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진출 실패 딛고 유럽판매 4배 키워…3년내 세계 Top3 목표

“3년 전에 제가 그만 수요예측을 잘못하는 바람에 공장을 15일간 멈춰야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문상을 갔다가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직원 한분을 만났는데 그분이 제 손을 꼭 잡고 ‘조형, 일거리 좀 줘’ 하시더군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눈앞이 아득해지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대우종합기계의 건설기계 해외영업을 총괄하고 있는 조봉호 이사는 이런 일화를 들어 영업의 중요성을 소개했다. 영업맨은 단순히 제품을 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최전방에서 수요예측과 판매예측, 가격, 순익을 결정짓는 첨병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1978년 입사해 영업관리, 판촉, 마케팅, 영업전략 등을 두루 거친 뒤 5년간의 유럽 근무를 마치고 2001년 건설기계 해외영업총괄 이사로 부임한 그의 경력은 영업사령탑으로서 손색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에게도 심각한 위기는 있었다.“처음에는 국내영업에서 시작해 영업전략 부장까지 올랐습니다. 이때까지는 영업현장보다 영업기획 업무를 주로 했기 때문에 현장근무를 위해 지점 근무를 자원했죠. 그런데 느닷없이 독일주재원으로 발령이 났습니다. 돌이켜 보면 1년 반 동안의 독일 근무가 26년 직장생활 중 최대 위기였습니다.”그당시 대우는 독일시장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현지업체와 합작회사를 세워 시장개척에 나섰는데 제품의 규격과 품질이 현지 기준을 맞추지 못했던 것. 국내에서야 건설 중장비를 쓰다 칠이 벗겨지는 정도는 큰 문제가 아니었는데 독일에서는 이게 통하지 않았다. 특히 현지업체에서 선임한 독일인 사장이 구동독지역에 60대의 건설장비를 판매했는데 수금도 제품회수도 되지 않는 사태가 벌어졌다.“96년 9월에 부임해서 12월에 결국 독일인 사장을 해임했죠. 그리고 6개월 동안 직접 동독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제품을 회수해야 했습니다. 이 건으로만 회사에 40만달러의 손해가 생겼죠.”이 과정에서 일부 고객이 안전규격 미비 등을 이유로 고발을 하는 바람에 법원에 두 번이나 불려갔다. 결국 판사 앞에서 이런 제품을 다시는 판매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쓴 뒤에야 고발사건을 매듭지을 수 있었다. 국내영업에서는 최고실무자 자리에 있다가 이런 곤욕을 치르면서 자존심이 있는 대로 상했고, 한때는 일을 그만둘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당시에는 준비가 안된 상황에서 너무 서둘러 시장진입을 했던 겁니다. 저 자신도 국내에서 하던 방식을 그냥 답습하는 실수를 한 것입니다.”결국 독일시장에서는 철수를 하게 됐고, 마음의 상처가 컸던 그에게는 벨기에에 있는 유로대우에서 다시 한 번 도전의 기회가 주어졌다. 한국 본사에서 부분품을 들여다가 조립하는 녹다운 방식으로 제품을 제조, 판매하던 유로대우는 전체 매출의 70~80%를 영국에만 의존하고 있는데다 수익성도 그리 좋지 않은 상태였다.조이사는 제품성능과 디자인을 획기적으로 개선한 신형 굴삭기의 출시를 계기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유럽에서 판매량 두 배 신장과 흑자전환을 이룬다는 계획을 세웠다. 독일에서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현지법인장과 의논 끝에 유럽시장 가운데 가능성이 있는 곳을 선정해 집중 공략하는 전략을 펼쳐나갔다. 특히 신용판매를 전격 중단해 매출증가 못지않게 수익성 향상에 정성을 기울였다. 그 결과 당시 연간 500대에 불과했던 유럽 판매량이 3년 만에 2,000대를 돌파하는 성과를 거뒀다. 조이사에게 쓰라린 경험을 안겼던 독일시장에도 2002년부터 다시 딜러망 구축에 착수해 올해 200대를 판매했다.이 같은 성공의 비결에 대해 조이사는 ‘인간적인 신뢰구축’과 ‘철저한 수익관리’를 꼽는다. 우선 매출에서 손해를 보더라도 부실채권을 막겠다는 자세로 불확실한 신용거래를 완전히 중단시키고 철저히 현금거래나 신용장 개설에 의한 거래를 정착시켜 매출증가가 바로 수익성 제고로 이어지게 했다. 딜러를 선정할 때도 얼마나 많이 팔아 줄 수 있느냐보다 얼마나 믿을 만한가를 철저하게 따졌다.일단 선정된 딜러와는 신뢰관계를 쌓는 데 주력했다.“직원들에게 항상 ‘우리와 파트너가 함께 행복하고 부자가 돼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우리만 돈을 벌어서도 안되고 딜러만 돈을 벌어서도 안되겠죠.”