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세는 기울었다.”“걱정 없다.”요즘 대형 유통업체를 방문하면 한번쯤은 꼭 듣는 이야기다. 이는 올해 들어 유통업계가 유독 극심한 변화를 겪고 있다는 뜻이다. 특히 올해 유통업체간의 ‘순위지도’가 바뀌거나 바뀔 가능성이 그 어느 해보다 높은 것도 이런 흐름에 한몫 하고 있다.우선 올 상반기 경영실적에서 신세계가 22년 만에 매출과 순이익에서 롯데를 앞질렀다. 이는 2~3년 전만 하더라도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이뿐 아니다. 온라인 유통의 양대 강자인 LG홈쇼핑과 CJ홈쇼핑의 격차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세이브존, 이랜드 등 신흥 유통강자들이 호시탐탐 중심부 도약을 꿈꾸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우리나라에서 고전 중인 까르푸, 월마트 등 세계적인 유통업체들이 힘찬 부활의 날갯짓을 하고 있는 점도 눈에 띈다. 이런 까닭에 유통전문가들은 “올해는 유통업계 사상 가장 큰 격변기가 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그렇다면 사상 최대의 ‘격변’은 앞으로 어떤 식으로 전개될까.우선 업계의 랭킹지도가 어떻게 바뀔 것인지가 주된 관심사다. 전체 유통업계의 1ㆍ2위 업체인 롯데와 신세계의 자리바꿈은 대세로 굳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신세계는 22년 만에 롯데에 올 상반기 매출과 순이익에서 각각 1조원, 160억원을 앞선 이후로 더욱 공격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신세계 관계자가 “이미 87호 할인점 부지까지 확보했다”며 “(할인점을) 하루라도 빨리 세우기 위해 노력할 뿐”이라고 밝힌 데서 자신감이 읽힌다.반면 롯데는 지난 79년 본점을 오픈한 뒤 81년부터 지난해까지 21년간 누려온 부동의 1위 자리를 내놓은 아픔을 뒤로 하고 정상회복을 위해 뛰고 있다.하지만 상황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아 보인다. 지난 98년 첫 출점한 할인점 롯데마트가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이마트, 홈플러스 등에 이어 3위로 밀려나는 수모를 겪고 있지만 당장 전세를 역전할 기미 또한 보이지 않는다. 최근에 정신무장을 위해 전직원을 대상으로 해병대 극기훈련을 진행한 것만 보더라도 위기감을 짐작할 수 있다.무엇보다 신세계가 주력으로 하는 할인점이 롯데의 주력인 백화점보다 성장성이 월등히 높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지난 99년 할인점의 시장규모(7조6,000억원)는 백화점(13조3,000억원)의 절반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지난해 백화점(17조8,000억원)과 할인점(17조4,000억원)은 거의 대등한 위치가 됐다. 그러다가 올 상반기에 드디어 역전됐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 1~6월 대형 할인점 판매액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0.5% 늘어난 9조934억원을 기록했다. 반면 백화점은 1.3% 줄어든 8조6,667억원에 그쳐 할인점에 4,267억원 뒤진 것이다.이런 추세는 향후에도 계속될 전망이다. 신세계유통연구소는 “올 연말에는 매출이 백화점 19조4,000억원, 할인점 20조3,000억원으로 추정, 할인점이 유통업계에서 가장 큰 시장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이에 따라 98년 할인점사업에 뛰어든 이후 늘 ‘1위 탈환’을 외쳤던 롯데지만 반격이 쉽게 이뤄질 것으로 보는 전문가들이 많지 않다.홈쇼핑 분야의 쌍두마차인 LG홈쇼핑과 CJ홈쇼핑은 박빙의 승부로 접어들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올 상반기 경영실적에서 매출액은 LG가 8,351억원으로 CJ의 7,183억원을 앞섰지만, 영업이익과 순이익은 오히려 CJ가 선두로 올라섰다.특히 인터넷쇼핑몰의 경우 4~5위권에 불과했던 CJ가 2위로 치고 올라왔다. 인터넷쇼핑몰의 성장세는 지난 2000년 이후 매년 200%를 상회하고 있다. 지난해 3조7,000억원에서 올해는 5조원을 훌쩍 넘을 것으로 한국전자상거래협회는 내다봤다. 이는 5조원을 밑돌 것으로 예상되는 TV홈쇼핑을 능가하는 것이다. 따라서 TV홈쇼핑뿐만 아니라 인터넷쇼핑몰사업에서 CJ의 무서운 성장세를 LG가 어떻게 막아내느냐에 업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하지만 양사의 분위기는 조심스럽다. “역전이 가능하지 않겠느냐”(CJ 관계자), “큰 의미가 없다”(LG 관계자) 등 입장은 엇갈리지만 이전에 30%포인트 가까이 벌어졌던 차이가 근접했다는 것만으로도 ‘지각변동’이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다.이처럼 오프라인과 온라인 업계의 1ㆍ2위 업체들이 각축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이랜드, 세이브존 등 마이너 업체들과 까르푸, 월마트 등 외국계 업체들도 공세를 늦추지 않고 있다. 이랜드는 뉴코아 인수에 실질적인 힘을 쏟고 있으며, 뉴코아 인수를 포기한 세이브존도 재기에 나섰다. 세이브존은 최근 부천시 원미구 상동에 위치한 패션아웃렛 드림모아와 전략적 제휴를 맺고 세이브존 8호점을 오픈한다. 이를 시작으로 세이브존은 “오는 2005년 20개 점포, 매출목표 2조원을 달성할 것”이라고 장기 구상을 밝혔다.뉴코아와 함께 한화유통의 매각물건도 관심사다. 특히 17개에 달하는 한화스토아의 경우 영업면적이 300평 안팎으로 대형 할인점업체들이 중장기적으로 추구하는 슈퍼슈퍼마켓(SSM) 컨셉과 맞아떨어진다는 평가다. 따라서 한화유통이 내놓은 물건이 누구에게 넘어가느냐에 따라 또 한번의 지각변동이 예상된다.세계 1·2위 유통기업인 월마트와 까르푸의 향후 전략도 유통업계의 지각변동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양사는 향후 거액의 투자비를 들여서라도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의지를 갖고 있다. 향후 5년간 월마트는 2조원, 까르푸는 1조3,000억원을 쏟아부을 예정이다.이런 가운데 변화의 소용돌이가 더욱 강력해질 것으로 보는 이유 중의 하나는 불황이 깊다는 점이다. 박진 LG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경기가 좋지 않을 때 스타기업이 나타나는 것은 일반적인 패턴으로 기존의 탄탄한 재무구조를 갖고 있는 기업은 세 확장의 절호의 기회를 맞은 셈”이라고 말했다. 신세계가 IMF를 거치면서 할인점사업에 주력, 오늘의 ‘이마트 신화’를 일궜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따라서 치열한 할인점 확보 다툼과 M&A가 향후 유통업계의 순위지도를 다시 한 번 요동치게 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