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 증권 · 보험사 · 상호 저축은행 등 도로변 노른자위 빌딩 1층 싹쓸이

서울 강남의 핵심지역인 테헤란밸리가 다시 한 번 변신했다. 벤처기업들이 빠져나간 빈자리를 금융회사들이 채우고 있다. ‘테헤란로’와 ‘실리콘밸리’의 합성어인 테헤란밸리라는 이름조차 무색할 정도로 벤처기업의 그림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일부 벤처들이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예전의 위풍당당했던 명성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테헤란로는 지하철 2호선 강남역~역삼역~선릉역~삼성역 사이 2.5km 가량 되는 왕복 10차선 도로를 의미한다. 벤처붐이 한창이던 1999년~2000년 사이 벤처기업들이 대거 몰리면서 테헤란밸리라는 별칭을 얻었고, 벤처신화의 산실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2000년 하반기에 찾아온 거품붕괴는 벤처기업의 목을 조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스닥시장마저 나락으로 추락하면서 벤처기업들 대부분이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렸다. 결국 2001년 이후 상당수 업체들이 테헤란밸리를 뒤로하고 다른 지역으로 떴다.하지만 시냇물이 흘러내려가듯 무주공산이 된 테헤란로는 이제 금융회사 지점들의 차지가 됐다. 2000년을 전후해 대거 입주했던 은행이나 증권사들 외에 보험사와 상호저축은행 등이 가세하면서 하나의 금융타운으로 변모해가고 있다. 여의도에 금융회사 본사들이 대거 자리잡고 있다면 테헤란로는 이들의 영업점이 하나의 타운을 형성해 거대한 금융거리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테헤란로 주변 금융 관련 본사나 지점 수는 어림잡아 120여개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된다. 2.5km 남짓 되는 거리에 무려 100개가 훨씬 넘는 금융회사 지점들이 고객 모시기에 적극 나서고 있는 것이다. 자연 경쟁의 치열하고 금융회사들 역시 최정예 직원들을 배치해 큰손들에게 갖가지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특히 삼성역에서 선릉역에 이르는 거리는 금융회사 지점들이 집중적으로 몰려있어 테헤란로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금융 밀집지역으로 평가받고 있다. 도로 양 옆의 50여개 빌딩 가운데 금융회사가 입주해 있지 않는 곳이 거의 없을 정도다. 특히 1층의 대부분을 금융회사들이 사용하고 있어 어느 건물에 들어가든 금융거래가 가능하다. 몇몇 건물에는 3~4개의 금융회사들이 집중적으로 입주해 있어 빌딩 전체가 금융전문 빌딩으로 보일 정도다.테헤란로 안에서의 지역적 특색도 나타난다. 길지 않은 거리지만 블록별로 다양한 모습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삼성역에서 포스코 사거리에 이르는 거리의 왼편은 은행과 증권사 간판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국내의 웬만한 은행이나 증권사는 예외 없이 이 곳에 지점을 내고 있다. 빠진 곳을 찾아내기가 더 어려울 정도다. 포스코 사거리를 지나 바로 나타나는 동부금융센터는 테헤란로의 명물 가운데 하나다. 웅장한 규모뿐만 아니라 독특한 겉모양 역시 금융중심지의 위상강화에 한몫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반대로 삼성역에서 선릉역으로 가는 오른편 도로변은 은행이나 증권사 외에 상호저축은행들이 대거 둥지를 틀고 있다. 현대스위스상호저축은행, 솔로몬상호저축은행, 제이원상호저축은행, 한솔상호저축은행, 삼화저축은행 등이 한 라인에 몰려 있다. 마치 여의도의 증권타운을 연상시킬 만큼 서로를 견제하듯 건물마다 ‘상호저축은행’이라는 글자가 선명했다.그렇다면 테헤란로에 금융회사들이 몰려드는 이유는 뭘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일단 강남의 핵심지역이란 점이 크게 작용한다. 최근 들어 대치동이나 도곡동이 뜨지만 이런 곳들은 아무래도 주택가에 가깝다. 