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티·헬스’ 빼고 모두 매각…매출액 5% R&D 투자

개성상인의 피를 물려받은 서경배 태평양 사장(41). 2002년과 2003년에 이어 이번에도 ‘올해의 CEO’로 뽑혔다. 올해의 CEO 10명 가운데 2세 경영인은 몇 명일까. 놀랍게도 서경배 태평양 사장 단 1명뿐이다. 고 서성환 태평양 창업주의 아들이었기에 대표이사라는 자리에 올랐지만, 그 다음부터는 순전히 본인의 능력과 노력으로 성공을 일궈냈다. 그가 2세 경영인의 대표주자로 변함없이 손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2세로서 경영자 수업을 착실히 닦은 뒤 97년 3월 태평양 대표이사로 취임한 서경배 사장은 현재 40대 초반이다. 다른 ‘올해의 CEO’보다 나이가 어린 편이지만 ‘개성상인의 후예’라는 호칭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개성상인은 보통 공과 사를 뚜렷이 구별하고 신용을 경영철학으로 삼곤 한다. 서경배 사장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아, 헤프게 돈 쓰는 법이 없고 남한테 빚지는 것도 싫어한다. 결국 연매출 1조원이 넘는 태평양으로 성장시키면서도 부채는 단 한 푼도 없다.개성상인은 심지가 굳어 불황에도 강하다고 평가받는다. 이 역시 뚝심 있는 서사장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그는 지난 94년 태평양그룹 기획조정실 사장시절 굵직한 구조조정을 단칼에 해내곤 했다. 경기가 좋아 다른 기업은 사업다각화로 몸체를 불려나가던 시절이었다.서사장은 그 당시부터 핵심역량 ‘선택과 집중’ 전략을 택했다. 그는 “뷰티와 헬스가 태평양의 주력사업이어야 한다고 봤다”며 “95년에는 태평양 돌핀스 프로야구단을, 96년 태평양패션, 97년 여자농구단, 98년 한국태양잉크와 태평양정보기술을, 99년에는 태평양생명보험 등을 매각했다”고 말했다.주변의 만류에도 밀어붙였던 강도 높은 구조조정은 결과적으로 ‘선견지명’이 됐다. 남들보다 훨씬 앞서 실시한 구조조정 덕에 취임 직후인 IMF 외환위기 당시 곤혹을 치르지 않아도 됐다. 그 시점에 오히려 효자 브랜드가 된 최대 매출의 ‘설화수’와 ‘헤라’를 만들어냈다. 일찌감치 ‘이제는 브랜드 시대’라는 것을 간파한 그는 강력한 브랜드력을 지닌 글로벌 스트롱 브랜드 기업(Strong Brand Company)으로 만들기 위해 브랜드 개발에 비용을 아끼지 않는다. 매년 꾸준히 매출액 대비 5% 내외를 연구ㆍ개발(R&D)에 투자한다.태평양은 해외시장에서는 글로벌 기업명인 ‘아모레퍼시픽’(AMORE PACIFIC)으로 외국인 소비자에게 다가섰다. 아모레퍼시픽은 부드럽고 세련된 이미지의 ‘아모레’(AMORE)와 강인하고 역동적인 이미지의 ‘퍼시픽’(PACIFIC)을 퓨전문화 시각으로 통합한 기업명이다.서경배 사장은 글로벌 사명인 ‘아모레퍼시픽’을 닮았다. 아니 ‘아모레퍼시픽’이 서경배 사장을 빼닮은 탄생물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서사장이야말로 세련된 동시에 강인한 이미지의 대표이사다. 서사장은 깔끔하고 모던한 외모와 옷차림을 선보인다. 반면 말투와 행동은 또 다르다. 동년배보다 훨씬 중후하고 진지하다.‘가볍지 않은 트렌디 CEO’인 그는 그 누구보다 트렌드에 민감하다. 그는 “1년 열두 달 언제나 ‘과연 현대여성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에 대해 고민한다”고 말했다. 주고객인 여성의 관점에서 사고하다 보니 감각 또한 시대를 앞서간다.1945년 설립 이래 줄곧 1위자리를 지켜왔지만 결코 자만하지 않는다.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회사가 되기 위해 성장엔진을 개발하려 노력 중이다. ‘뷰티와 헬스’라는 가치를 지켜나가기 위해 화장품은 뷰티사업으로, 그리고 설록차와 건강식품ㆍ미용식품을 통합해 건강미용식품으로 확장했다.그는 ‘웰빙’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전부터 향후 10년간 ‘미와 건강’이 시대의 조류가 될 것이라고 봤다. 특히 두 영역간의 통합 가속화를 예견하고, 관련상품과 서비스를 개발해 나갔다. 화장품은 10개 메가 브랜드를 육성해 2015년 뷰티사업 매출을 40억달러 올리겠다는 목표다. 또 건강미용식품분야에서도 3개 메가 브랜드를 키워, 이 부문에서 매출 1조원을 달성, 회사 매출의 20% 이상으로 끌어올릴 계획이다.