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모두 Yes라고 말할 때 No라고 말하라.’ 한때 장안의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한 증권사의 광고카피다. 군중심리에 휩쓸리지 말고 자신만의 시각과 툴로서 종목을 선택하고 투자하라는 뜻이었다. 이리저리 부화뇌동하거나 ‘카더라통신’에 현혹되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메시지도 담고 있다.요즘 시장은 정말 자신의 판단이 중요해지는 것 같다. 시장에 기존의 상식이 통하지 않고 있다. 외국인은 파는데 주가는 오른다. 경기는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내수주가 강세다. 한국증시의 바로미터라던 삼성전자는 빌빌거리는데 종합주가지수는 떨어지지 않는다. 원/달러 환율은 7년 만에 최저치로 떨어졌는데 시장은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다. 도대체 뭐가 뭔지 헷갈린다.그러나 찬찬히 뜯어보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시장에 큰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시장의 기본환경이 달라졌다고 할 수도 있다. 우선 삼성전자의 영향력이 축소되고 있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답은 긍정적이다. 이유는 큰손들의 매수종목이 다양화됐기 때문이다. 사실 삼성전자는 한국증시에 있어서 약인지 독인지 구분이 안됐다. 삼성전자의 시가총액 비중이 20%를 넘나들기 때문에 삼성전자의 등락은 곧 종합주가지수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방향타였다. 따라서 시장은 삼성전자 한 종목이 오르면 투자심리가 살아나 주가가 오르는 삼성전자 편향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투자자들도 삼성전자의 주가동향을 보고 매수냐, 매도냐를 결정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같은 경향이 많이 약해졌다.실제 7월 초부터 11월24일까지 약 5개월간 삼성전자와 종합주가지수의 상반된 흐름이 좋은 예다. 이 기간 중 삼성전자 주가는 8.81% 하락했다. 하지만 종합주가지수는 오히려 13.17% 올랐다. 올 들어 계속 같은 방향으로 움직여 온 삼성전자와 종합주가지수가 7월 이후 점점 그 격차가 벌어지는 양상이 뚜렷하다.이는 증시가 삼성전자라는 제왕 중심의 구조에서 현대자동차, SK(주) 등 지방군주들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전국시대로 접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의 시가총액 비중은 지난 4월 말 22.98%에서 11월24일 16.15%로 감소했다. 반면 전통적 굴뚝주인 포스코, 현대차, SK(주), S-Oil, KT&G, 한국전력, 현대모비스의 시가총액 비중은 14.06%에서 17.47%로 확대됐다. 삼성전자의 영향력이 감소하는 대신 다른 블루칩들의 힘이 상대적으로 커진 것이다.이는 외국인이나 기관 등 큰손들이 다양한 종목을 매수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삼성전자에 대한 의존도가 약해졌다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제2ㆍ제3의 삼성전자가 잇따라 출현하고 있다는 것으로 봐야 한다.외국인 매매의 영향력 감소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외국인의 매매규모가 줄어들었고, 신규 대체세력이 부상하고 있지 못한 상황이어서 외국인 매매의 영향력을 말하기는 다소 섣부른 감이 있다. 그러나 외국인의 시가총액 비중이 40%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다는 게 중요한 포인트다. 외국인투자가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템플턴 등 중장기 펀드들이다. 또 하나는 단기차익을 노리는 헤지펀드다. 국내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은 두 부류가 혼재돼 있다. 최근 매매의 중심은 헤지펀드들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헤지펀드는 단기차익을 노리기 때문에 단타매매가 성행한다. 따라서 외국인이 판다고 해도 이것이 한국증시를 떠나는 모습은 아니다. 오히려 외국인 시가총액 비중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고, 이는 한국증시의 매력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기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기업실적이 악화돼도 일정비율 이상의 매물은 나오지 않고 있다. 