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한 사흗날 오후 이나모리 명예회장은 박용성 대한상공회의소 회장과 대담을 했다. 장인인 고 우장춘 박사 성묘와 인천 교세라정공 공장방문에 이은 발걸음으로 노구에도 불구, 빡빡한 스케줄을 무난히 소화했다. 박용성 대한상의 회장 역시 바쁜 시간을 할애했다. 대통령의 해외순방 수행 후 만 24시간도 지나지 않았지만 밝은 얼굴로 이나모리 회장을 영접했다. 이나모리 명예회장은 현재 교토상공회의소 명예회장이다. 한ㆍ일 양국을 대표하는 거물급 재계인사간의 대담은 시종 화기애애하게 진행됐다.박용성 회장 = 먼저 이나모리 회장님의 방문을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전경련에서의 강연회는 해외출장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신문을 보고 회장님의 훌륭한 말씀을 꼼꼼히 읽었습니다. 당대에 자수성가로 훌륭한 회사를 만드신 데 다시금 경의를 표합니다. 특히 회장님의 윤리경영이야말로 좋은 회사, 실적 많은 회사의 원동력이 됐다고 생각합니다.이나모리 명예회장= 감사합니다. 늦은 시각에 방문했는데도 시간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진작부터 한국방문을 원했지만 여러 이유로 지금에야 들어오게 됐습니다.박회장 = 신문을 보니 미국식 경영을 두고 쓴소리를 하셨던데요, 만능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가령 스톡옵션이 문제 있다고 하셨던데, 정말 그런가요. 한국은 오늘 ‘스톡옵션형 우리사주제’라고 발행주식의 20%까지를 종업원에게 줄 수 있는 법안이 통과됐습니다. 그러면 회사뿐만 아니라 종업원도 좋은 회사라고 생각하고 더 열심히 일할 것 같은데요.이나모리 명예회장 = 저는 모든 종업원을 대상으로 한 스톡옵션이라면 찬성합니다. 아주 좋은 생각이에요. 모두에게 지급해 모두가 행복해진다면 그것만큼 좋은 것도 없죠. 그런데 몇몇 CEO에게 과도하게 지급되는 미국식 스톡옵션은 반대입니다. 실적 향상이 스톡옵션 증가로 이어진다면 그만큼 부정을 저지를 가능성도 큽니다. CEO가 욕심을 가지면 성장은 하겠지만 끝은 몰락밖에 없어요. 45년 전 교세라는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저에게는 기술밖에 없었죠. 당시 제게도 주식이 할당됐지만, 전직원들에게 제몫을 나눠줬습니다. 그때 ‘열심히 일하면 (주식이) 가치가 있겠지만, 안하면 종이쪼가리에 불과하다’고 말했죠. 만약 주식을 돈이라고 생각했다면 이렇게 크지 못했을 겁니다.박회장 = (웃으며) 그래도 아마 큰돈이 됐을 것 같습니다.이나모리 명예회장 = 맞습니다. 생각지도 않게 큰돈이 됐습니다. 모두들 기뻐하더군요.박회장 = 80년대 중반 플라자합의로 환율이 달러당 240엔이던 게 순식간에 100엔까지 폭락했습니다. 회장님은 당시 달러약세 위기를 잘 극복하셨는데요. 현재 한ㆍ일 양국이 모두 환율하락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조언을 부탁합니다.이나모리 명예회장 = 말씀하신 대로 당시 환율은 240엔에서 100엔, 아니 80엔까지 떨어졌습니다. 저도 정말 살고 싶지 않을 만큼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전직원들에게 생산성을 높이는 한편 코스트를 떨어뜨리자고 설득했습니다. 이대로라면 교세라뿐만 아니라 일본경제 전체가 몰락할 거라는 위기감도 느꼈습니다. 하지만 결국 극복했습니다. 한국도 충분한 대응전략이 있을 겁니다. IMF 위기도 넘기지 않았습니까.박회장 = ‘일본주식회사’라는 말처럼 일본 정부는 기업과 함께 경제발전을 이뤄냈습니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고 참 부러운데요. 반면 한국은 이게 참 어렵습니다. 일본에서 정부ㆍ기업의 상호협력이 잘된 이유는 뭡니까.이나모리 명예회장 = 예전부터 정부ㆍ기업의 협력을 두고 ‘일본주식회사’라고들 하는데요.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중화학ㆍ하이테크ㆍ반도체 등 대규모 산업은 경제산업성이 보조금을 주면서까지 컨트롤 및 리드했지만 대부분의 기업은 자체 성장했다고 봐야 합니다. 되레 정부 방해에도 불구, 꿋꿋이 성장했습니다. 대개의 일본 기업은 정부와 관계가 불편합니다. 기업 전체로 봤을 때 협력은 없었다고 보는 게 낫죠.박회장 = 한국은 요즘 규제완화가 큰 이슈입니다. 