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거품 빠져도 대부분 건재 … 공격경영 전환 본격화

여성벤처가 국내 벤처업계의 주류로 급속히 성장하고 있다. 수적으로는 전체의 5% 내외에 불과하지만 성장속도와 잠재력 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 특히 정보통신(IT)업계에서 활약이 대단하다. 학연, 지연, 혈연 등 기존의 남성적인 비즈니스 문화가 상대적으로 약하고 여성에 대한 정부의 창업지원이 확대됨에 따라 이 분야에 진출하는 여성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여성벤처의 역사는 98년 벤처붐과 함께 시작됐다. 특이한 점은 벤처거품이 빠지면서 수많은 기업들이 문을 닫았지만 여성벤처들은 대부분 건재하다는 사실이다. 외형보다는 내실을 추구하는 여성 특유의 꼼꼼한 경영전략 때문이다. 이들은 그간 쌓은 실력을 바탕으로 최근 공격적인 경영으로 전환, 외형 확대에 나서고 있다.남성벤처에 비해 절반밖에 안되는 역사지만 국내는 물론 세계적인 관심을 모으고 있는 기업도 적지 않다. 세계 최고라는 국내 모바일게임업계를 이끌고 있는 컴투스가 대표적이다. 지난해 <타임>지는 이 회사의 박지영 사장을 ‘14인의 세계 기술 대가(global tech gurus)’로 선정하기도 했다. 여성벤처의 달라진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스타CEO 속속 등장여성벤처의 바람이 가장 거센 곳은 게임, 애니메이션, 웹콘텐츠 등 디지털콘텐츠 분야. 남성에 비해 섬세한 감성, 디자인에 대한 예민한 후각,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꾸미는 데 능한 여성적 상상력 등이 강점으로 꼽힌다.지난해 모바일게임업계 최대 화제작인 ‘붕어빵 타이쿤’을 만든 컴투스의 박지영 사장, 국내 패키지게임의 역사를 다시 썼다고 평가되는 ‘창세기전’과 해외시장에서 더 유명한 온라인 게임 ‘테일즈위버’로 잘 알려진 소프트맥스의 정영희 사장 등 스타CEO가 즐비하다. 3D 온라인게임 ‘뮤’로 잘 알려진 ‘웹젠’ 역시 여성CEO인 이수영 전 사장의 손에 의해 탄생했다.최근에는 모바일게임업체인 이쓰리넷의 성영숙 사장 국내 최대 육아 포털 사이트인 베베하우스의 전미숙 사장 등이 주목받고 있다.성사장은 대학시절에 외삼촌에게 빌린 50만원으로 시작한 학원사업이 어려워지자 정보통신 분야로 몸을 옮겨 성공한 케이스. 정보통신분야에 문외한이었던 성사장은 수백곳의 관련 세미나를 따라다니며 내공을 쌓았다. 지난 20년간 하루 4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다는 지독한 노력파로 알려져 있다.베베하우스 전사장의 원래 꿈은 소설가였다. 그 일환으로 여러 매체에 글을 기고하다 95년 종합미디어기획사인 에디피아21을 창업하며 비즈니스 세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 전사장은 맞춤정보 e메일 서비스, 소비자 모니터링 등 차별화된 서비스로 시장을 공략, 베베하우스를 육아 포털 가운데 유일한 흑자기업으로 일궜다.전통적으로 남성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무선통신 플랫폼, 솔루션, 계측기, 반도체칩 등 기술벤처 분야에서도 여성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88년 창업한 이래 국내 최고의 디지털 계측기 개발업체로 군림한 이지디지털의 이영남 사장, 인터넷 보안기술의 선두업체인 인터넷시큐리티의 강형자 사장 등에 이어 차세대 통신사업의 플랫폼과 솔루션 분야에서 독보적인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헤리트의 한미숙 사장, 화상회의 솔루션 분야에서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우암닷컴의 송혜자 사장, 반도체칩 부문의 기대주인 제토스의 이황 사장, e비즈니스 솔루션 개발업체인 이포넷의 이수정 사장 등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헤리트의 한미숙 사장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서 14년간 연구원으로 근무한 베테랑 엔지니어 출신이다. 2000년 ‘하고 싶은 연구를 마음껏 하고 싶어’ 창업했다. 이 회사의 주력제품은 차세대 통신네트워크 솔루션. 2002년 KT의 ‘지능망-인터넷 연동장치’ 구축사업자로 선정되며 기술을 인정받았다. KT의 메신저콜, 클릭콜 등 부가서비스도 헤리트의 작품이다.