그는 현장직원들에게 딜러의 부인과 포옹을 몇 번이나 했는지를 직원평가에 반영하겠다며 이를 꼭 보고하도록 하는 독특한 지시를 내려놓고 있다. 정말 친구가 되기 전에는 집으로 초대를 해주지 않는 서구문화의 벽을 깨고 들어가 인간적인 신뢰를 쌓으라는 의미다. 실제 딜러를 새로 선정할 때는 과거 실적이나 재정상태뿐만 아니라 딜러의 가족사까지 철저하게 파악할 정도로 인간적인 신뢰를 중시한다. 일례로 재정상황이 좋지 않아 거래조건을 까다롭게 했던 핀란드 딜러의 경우 과거 거래내역을 조사한 결과 약속을 어긴 경우가 한 번도 없어 이를 크게 완화해 주기도 했다. 그 결과 3년 만에 판매량을 5배나 늘리며 핀란드 건설장비시장에서 1위를 차지했다.믿음에 근거한 거래관계는 97년 외환위기와 이후 불어닥친 대우그룹 해체위기 때 빛을 발했다. 모든 딜러들이 대우를 믿고 끝까지 남아준 것이다. 포르투갈 딜러는 대우가 한창 달러부족에 시달릴 때 장비를 받기도 전에 미리 돈을 보내올 정도로 신뢰를 표시하기도 했다.조이사가 해외영업총괄 임원으로 부임한 뒤 한국 본사 수출물량이 연간 2,700대에서 5,500대로 늘어나는 결실을 맺게 된 데는 미국 등 각국에서 이 같은 전략이 자리를 잡은 것이 한몫을 했다.“물이 많아야 배를 띄우는 법이죠. 영업은 혼자 하는 게 아니라 조직의 힘으로 하는 거라고 믿습니다.”영업이란 한두 명의 영웅이 이끌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조직 전체가 유기적으로 연결돼야 한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직을 이끄는 책임자의 역할은 조직원들이 장기적인 안목을 갖추고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데 있다고 믿는다. 그는 부하직원들에게 1년을 근무한 뒤에는 3개월 앞을 내다보고 2년을 근무하면 6개월에서 1년 앞을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주문한다. 또 직원들에게 항상 현실을 스케치할 것과 일점주의적인 시야보다 스펙트럼적인 시야를 기를 것, 항상 시나리오를 그릴 것 등을 요구한다. 관리자라면 적어도 3년 앞을 내다보고 움직여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 같은 판단력을 키우기 위해 스스로도 끊임없이 공부하고 지식을 쌓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어쩌면 제가 오늘날 이 자리에 오른 것도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졌기 때문일 겁니다.”그가 갑작스러운 해외발령에도 어려움 없이 적응할 수 있었던 데도 이런 이유가 있다. 현대, 삼성과 불꽃 튀는 시장쟁탈전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지적 배경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따라 혼자서 외국 원서를 구해다 파고든 덕분에 상당한 영어실력을 쌓게 된 것이다.“당시 국내영업 상황을 지켜보면서 왜 점유율과 수지가 따로 갈까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 문제를 해외영업에 나와서 푼 셈이죠. 적자는 만인의 적이라는 확고한 깨달음을 얻었으니까요.”실제 대부분의 품목에서 적자를 내고 있던 건설기계 해외영업부문이 그가 부임한 뒤 두 자릿수의 경상이익을 실현하고 있다.세계시장에서의 순위를 7~8위권에서 5위권으로 끌어올린 데 이어 3년 안에 톱3에 들겠다는 게 그의 목표다. 제품가격도 일본업체 수준으로 끌어올려 중급품에서 고급품 대열에 합류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다행히 내년부터 품질이 세계 최고수준으로 향상된 신모델이 대거 출시될 예정이지만 시장환경은 낙관적이지만은 않다. 환율과 중국업체들의 추격이라는 파고는 더욱 거세질 전망이기 때문이다.조이사는 영업맨이면서도 R&D에 남다른 관심을 보인다. 이 같은 파고를 헤쳐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품질과 기술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외업무에 쏟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은 대부분 ‘R&D부서에 요구하고 의논하는 데’ 쏟아붓고 있다.“책임자는 가장 어렵고 힘든 시장에 가장 먼저 첫발을 내디뎌야 하고 제일 늦게 빠져나와야 한다”는 것이 관리자로서 그의 지론이다. 인생관은 ‘명랑하게 살자’다.“업무에서나 생활에서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최후의 보루입니다. 웃음을 잃는 순간 판단력을 잃게 되죠.”약력: 1953년생. 75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78년 대우중공업 입사. 94년 영업전략부장. 98년 유로대우 근무. 2001년 건설기계 해외영업총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