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력 : 1932년 일본 가고시마 출생. 55년 가고시마대 공학부 졸업. 55년 쇼후공업 입사. 58년 교토세라믹(현 교세라) 설립ㆍ기술부 이사 취임. 66년 교세라 사장. 85년 교세라 회장. 97년 교세라 명예회장(현). 84년 DDI(현 KDDI) 창업. 2001년 KDDI 최고고문. 84년 이나모리재단 설립ㆍ교토상 창설. CEO 양성 위한 세이와주쿠(盛和塾) 교장. 97년 출가 후 파계 △저서 <이나모리 카즈오의 철학> <성공에의 정열> <일본에의 직언> <살아가는 법> 등“나는 철학으로 성공했다.”교세라의 성공신화는 ‘이나모리즘’으로 요약된다. 여기에는 이나모리 카즈오 명예회장의 확고한 기업이념과 철학, 그리고 미래를 읽는 능력, 결단력이 배어 있다. 이나모리즘이 가르치는 성공이란 ’능력 × 노력 × 태도‘의 3차함수다. 특히 리더가 갖춰야 할 뚜렷한 성격규정이 돋보인다. 이나모리 명예회장은 “기업의 흥망성쇠는 결국 기업가의 사람됨에 달렸다”며 “당연히 이윤을 추구해야 하지만, 그래도 바른길을 걷겠다는 신념과 철학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번 방한에서도 그는 경영기법보다 CEO 경영론과 인격수양에 대해 거듭 강조했다. 분식회계, 고객기만 등 일련의 기업위기야말로 리더의 인격부재에서 비롯됐다는 얘기다. 그의 이름 앞에 철학자라는 타이틀이 붙는 건 이 때문이다.이나모리 명예회장은 ‘경영의 달인’이다. 마쓰시타 고노스케(마쓰시타 전기그룹 창업자), 혼다 쇼이치로(혼다자동차 창업자)와 더불어 ‘일본의 3대 기업가’ 중 한 명이다. 자수성가한 기업가답게 벤처업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도 명성이 자자하다. 그는 2004년 3월 현재 159개 자회사에 5만7,870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거대그룹의 창업자이자 경영자다. 또한 이들 회사는 외형보다 내실이 더 튼실하다. 가령 교세라의 연평균 이익률은 20%에 달한다. 매출액은 매년 27%씩 증가했다. 90년대 중반 버블붕괴로 대형도산이 잇따를 때조차 교세라는 두 자릿수 성장을 반복했다. 96년에는 소니를 제치고 수익률 ‘No.1’에 올라섰다. 성장동력으로 이나모리 명예회장은 스스럼없이 ‘도덕ㆍ정도경영’을 든다. 따라서 기업이 장수하려면 ‘재주’보다 ‘인격’을 갖춘 CEO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하지만 그의 청춘은 사실 우여곡절의 점철이다. 시험에 낙방하고, 결핵을 앓았으며, 전쟁으로 삶을 움켜쥘 희망조차 없었다. 집은 가난했다. 6명의 형제자매 모두 한가하게 공부할 형편이 아니었다. 취직도 뜻대로 안됐다. 일자리가 필요했지만, 어디에도 그의 자리는 없었다. 회고록에 따르면 “나는 뭘 해도 안된다는 자학에 시달렸다”며 “만약 그때 엉뚱한 선택을 했다면 내 인생은 잘못됐을지도 모른다”고 밝혔다. 실제로 불평불만을 가진 채 ‘인텔리 야쿠자’를 생각한 적도 있었다고 기억한다.이랬던 그가 지금은 일본 재계의 거물로 우뚝 섰다. 계기는 첫 직장이던 초자회사(쇼후공업) 입사로부터 비롯된다. 월급까지 밀리는 부도 직전의 회사였지만 연구에 몰두하며 기술을 쌓았다. 고진감래라고 그의 연구는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결국 지인들의 출자로 58년 ‘쿄토세라믹’(교세라 전신)을 창립한다. 이후 진입장벽을 뚫고 국제수주를 따내는 등 승승장구를 계속해 오늘에 이른다. 물론 숱한 갈등과 좌절이 있었지만 이타정신에 근거한 파트너십 강화로 해결했다. 아메바조직은 이 과정에서 생겨난다. 84년에는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전기통신사업의 민영화 허용으로 DDI(第2電電)를 설립한 것. 여세를 몰아 2000년에는 국내 2위의 종합전기통신회사인 KDDI를 탄생시켰다. 이로써 오늘의 교세라가 완성됐고, 연매출 4조원의 기업집단을 일궈냈다.왕성한 사회활동도 그의 이미지 중 하나다.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책임감은 그를 다양한 활동으로 이끈다. 사업에 안정을 찾자 지원이 필요한 각종 사회사업(학술ㆍ문화ㆍ지역사회 등)에 참가한다. 이나모리재단이 발족돼 과학자를 대상으로 한 ‘교토상’을 만들고, J리그의 교토퍼플상가도 지원한다. 모교에 대한 보답으로 거액을 기부하기도 한다. 경영철학 전수를 이유로 80년 시작된 연구회는 오늘날 ‘세이와주쿠’(盛和塾)로 발전했다. 91년에는 전국조직으로까지 확대된다. 세이와주쿠는 지금도 3,000여명의 경영자들로 늘 붐빈다. 97년 그는 출가를 감행해 세간의 화제로 떠오른다. 부와 명예보다 선행을 원했던 결과다. 건강상의 이유로 집에 돌아오긴 했지만 여전히 수양에서 행복감을 느낀다. 그는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고 우장춘 박사의 넷째사위로 한국과의 인연도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