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부산 광안리 해수욕장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온게임넷이 주최하는 ‘스카이 프로리그 2004’ 결승전을 보기 위해 모인 인파로 백사장이 뒤덮인 것. 관객수는 무려 10만명에 달했다. 프로게임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날의 사건은 게임업계에서 ‘광안리사태’로 기억되고 있다.그후에도 프로게임은 마술피리처럼 사람들을 끌고 다녔다. 광주에서 3만명, 대구에서 2만명 등 지역도 가리지 않았다. 온게임넷의 윤인호 대리는 “야외에서 대회를 가질 경우 예외 없이 만원을 이룬다”며 “설치한 의자수가 곧 관객수”라고 전했다. 서울 삼성동 스튜디오에서 방송할 때는 좌석은 물론 복도까지 관중으로 가득 찬다고 그는 덧붙였다.게임업계에서는 최근의 프로게임 열풍을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99년 최초의 게임대회인 ‘KPGL배 하이텔 게임넷 리그’가 개최된 후 30여개 구단이 창단되는 등 들불처럼 일어났던 프로게임 열기가 벤처 거품이 꺼지면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가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돌아온 프로게임은 단순히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는 수준이 아니다. 시스템과 규모 면에서 본격적인 ‘산업’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산업으로서 프로게임의 전체 경제규모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관련분야의 몇몇 수치를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다.우선 프로게임을 방영하는 게임 전문 케이블방송의 시청률 변동 추이. 게임 전문 케이블방송인 온게임넷에 따르면 온게임넷의 전체 시청률은 2002년 하반기 0.2%에서 2004년 상반기 0.3%로 50% 상승했다. 특히시청률 상승을 주도한 10대 남성층의 경우 같은 기간 0.23%에서 0.43%로 두 배 가까운 성장률을 보였다.게임의 총상금도 치솟고 있는 추세다. 한국e스포츠협회에 따르면 2002년 이후 대회수는 줄었지만 상금규모는 오히려 늘고 있다. 2002년 187개 대회 상금 35억원에서 2003년에는 144개 대회 상금 40억원으로 불어났다. 협회의 한 관계자는 “올 상반기 잠정집계 결과 지난해에 비해 대회수는 비슷하지만 상금규모는 1.5배 정도 늘어날 것으로 전망됐다”며 “하지만 지금 보니 두 배 이상 증가할 것 같다”고 말했다. 또 KTF의 장기욱 과장은 “메이저 게임대회의 시장규모는 대략 300억원 정도로 추산된다”며 “마이너 대회와 아마추어 대회까지 포함하면 시장규모는 더 커질 것”이라고 분석했다.프로게임의 경제적 효과가 비단 방송사와 대회에서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동통신업체와 방송사의 게임방송 콘텐츠 시장, 프로게이머 초청행사, 선수들의 마케팅 효과 등을 합산하면 엄청난 규모일 것이라고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이에 따라 프로게임에 대한 기업들의 관심도 부쩍 커지고 있다. SK텔레콤, 팬텍앤큐리텔, KTF 등 5개 기업이 이미 프로게임단을 창단했고 게임단 창단을 검토하고 있는 기업도 여럿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기업들이 프로게임단 창단에 적극적인 이유는 경제적 효과 때문이다. ‘게임의 황제’로 불리는 임요환 선수의 팬카페 회원이 50만명에 이를 정도로 게임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져마케팅 효과가 엄청나다는 것. KTF의 장기욱 과장은 “구단별로 선수단 운영비는 연간 10억~20억원선이지만 마케팅 효과는 몇 배에 이른다”며 “농구, 야구 등 프로스포츠단의 운영비가 연간 100억원대에 이르는 것을 감안하면 투자 대비 효과가 매우 크다”고 말했다.이뿐만 아니다. 프로게임은 보통의 스포츠 마케팅과 전혀 다른 차원의 마케팅 수단이 될 잠재력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야구의 경우 스포츠와 상품의 홍보를 직접 연결할 수 있는 방법은 매우 제한적이다. 기껏해야 신발, 운동복 등을 결합할 수 있을 뿐이다. 반면 프로게임의 경우 PC, 게임기, 소프트웨어업체들은 프로게임을 통해 상품을 직접 홍보할 수 있다. 현재 프로게임단을 운영하는 대기업들이 한결같이 정보통신업체들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시장규모가 커지면서 선수들의 몸값도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다. 