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자부서 스판덱스 맡아 세계 2위 끌어올려…마케팅 강의 ‘꿈’

“그래, 꼭 뚫고 말거야.” 동양나일론의 햇병아리 영업사원 조현택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벌써 몇 달째 자리에 한번 앉아보지도 못하고 돌아섰지만 “영업사원에게 포기란 있을 수 없다”며 의지를 다졌다. 그가 목표로 정한 ‘신영’이라는 회사는 나일론업체들의 메이저 고객사다. 그런데도 동양나일론은 이제껏 단 1g의 제품도 납품하지 못하고 있었다. 신영의 요구 수준이 워낙 높은데다 동양나일론의 품질이 경쟁사보다 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업계 선두로 올라서려면 우선 신영의 벽을 넘어야 한다. 그는 ‘언젠가는 길이 열리리라’고 믿었다.그 믿음 하나로 일주일에 두 번씩 신영을 드나들었다. 그렇게 꼬박 6개월을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웬일인지 한번 앉아보란다. 제품에 대해 이것저것 묻더니 결심한 듯 한마디 던졌다. ‘한 차 넣어보소!’ 됐다. 가슴 속 밑바닥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솟구쳐 올랐다. 영업사원으로서 거둔 첫 성공은 이렇게 찾아왔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났다. 그동안 그는 영업전선에서 용맹을 떨쳤다. 그가 가는 길은 승리(대폭 성장)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은 어느 듯 (주)효성 섬유PG의 영업사령탑(부사장)을 맡고 있다. 이제 그의 활동무대는 국내에 머무르지 않는다. 5대양6대주를 누빈다. 그가 직접 키운 제품인 스판덱스는 세계 2위를 차지할 정도로 잘나간다.햇병아리에서 호랑이로조부사장은 영업에서 잔뼈가 굵었다. 그를 햇병아리에서 호랑이로 키운 것도 8할은 영업이었다.그가 효성그룹에 입사한 것은 73년 10월께다. 당시 섬유업은 서울 상대 동기생 13명이 함께 입사할 만큼 대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첫 보직은 구매파트였다. 원재료 및 설비도입을 담당했다. 그러다가 75년 초 영업부서로 발령이 났다. 그는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햇병아리 영업사원 시절, 실적에 대한 압박 없이 수많은 현장을 다녔다. 현장 속에서 그는 고객이 원하는 것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있었다.더군다나 77년 일본 오사카 지사에서 2년간 근무할 기회를 가졌다. 섬유의 본산인 일본에서의 경험은 두고두고 영양제가 됐다. 일본에서 돌아온 그는 과장, 부장을 거쳐 대구 영업소장(86년)을 맡는다. 섬유업체가 몰려 있는 대구 영업소장은 회사의 핵심보직 중 하나이다. 직급은 부장이지만 운전기사가 딸린 차량이 제공될 정도였다.87년에는 일본의 미쓰비시가스화학과 합작해 설립한 한국엔지니어링플라스틱의 영업부장을 맡아 회사를 반석 위에 올려놓는다. 이 회사는 전기, 전자, 자동차 및 OA기기, 산업기계의 주요부품 등 주로 첨단제품의 부품소재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폴리아세탈 수지를 생산했다. 당시 국내에서 처음 양산하는 것이다 보니 새로 시장을 만들어야 했다. 당장 고객이 어디 있는지를 찾아야 할 정도로 생소했다. 하지만 그는 “내 의도대로 영업을 한 것은 이때가 처음”으로 기억하고 있다. 당시 주먹구구식 영업을 탈피하기 위해 마스트플랜을 세워 영업을 했다고 한다. 이 마스트플랜은 이후 효성 영업파트의 교과서가 됐다.회사의 실적은 달덩이처럼 부풀어올랐다. 매출이 전혀 없던 상태에서 88년 136억원, 92년 263억원, 95년 500억원으로 토끼뜀을 했다. 대신 고생은 말도 못할 정도였다. 처음에는 고객사 구매담당자를 만나는 것조차도 어려웠다. 몇시간이 걸려서 갔는데도, 정작 담당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럴 경우 무조건 5시간 이상 기다렸다. 이 정도는 기다려야 다음에 방문할 때 만나주기 때문이다.94년 동양나일론으로 복귀한 그는 원사사업부에서 영업임원으로 일했다.2000년 스판덱스를 맡았다. 당시 스판덱스는 효성의 골칫거리였다. 92년에 개발했지만 계속 적자를 내고 있었다. 품질이 경쟁사에 비해 훨씬 떨어졌다. 99년 국내시장점유율은 19.4%에 그쳤고, 세계시장점유율도 1.6%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맡은 지 5년 만인 2004년 10월 말 현재 국내시장점유율 53%, 세계시장점유율 15%로 ‘기적적인’ 성장을 일궜다.영광의 뒤안길에는 늘 고통이 따르는 법이다. 그 또한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100번 이상 사표를 썼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과장 초임 시절이다. 