서사장은 계획을 현실로 옮기면서 지난 5월 서울 압구정동 로데오거리에 플래그십 스토어(Flagship Store)인 ‘디 아모레 갤러리’(the AMORE Gallery)를 열었다. 이곳은 에스테틱과 스파서비스와 맞춤 메이크업과 같은 뷰티문화 체험을 제공하는 공간으로 ‘태평양 미용문화의 발신지’로 자리매김했다.헬스사업 다각화를 위해서는 지난 4월 서울 명동에 녹차 테마 카페 ‘오 설록 티하우스’ 1호점을 열었다. 이어 10월에는 강남에 2호점을 열어 고객몰이를 했다. 제주도에는 녹차박물관인 ‘오 설록 뮤지엄’을 만들어 손님에게 제대로 된 녹차와 녹차로 만든 음식을 서비스한다. 아울러 신개념 뷰티 체험공간(브랜드숍)인 ‘휴 플레이스’와 여성을 위한 전문 인적 서비스 ‘살롱 에스테라피’(Salon Estherapy)를 운영하며 고객의 시선을 붙잡는다. 트렌디한 여성고객의 관점에서 ‘내가 고객이라면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일까’를 끊임없이 고민한 결과다.서사장은 연세대 경영학과 졸업 후 미국 아이비리그 중 하나인 코넬대학의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개성상인 1세대는 몸소 경험하기 어려웠던 글로벌 문화와 경영기법을 2세대인 그가 몸으로 익히게 된 것이다.그는 올해 초 시무식에서 2015년을 향한 비전으로 ‘고객의 미와 건강을 위해 토털케어를 제공하는 글로벌 기업’(Global Total-care Provider of Beauty & Health)을 선포했다. 10여년 후에는 세계 10대 화장품회사로 성장하겠다는 야망을 보인 그는 뷰티사업 매출 가운데 30% 이상을 해외에서 올리겠다고 다짐했다.최근 수입화장품은 한국땅에서 마케팅을 더욱 강화해 국산화장품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태평양은 이런 상황에서 오히려 역공격에 나서며 자체 브랜드를 키우고 마케팅부문을 보강했다. 그 결과 샤넬과 에스티로더 등 세계적인 명품화장품을 제치고 3년 연속 백화점 매출 1위를 차지하는 놀라운 성과를 보였다.서사장의 시야는 해가 지날수록 넓어진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향수브랜드 ‘롤리타 렘피카’는 하버드대에서 마케팅 성공사례로 분석될 정도로 자리잡았다.또 글로벌 브랜드의 각축장이며, 아시아시장의 창이라 할 수 있는 홍콩에서 ‘라네즈’ 브랜드로 10여개의 매장을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아울러 중국 유행의 발신지인 상하이에도 별도의 현지법인을 설립했고, 2002년 9월부터 ‘라네즈’ 브랜드로 상하이의 1급 백화점인 팍슨 등에 진출했다. 현재 중국 5개 도시, 60여개의 백화점에 라네즈를 진출시킨 그는 올해 말까지 중국에 총 70여개의 매장을 열 계획이다. 이외에도 그는 라네즈를 2003년 싱가포르에, 올해는 대만과 인도네시아에 진출시켰다. 내년에는 태국과 말레이시아 등에 라네즈를 뿌리내리게 할 생각이다.그는 ‘브랜드’의 파생력을 강조한다. ‘라네즈’ 외에도 한방화장품 브랜드 ‘설화수’를 지난 9월부터 홍콩에 진출시켰고 자연주의 화장품 브랜드인 ‘이니스프리’도 지난 11월 중국 상하이 태평양백화점에 입점시켰다. 또 중국의 5성 호텔인 루이진호텔 내에 ‘가든 오브 이니스프리’(Garden of Innisfree)라는 공간을 만들어 고객이 직접 이니스프리를 체험할 수 있는 오감 마케팅도 펼치고 있다.서사장은 “아시아는 놀랄 만한 경제성장률을 보이며 이와 비례해 소비자들의 구매력도 폭발적으로 커지고 있다”며 “아시아시장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난해 7,000만달러였던 해외매출을 올해 1억2,000만달러, 내년에는 2억달러로 책정했다.서경배 태평양 사장약력 : 1963년 서울 출생. 81년 경성고 졸업. 85년 연세대 경영학과 졸업. 87년 미국 코넬대 경영대학원 졸업. 87년 (주)태평양 과장. 89년 태평양종합산업(주) 기획부장ㆍ기획이사. 90년 (주)태평양 재경본부 이사대우 본부장. 91년 태평양그룹 기획조정실장(상무). 92년 (주)태평양 생활용품사업부 전무이사. 93년 (주)태평양 사업지원본부 부사장. 94년 태평양그룹 기획조정실 사장. 97년 3월 (주)태평양 대표이사 사장(현). 2003년 대한화장품협회 제38대 회장(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