한사장은 “경쟁업체들이 2세대 기술에 강점이 있다면 헤리트는 차세대 기술에 강하다”며 “솔루션뿐만 아니라 다양한 부가서비스를 개발해 해외시장에 진출하겠다”고 밝혔다.반도체칩 개발업체인 제토스의 이황 사장은 유한킴벌리의 제품개발실장 출신이다. 주기적 잡음제거칩, 무선 원격계측용 모뎀 칩셋, 반도체 플라즈마 기술을 이용한 칫솔살균기 등이 그간 내놓은 제품들이다. 올 상반기에 차세대 반도체칩을 선보일 계획이다. 이사장은 “기술벤처의 생명은 신기술 개발”이라며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예비창업자 열기 ‘앗 뜨거’비정보통신 분야에서도 성공한 여성벤처기업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서울컨벤션의 이수연 사장, 엔터진의 박영미 사장, 뉴데이커뮤니케이션의 박효신 사장, 장윤희 서비스어바웃의 장윤희 사장 등이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서울컨벤션은 지난해 세계 여성경제인연합회가 주최하는 ‘위민인스파이어 2003’ 서울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며 주목받은 국내 간판급 컨벤션업체다. 이 회사의 이수연 사장은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최초의 여성이사장을 지낸 것으로도 유명하다.성공한 여성벤처가 늘면서 벤처창업에 대한 여성들의 관심도 확대되고 있다. 한국여성벤처협회가 매년 주최하는 성공사례 발표회에 참가하는 예비창업자들의 수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협회의 김수희 실장은 “1회에 50명, 2회에 100명이 참가했고 3회인 이번 발표회에는 130명이 참가했다”며 “전체적으로 벤처창업이 주춤하고 있지만 여성 창업은 더욱 늘 것으로 예상된다”고 전망했다. 이와 관련, 헤리트의 한미숙 사장은 “여성 벤처의 역사는 이제 시작됐을 뿐”이라며 “5년 안에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여성의 역할이 크게 강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INTERVIEW이영남 이지디지털사장(한국여성벤처협회장)“실패를 물려줄 수는 없습니다”여성벤처의 성장에는 98년 창립된 한국여성벤처협회의 역할이 적지 않다. 특히 2기에 이어 3기 회장을 연임하고 있는 이영남 회장의 공이 크다고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결속력이 부족한 회원사들을 하나로 엮어 공동의 이익을 창출하고 있다는 것.“여성벤처의 최대 약점은 마케팅 능력이 취약하다는 것입니다. 남성에 비해 인적 네트워크가 부족하고 대부분 업체들이 소규모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협회 차원에서 사업을 따고 해당업체에 역할을 분배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매년 두 배 이상씩 실적이 오르고 있어 반응이 좋습니다.”이회장이 최근 역점을 두고 있는 사업은 회원사들의 해외진출 지원이다. 소프트웨어 개발 계약 등 이미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지난 15년간 기업을 경영해 오면서 해외진출에 어려움을 겪은 경험이 있습니다. 다른 기업들도 사정이 다르지 않고요. 특히 정보가 부족했어요. 이 같은 실패를 후배 경영자들에게 물려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해외 전시회와 투자설명회에 공동으로 참여해 기업을 알리고 투자를 유치하고 있습니다.”이회장은 최근 여성벤처의 위상이 크게 신장됐다고 평가한다. 스타기업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데다 거래업체들 사이에서 여성기업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졌기 때문이라는 것.“여성CEO들은 매우 열정적입니다. 가정이라는 경계를 한 번 깬 경험이 있기 때문에 도전정신이 강하지요. 여성이 현실안주적이라는 생각은 편견에 불과합니다.”창업을 준비하는 여성들에게 이회장은 철저한 준비를 당부했다. 보장된 성공은 없으며 늘 준비하고 긴장해야 한다는 주문이다.“여성벤처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여성의 활동을 가로막았던 장벽들도 많이 사라져 성공창업의 가능성도 높아졌지요. 머지않아 ‘여성’이라는 수식어 자체가 사라지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