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부터 중국과 동남아에서 불기 시작한 한류 열풍이 올해는 일본에까지 휘몰아치면서 우리도 문화와 문화산업에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게 된 것 같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전에는 일본문화를 개방하면 우리 문화와 산업이 초토화될 것처럼 호들갑을 떤 적도 있었다. 일본 대중문화의 경쟁력이 세계적인 수준이기 때문이다.일본 대중문화의 강력한 경쟁력의 원천 중 하나로 손꼽히는 것이 ‘오타쿠 문화’다. ‘오타쿠’는 원래 ‘당신’에 해당하는 일본어의 2인칭 대명사지만, 현대적 의미로는 ‘이상한 것을 연구하는 사람’, ‘별 것도 아닌 일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그 대상은 철도, 라면, 프로레슬링 등 광범위하게 존재하지만 오타쿠가 가장 선호하는 것은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같은 영상물이다.일본의 학생운동이 종말을 맞은 지 10년 뒤인 80년대에 ‘오타쿠 문화’가 출현했다. 거대 담론이 사라진 시대, 경제성장과 더불어 소비문화가 꽃을 피우면서, 만화나 애니메이션 같은 하찮은 것에서 삶의 기쁨을 찾는 젊은 사람들이 등장한 것이다. 그로부터 20년. 30대 후반에서 10대에까지 이르는 두터운 오타쿠층은 대중문화의 안정적인 시장 역할을 하고 있다. 새로 등장한 것을 제일 먼저 사주는 선도적 소비자로서, 그리고 대부분의 것을 구매하는 수집가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일본 ‘오타쿠’에는 일부 부정적인 면도 있지만 이들의 지식욕에는 놀라운 점들이 있다. 누가 애니메이션을 이해하기 위해 양자론을 공부하고 생물학을 공부할 것인가.사실 우리 사회에도 일본의 ‘오타쿠 세대’와 비슷한 ‘폐인 문화’를 가진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고 있다. 별것 아닌 일에 열중하는 젊은 사람들, 기성세대의 눈으로는 ‘그거 한다고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라고 생각했던 것에 열중하는 세대가 등장한 것이다. 밤새 게임을 하고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보고 춤을 추는 사람들이다.학교에서는 문제아로 취급받던 오타쿠들이 엔터테인먼트산업을 석권하고 있는 것처럼 한국의 엔터테인먼트산업이 세계시장을 누비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자원 역시 이런 ‘문제아’들일지 모른다.실제 한국의 ‘폐인’들 중에는 이런 관심사를 직업으로 삼으려는 사람들이 많다. 가장 비근한 예는 프로게이머일 것이다. 게임을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게임만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는 프로게이머만큼 매력적인 직업도 없을 것이다. 또 만화나 애니메이션 평론가를 꿈꾸는 젊은이도 많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충분히 즐기고 그에 관한 평이나 글을 쓰는 것으로 먹고살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할까?만화나 게임을 연구한 오타쿠 출신 중에 만화가가 되거나 게임 제작현장에서 프로젝트 매니저(PM)가 되거나 애니메이션 감독이 된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 일본의 경우를 보면 그렇지 않은 사례가 훨씬 많다. 하지만 대중문화 생산현장에서 오타쿠는 다른 형태로 활약하고 있다. 만화 오타쿠는 만화전문 출판사의 직원으로, 게임 오타쿠는 게임회사에서 시나리오나 그래픽, 정 안되면 홍보나 마케팅 같은 후방 업무를 담당하는 직원으로 활동한다. 오타쿠는 대학에서조차 가르치지 않는 만화와 게임을 연구해 관련업계에 풍부한 지식의 고급인력을 공급해 주는 것이다.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는 업계의 스타는 ‘폐인’이 아니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후방에서 열심히 연구하고 묵묵히 일을 하는 것은 오타쿠가 훨씬 더 잘할 수 있는 영역이다. 스스로 스타가 되겠다는 꿈만 꿀 것이 아니라 조연 역할을 해주는 오타쿠가 많을 때 이들의 문화가 제대로 문화산업과 접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한국형 오타쿠의 열정과 저력이 건전하게 발휘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