계시장에서 1~2위를 다투며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다. 2003년 한해 동안 수출로 34조2,000억원을 벌어들였다. 국가 전체 수출액 240조원의 14.8%를 차지하는 금액이다.대다수 기업들이 투자에 인색한 가운데 삼성전자는 2003년 3조5,294억원의 연구개발비를 사용했다. 이는 463개 상장사 전체 투자액의 40.1%에 해당하는 수치다.2004년에도 3분기까지 3조2,900억원의 연구개발비와 5조9,400억원의 시설투자비를 쏟아부어 ‘마른 땅의 단비’ 역할을 했다.삼성전자는 69년 1월13일 설립됐다. 72년 출시한 TV, 냉장고 같은 가전제품으로 성장기반을 구축했으며 74년 한국반도체 인수를 통해 일대 전기를 마련했다.88년 11월 삼성반도체통신주식회사를 통합해 오늘의 삼성전자로 거듭나게 됐다. 89년에는 컴퓨터 부문을 신설해 가전ㆍ정보통신ㆍ반도체ㆍ컴퓨터 4개 부문을 축으로 종합전자업체의 틀을 갖춘다.93년 이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선언 이후 ‘월드 베스트 전략’을 적극 추진해 현재 D램, S램, TFT-LCD, 모니터, VCR, 컬러TV, 플래시메모리, LDI 등 8개 제품이 세계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국내 산업계에서 기록제조기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것이다.특히 반도체, 휴대전화, LCD의 성공은 삼성을 소니, 인텔 등 세계적인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계기가 됐다.이들 제품의 성공과정을 살펴보면 ‘적기에 제품을 내놓고 시장을 선점’하는 전략이 성공했음을 알 수 있다. 이회장이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누누이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타이밍은 변화 유연성이 뛰어나야 하는데, 삼성전자는 이 점에서 강점을 갖고 있다. 삼성전자의 제품구상에서부터 출시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5개월 정도로 일본 경쟁업체들에 절반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반도체 성공도 그렇다. 인수 당시만 해도 불모지나 다름없었지만 미래를 내다보고 10여년간 꾸준히 기술개발, 인력육성, 생산노하우 등을 쌓았다. 그리고 때가 되자 과감하게 밀어붙였다. 이렇게 해서 92년 세계 D램 시장 1위, 93년 메모리 분야 세계 1위, 95년 S램 세계 1위에 올라 세계 메모리반도체 1위 기업으로 부상한 것이다. 특히 94년 일본, 미국에 앞서 256M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해 반도체사업 20년 만에 기술 측면에서도 앞서나가게 된다. 90년대 중반 이후에는 DDR, 램버스, DDR2 그래픽 DDR2 등 차세대 고성능 D램을 내놓았다. 2004년 9월에는 첨단 60나노 공정을 적용한 8기가 NAND플래시 메모리 제품개발에도 성공했다. 경쟁업체들이 시속 100km로 뛰었다면 삼성전자는 시속 200km로 날아간 셈이다.휴대전화사업도 마찬가지다. 삼성전자가 휴대전화사업을 처음 시작한 것은 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모토롤러, 노키아 같은 외국기업들이 국내시장을 싹쓸이하고 있을 때였다. 특히 모토롤러는 걸음마 단계였던 우리나라 이동통신시장에서 점유율 70%에 육박하는 독점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정도로 위세가 대단했다.반면 삼성전자는 시장점유율 10% 내외로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93년 11월 SH-700을 출시하며 한국 휴대전화의 세계화 원년을 선포하는 등 본격적인 시장공략에 나섰다. 그해 시장점유율을 15%까지 높였다. 이때만 해도 외국업체들은 ‘삼성이 설마’하는 식의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런 ‘미온적인 반응’이 바로 기회였다. 94년 8월 ‘애니콜’이라는 브랜드를 출범시키고 광고비를 93년 8억원에서 94년에는 7배인 56억원으로 늘리는 등 적극적인 브랜드 런칭에 나섰다. 94년 10월 최초의 애니콜 브랜드 휴대전화를 내놓으며 ‘한국지형에 강하다’는 마케팅 전략을 펼쳐 95년 드디어 모토롤러의 아성을 무너뜨린 것이다. 이후 삼성 휴대전화는 해외시장에서 명품으로 대접받으며 2004년 3분기 세계 시장점유율 13.8%로 2위에 올랐다. 휴대전화는 반도체, 자동차와 함께 한국의 수출 주력품목으로 자리잡았다.노하우 국내기업에 전파삼성전자의 성공노하우는 국내기업들에 전파돼 전체적인 질을 높이는데도 일조했다는 평이다.특히 오늘의 삼성전자를 일군 인재제일주의, 품질경영, 브랜드 마케팅 등은 대다수 국내기업들의 교본 역할을 했다. 수많은 기업들이 삼성 임직원 출신 스카우트에 적극 나서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삼성전자는 인재의 보고다. 전체인력의 35%인 2만2,000여명이 R&D 연구인력이다. 이중 박사가 2,000여명, 석사가 7,000여명에 달한다. 인재확보를 위한 노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슈퍼급 인재를 위해서는 언제든지 회사 전용기도 띄운다. 삼성전자의 스카우트 명단에는 5만여명의 프로필이 담겨 있다. 핵심인력을 확보한 뒤에는 돈을 아끼지 않고 철저한 관리와 지원이 이뤄진다. 외국인을 위한 도움 전담조직인 콜센터를 운영하고 있으며 전용식당 및 자제 교육문제 해결을 위해 외국인 전용학교 설립도 검토 중이다.품질경영에 대한 노력은 집착에 가까울 정도이다. ‘애니콜 신화’가 잿더미에서 피어났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95년 3월9일 불량 휴대전화가 유통되고 있다는 보고가 발생하자 전량을 회수해 구미사업장에서 전임직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불량제품 화형식’을 가질 정도로 품질을 중시했다.외환위기 직후부터 일찌감치 브랜드이미지 관리에 나선 것도 삼성전자가 초일류로 가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특히 올림픽을 적극 활용하면서 브랜드 이미지가 크게 좋아졌다. 삼성측은 시드니올림픽과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을 통해 브랜드 가치가 52억달러에서 125억5,000달러로 2배 이상 성장했다고 밝혔다. 이 기간 휴대전화 시장점유율도 5%에서 14%로 3배 가까이 증가했다.삼성전자의 고속질주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2004년에도 각종 기록을 양산했다. 1분기에 영업이익 4조원 시대를 개막했고, 2분기에 분기 사상 최대 매출을 달성했으며, 3분기에 10조원대 영업이익 시대를 열었다. 4분기 결산이 끝나면 사상 최초로 순이익 10조원을 달성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전망한다. 대우증권은 57조9,646억원의 매출과 11조5,044억원의 순이익을 올릴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