태스크포스팀까지 생겨 규제완화, 철폐를 꾀하고 있습니다. 일본도 지난 30년간 규제완화를 해왔습니다. 실제로 효과는 있었나요. 그렇지 않으면 말잔치로 끝났습니까. 반면교사가 될 것 같습니다.이나모리 명예회장 = 사실 효과는 별로였습니다. 겉모습만 규제완화였지 실제로는 관이 컨트롤하는 게 태반이었죠. 정말 실망스러웠어요. 20년 전 제가 DDI를 창업할 당시 거대 국영기업이던 전화공사(현 NTT)를 민영화하면서 로컬, 장거리, 국제사업에 진입장벽을 없앤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정치논리에 밀려 규제는 조금도 완화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화가 날 정도예요. 다행히 현재 NTT에 이어 2위업체가 됐습니다만, 참 고생 많이 했죠. 규제완화는 국민의 목소리로부터 비롯돼야 합니다. 또 완화가 아니라 철폐돼야 합니다. 국영사업 역시 모두 민영화해야 합니다. 그래야 경제사회가 발전합니다.박회장 = 서양은 규제완화로 성공한 사례가 많습니다. 미국 항공산업이 대표적인데요. 그런데 동양권은 잘 안됩니다. 규제가 안 풀리는 이유가 문화 차이입니까. 아니면 다른 걸림돌이 있는 건가요.이나모리 명예회장 = 문화 차이일 겁니다. 한국ㆍ일본ㆍ중국은 과거부터 오랜 역사를 통해 통치권자가 존재했던 나라들이에요. 통치자 밑에 군중이 있고, 이들의 말에 따라 살아가는 방식이었죠. 이른바 왕의 컨트롤이 컸기 때문에 민주주의 사고가 강한 미국과는 다릅니다. 미국은 왕권이 없었기에 간단하게 규제완화가 가능합니다. 결국 역사적인 무거움의 차이라고 할까요. 이런 점에서 동양도 노력해야 합니다.박회장 = 한국은 외환위기 이후 IMF의 이행조건을 따랐고, 그 결과 미국식 경영을 받아들여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그 시기 일본은 장기복합불황으로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오명을 들었고요. 현재 결과적으로 일본은 시련기 때의 차분한 구조조정이 효과를 봐 회복조짐이 뚜렷합니다. 반면 한국은 잠깐 좋다가 다시 꺾이는 것 같아요. 우린 5~6%의 성장이 필요한데 실제로는 그 밑입니다. 경제회복 프로그램을 놓고 보면 일본식의 ‘천천히’와 한국식의 ‘빨리빨리’ 중 어떤 게 효과적인가요.이나모리 명예회장 = 어느 한쪽을 고르기가 힘드네요. 단 일본은 너무 천천히 회복했습니다. 부동산이나 금융버블을 서둘러 해결했다면 10년 넘게 고생하지 않아도 됐죠. 이런 점에서 한국형이 더 좋을 수도 있는데 잘 모르겠습니다.박회장 = 현재 한ㆍ일 FTA(자유무역협정)가 협상 중입니다. 협상이 타결되면 한국은 일본의 부품, 소재를 싼값에 들여오고 일본은 한국에서 생산한 것을 저렴하게 가져갈 수 있어 서로 좋을 듯합니다. 교세라도 부품회사가 많은 것으로 아는데 어떻습니까.이나모리 명예회장 = 양국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주변국 모두를 포함하는 FTA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죠. 이 과정에서 불이익과 마찰도 있겠지만 이는 극복해야 합니다. 양국 입장에서는 FTA가 번영의 필요조건이에요. 교세라도 한국에 두 개의 공장을 갖고 있습니다. FTA가 체결되면 더 키울 겁니다. 고용을 창출하고 수출에도 기여하는 등 한국경제에도 이바지하고 싶습니다.박회장 = 한국에는 많은 젊은이들이 회장님처럼 벤처창업을 꿈꿉니다. 성공한 선배로서 이들에게 한마디 해 주시죠.이나모리 명예회장 = 젊은이들의 창업 열기는 양국 모두 마찬가지군요. 욕심을 원동력으로 회사를 경영하면 확실히 키울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욕망만 갖고는 롱런할 수 없습니다. 기업은 사회에 공헌할 때 비로소 영속성을 가집니다. 욕심을 경계하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네요.공식대담이 끝난 후 두 회장은 가벼운 사담을 나눴다. 박회장은 “교세라의 카메라사업을 눈여겨보고 있다”며 높은 관심을 표명했고, 이나모리 명예회장은 “현재 향후 전략을 수립 중”이라며 업계 전망을 곁들여 화답했다. 헤어짐에 앞서 이나모리 명예회장은 “교세라에서 만든 세라믹 칼인데 바닷물에도 녹이 슬지 않는다”며 자사의 기념품을 전달했고, 박회장도 미리 준비한 선물을 선사했다. 박회장은 “내년 대한상의 건물의 증축이 완료되면 꼭 한번 모시겠다”며 방문단을 배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