결국 외국인 매수층은 두터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연기금 등 신규매수세력이 등장하고 있다. 연기금은 비록 많은 양은 아니지만 꾸준한 주식매수로 시장을 지탱하고 있다. 최근에는 연기금의 주식매수 여력을 확충해야 한다는 의견이 쏟아지고 있어 외국인의 매매동향에 의해 투자심리가 좌우되던 것에서 벗어나고 있다.또 다른 관점은 경기침체와 주가다. 경기가 나빠지면 기업실적이 악화되고, 이는 결국 주가하락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뭔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한국증시에서는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주가가 급등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이는 두 가지 요인이다. 하나는 경기침체로 기업간의 차별성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데 있다. 경쟁력이 있는 업체는 살아남고 경쟁력이 없는 회사는 도태되고 있다. 경쟁사가 사라진다는 것, 혹은 경쟁력을 잃는다는 것은 결국 또 다른 회사의 영향력이 커진다는 것을 뜻한다. 시장지배력이 강해지면 주가는 상승세를 탈 수밖에 없다. 신세계, 태평양, 농심 등이 대표적인 종목이다.또 다른 요인은 글로벌 플레이어들의 약진이다. 경기가 침체돼도 전세계 시장을 대상으로 활동하는 글로벌 기업들의 이익규모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현대자동차가 내수시장에서는 크게 고전하고 있지만 수출호조로 실적호전세가 지속되고 있는 게 좋은 예다. 이런 글로벌 플레이어는 대부분 시가총액 상위종목이다. 시가총액 상위종목이 경기의 영향력을 덜 받으면서 ‘경기침체 = 지수하락’이라는 등식에 금을 내고 있는 것이다.이밖에 최근 증시에서 부각되고 있는 새로운 요인도 있다. 지배구조의 문제다. 소버린자산운용이 SK(주)를 건드리면서 톡톡히 재미를 보자 외국의 대형펀드들이 지배구조가 취약한 기업에 대해 입질을 하기 시작했다. 현대상선, 대한해운 등 국내 알토란 같은 기업들이 매수대상으로 떠올랐다.씨티그룹은 최근 한국증시에서 인수ㆍ합병(M&A) 테마주가 유력하다며 30개 종목을 선정해 발표하기도 했다. 그만큼 한국증시에서 지배구조는 핫이슈가 되고 있다. 씨티그룹스미스바니증권은 “앞으로 M&A 테마주가 종합주가지수 상승률을 앞지를 것”이라는 분석보고서를 내 M&A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 이 증권사는 △최대주주의 지분율이 낮고 △안정적인 배당수익이 기대되면서도 △시가총액 대비 자산 현금보유금액 현금흐름 등이 우량한 30개 종목을 유망 M&A 테마주로 추천했다. 대표적인 종목으로는 동부제강, 동국제강, 현대하이스코, 유니온스틸 등 중소형 철강주와 한진중공업, 삼성중공업, 한진해운, 대한항공 등 운수장비 및 창고 관련주 등을 꼽았다.금융업종 중에서는 국민은행, 하나은행, 부산은행, 대신증권, 동양종금증권, 동양화재 등을 관심대상으로 꼽았다. 이들 종목의 경우 투자자가 돈을 빌려 인수하더라도 인수비용에 비해 월등히 높은 수익이 기대된다는 게 그 이유다. 이 증권사 다니엘 유 연구원은 “정부도 시장의 자율적인 M&A를 막지는 않을 것”이라며 “M&A 테마주의 재평가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또 초저금리에 따른 부동자금의 동향도 관심거리다. 돈이 더 이상 갈 데가 없다는 게 일반적인 인식이다. 정부의 부동산 규제 정책이 약발을 발휘하고 있고, 은행에는 돈을 넣어 봐도 큰 도움이 안된다. 결국 갈 곳이 없어진 돈이 증시로 돌아올 것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최근 적립식펀드에 들어오는 돈이 크게 늘어나고 있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결국 증시는 지금 커다란 패러다임의 변화를 겪고 있다. 상식이 통하지 않고,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는 중이다. 새 질서는 과거 벤처 열풍이나 코스닥 광풍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다. 군중심리에 휩쓸려 모두 한 방향으로 뛰었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다. 지금 형성되고 있는 질서는 투자자의 냉정한 판단을 요구하는 새로운 물결이다. 상식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새 질서가 그대로 굳어질지 아니면 잠깐 스쳐가는 큰 파도일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현재의 상황이다. 지금 시장은 꽁꽁 얼어붙은 투자심리와 달리 일부 종목의 주가는 수직상승 중이다. 바뀌는 패러다임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투자의 결과는 참담해질 게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