지점 입장에서 개인들을 상대로 한 영업 외에는 한계가 있다.그러나 테헤란로는 다르다. 일단 대기업 본사들이 즐비하다. 삼성, LG, 포스코, 동부 계열 국내 굴지의 대기업 본사들이 테헤란로 주변에 대거 들어서 있다. KTF와 하이닉스반도체도 테헤란로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 금융회사들 입장에서는 돈이 많이 오가는 대기업을 따라 움직이는 경향이 강하고, 그런 점에서 테헤란로는 최적의 영업지역인 셈이다.인근에 무역센터 빌딩이 있다는 점도 큰 강점이다. 국내외 기업들이 입주해 있는 무역센터는 명실공히 국내의 대표적인 오피스 빌딩이다. 업체수가 많은데다 대부분 우량회사들이 입주해 있어 금융회사들 입장에서는 좋은 거래처로 손색이 없다. 결국 이들을 잡기 위해서라도 테헤란로 입주는 불가피하다.또 하나 테헤란로 인근에는 소위 큰손들이 적지 않다. 큰 빌딩을 소유한 임대업자들이 많은데다 무역회사 등 개인회사를 운영하는 알부자들도 유난히 많다. 특히 수십억원에서 수백억원을 굴리는 부자들이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히 많아 은행이나 증권사, 또는 보험사 입장에서 적극 공략할 필요성을 느낄 수밖에 없다. 보험회사 영업사원으로 일하는 윤미진씨(38)는 “강남에서도 테헤란로 주변 부자들이 진짜 부자인 것 같다”며 “변액종신보험 등에 월 1,000만원 이상 붓는 고객들도 많다”설명했다.대로변을 선호하는 금융회사들의 영업방침도 테헤란로 집결에 한몫한다. 간판을 걸어놓는 것만으로도 영업에 큰 도움을 받기 때문에 굳이 비싼 임대료를 지불하고서라도 테헤란로를 고집하는 것이다. 인근 청호부동산의 한 관계자는 “요즘도 금융회사들로부터 1층에 자리 나는 곳이 없는지 알아봐달라는 전화를 자주 받는다”며 “다른 강남권에 비해서도 임대료가 20~30% 정도 비싸지만 수요는 계속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일각에서는 최근 상호저축은행이 테헤란로에 몰려드는 것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서민들이 많이 이용하는 것으로 알려진 저축은행과 강남 한복판은 언뜻 보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설명이다.먼저 영업상 리스크가 적다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다. 상호저축은행의 경우 금리가 다른 은행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아 리스크 관리에 각 회사들이 사활을 걸고 있다. 그런데 자영업자들의 경우 영업이 잘 돼야 차질없이 이자를 갚는데 강남, 그 중에서도 테헤란로 주변이 가장 낫다는 설명이다.또 강남부자들의 독특한 투자패턴도 상호저축은행의 테헤란로 진출을 적극 유도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보통 강남부자들은 ‘로(Low) 리스크 하이(High) 리턴’을 추구한다. 하지만 지금의 은행권 금융상품은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금리가 턱없이 낮다고 느끼는 까닭이다. 그러나 상호저축은행은 다르다. 금리가 은행 등에 비해 2배 가까이 높다. 게다가 5,000만원까지는 예금보험공사가 원리금을 보장해준다. 위험도가 전혀 없는 셈이다. 강남 부자들에게 크게 어필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금융천국 테헤란로에서 볼 수 있는 또 다른 풍경은 대금업체들의 활약이다. 일부에서는 ‘사채1번지’로 부르기도 한다. 2002년부터 테헤란로 끝자락인 강남역 일대를 중심으로 진출하기 시작해 지금은 전역에 걸쳐 200여개의 사채 관련 업체들이 입주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업계에서는 국내 사채시장에서 거래되는 전체 액수인 100조원 가운데 약 50% 가량이 테헤란로에서 움직이는 것으로 보고 있다.당분간 금융중심지로서 테헤란로의 위상은 확고할 것으로 분석된다. 더욱이 대기업 본사들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전해올 것으로 예상돼 금융회사들의 진출 역시 이어질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