이윤열, 임요환 등 흔히 ‘4대천황’이라 불리는 선수들의 연봉은 1억~2억원선에 이른다. 여기에 대회 상금, CF모델료, 행사출연료 등을 합하면 수입규모는 더욱 커진다. 하지만 프로의 세계는 냉정한 법. 고액의 연봉을 받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수입이 적은 선수도 수두룩하다. 특히 구단에 소속돼 있지 않은 선수들이나 구단에 소속돼 있지만 대기업 후원이 없는 선수단의 연습생들은 거의 수입이 없는 형편이다.이들 가운데에는 프로생활을 접고 아마추어로 복귀하는 선수들도 적지 않다. 이와 관련, e스포츠협회의 한 관계자는 “상금을 타기 어려운 프로대회에 참가하느니 입상 가능성이 높은 아마추어대회를 통해 수입을 확보하려는 생각에 프로 자격을 포기하는 선수들이 잇따르고 있다”고 전했다.그렇지만 프로게이머가 되겠다는 젊은이들이 줄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오히려 인기직업으로 확고히 뿌리내리고 있다는 분석이다. 프로게임단 GO의 조규남 감독은 “연습생 한 명을 모집하는 데 수천명의 지원자가 몰리고 있다”며 “프로게임에 대한 인식과 관심이 높아지고 있어 지원자는 더욱 많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실제로 2001년 49명이던 준프로선수의 수는 2002년 66명, 2003년 94명으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성적이 좋은 선수라도 고민이 없는 게 아니다. 우선 군복무 문제가 골칫거리다. 26개월의 공백은 선수생활의 ‘마침표’와도 같다는 것이다. 하지만 더욱 큰 고민은 제대와 은퇴 후의 진로가 그다지 확실하지 않다는 점이다. 지도자, 게임방송 해설가, 게임기획자 등 진로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리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프로게임이 새로운 직업군을 파생시킬 것이므로 지레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낙관론도 있지만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이에 따라 문화관광부와 협회, 관계자들은 포럼을 구성해 ‘중장기 발전계획’을 연구하는 등 e스포츠의 발전방안을 모색하는 데 힘을 모으고 있다.INTERVIEW / 최연성 프로게이머(SK텔레콤 T1소속)스승마저 꺾은 ‘지존무상’프로게임계에 새로운 ‘황제’가 등극했다. 그의 이름은 최연성(22). 흔히 ‘괴물 테란’이라 불릴 정도로 강력한 물량공세와 힘이 넘치는 플레이로 정평이 나 있다. 지난 8월 기라성 같은 스타선수들을 제친 후 줄곧 랭킹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으며 MBC게임이 주최하는 ‘스타리그’에서 3연패를 하는 등 게임계를 평정했다. 특히 지난 11월 온게임넷 스타리그에서 자신의 스승이자 ‘황제 테란’으로 불리던 임요환을 접전 끝에 물리쳐 ‘황제 대관식’을 마쳤다.최선수가 처음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을 접한 것은 99년이었다. 다들 그렇듯이 재미있어 시작했다. 하지만 한번 두번 승리하면서 게임에 점점 빠져들었다. 승리가 선사하는 희열이 그를 프로의 세계로 이끈 셈이다.“승부욕이 강한 편입니다. 뭐든 지는 건 정말 싫어요. 그 때문에 이기기 위해서 정말 열심히 노력하죠. 그런데 그게 또 가장 힘든 점이에요. 연습에 지치도록 매달려야 하는데다 성과가 적으면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니까요.”흔히 ‘학교성적과 게임실력은 반비례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최선수가 공부를 못해서 게임에 미친 것은 아니었다. 비록 고등학교를 중퇴하긴 했지만 성적은 늘 상위권이었다. 현재는 검정고시로 고졸 자격을 획득한 후 원광디지털대학교에 재학 중이며 졸업 후에는 대학원 진학을 계획할 정도로 학구적이기도 하다.“성적 때문에 집에서 압박이 심했어요. 성적이 좋은 편이었지만 늘 1등을 하는 형과 비교하면 실망스러우셨나 봐요. 하지만 지금은 프로선수인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기시지요. 부모님이 좋아하실 때 프로선수가 되기 잘했다는 생각을 합니다.”최선수는 요즘 자신이 ‘유명인’이 됐다는 것을 실감한다고 말한다. 극장, 식당 등 가는 곳마다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적잖은데다 인터넷에 팬카페도 활성화되고 있다는 것. 하지만 프로게이머를 꿈꾸는 후배들에게는 ‘신중히 결정할 것’을 주문한다. 겉에서 보는 것처럼 화려하지도, 쉬운 길도 아니라는 것. 열심히 하는 것 정도로는 턱도 없고 죽기 살기로 덤벼야 겨우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