그의 건의로 회사조직이 내수, 수출 등 시장중심에서 직물, 편물 등 업종중심으로 바뀌었다. 그는 편물과장을 맡았는데 시장점유율이 17% 수준에 불과했다. 이를 2년 만에 60%까지 늘렸는데, 과감하게 시장개척을 하다보니까 부도를 적잖게 맞았다. 그는 “영업을 하면서 가장 비참한 것이 믿고 물건을 줬는데, 배반하고 돈 떼어먹고 도망가는 경우”라고 말했다.7월31일이었다. 연도는 기억나지 않지만 날짜는 아직도 또렷하다. 서울 정릉 골짜기에 부도를 낸 거래업체 사장 집을 찾아가 밖에서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밤새도록 불이 켜져 있어, 언젠가는 집으로 돌아올 줄 알았는데 다음날 알고 보니 이미 미국으로 도주한 뒤였다. 직원들을 데리고 공장으로 달려가 단돈 100원이라도 건지기 위해서 돈 될 만한 것들을 들고 나왔다. 그럴 때면 속이 무척 상했다. “그때의 비참함은 당하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라며 감회에 젖는다.‘품질은 영업이, 판매는 생산이 책임진다.’ 조부사장의 경영철학이다. 잘하는 영업이란 “좋은 물건을 제대로 받고 파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영업사원은 고객의 요구를 잘 알아야 한다. 최상의 제품을 만나게 해줘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고객의 요구를 정확하게 생산부서에 알려줘야 한다. 따라서 “생산과 품질을 주도하는 것은 영업”이라고 설명한다. “고객의 요구를 어떻게 알아내느냐. 그것은 간단합니다. 제품에 대해 부단히 공부해야 합니다. 그리고 고객을 밀착관리하면 충분히 알아낼 수 있습니다.”그 일환으로 그는 ‘고객의 날’을 제정했다. 한달에 한번꼴로 영업직과 생산직 사원이 함께 고객을 방문한다. 직접 고객의 소리를 청취하고 품질개선에 반영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인 것이다. 그는 또 사내 커뮤니케이션에 상당한 공을 들인다. ‘품질은 영업이 책임지고 판매는 생산이 한다’는 슬로건에서 알 수 있듯이 공장기술자와 영업사원간에도 벽이 없어야 한다. 서로 비판하고 스스럼없이 받아들이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그 자신도 부단히 노력한다. “나는 쭉 영업을 했던 사람입니다. 여러 명을 데리고 다니면서 세뇌를 시킵니다. 똑같은 사상을 갖도록 행동도 똑같이 하도록 합니다. 그러면서 철학을 공유하도록 하고 있습니다.”해외영업에서도 그는 독특한 방식으로 접근한다. 이제껏 해외진출에 실패한 회사들은 주로 말 잘하는 사람들 위주로 보냈기 때문으로 파악했다. 즉 영업을 모르는 사람을 내보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국내영업을 한 사람이 수출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현금 떼이는 경험을 한 사람”을 내보내야 한다는 것이다. 종합상사(효성물산) 출신들도 국내에서 보통 2년 정도 국내영업을 시킨 이후에야 해외지사로 파견했다.그는 축구선수 출신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대학시절까지 축구선수로 활약했다. 축구뿐만 아니라 모든 운동을 좋아한다. 영업을 하면서 좋아하지 않는 술을 많이 마셔야 했지만 기본체력이 워낙 튼튼해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스트레스는 거의 받지 않는다고 한다. 일에 푹 빠지면, 몰두하면 스트레스가 안 생길뿐더러 해결책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현실에서 안 나오면 꿈에서라도 찾을수 있다는 생각이다. 실제로 거래처에 부도를 맞아 고민하고 있었는데, 꿈에 나타나 알려준 방법대로 해 돈을 받은 적도 있다고 한다. 직원들에게 “아무리 어려워도 정신을 집중하면 돌파구가 보인다”고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그의 꿈은 두 가지다. 하나는 섬유PU장으로서 효성을 세계적인 화섬메이커로 키우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개인적인 것으로 후진양성에 나서고 싶다는 것이다. 그는 상사의 역할 중의 하나는 부하를 육성하는 것으로 이를 등한시하면 직무유기라고 여긴다. 기회가 되면 대학에서 마케팅을 가르치고 싶다며 특유의 소박한 미소를 짓는다.약력: 1951년 경남 함안 출생. 74년 서울대 무역학과 졸업. 73년 동양나이론 입사. 86년 동양나이론 대구영업소장. 88년 한국엔지니어링플라스틱 영업부장, 이사. 96년 동양나이론 상무. 97년 효성그룹 나이론원사사업부 사장. 2000년 효성 섬유PG 스판덱스PU장. 2003년 효성 부사장(스판덱스PU장 겸 PET원사PU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