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그룹의 실질적인 오너였던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이 지난 8월4일 갑자기 자살하면서 현대그룹이 구심점을 잃은 채 표류하고 있다.고 정몽헌 회장이 주도해왔던 대북사업은 물론 현대상선 현대엘리베이터 현대택배 현대증권 등의 계열사들도 향후 주변 여건이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지 몰라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이 같은 상황에서 최근 금강고려화학(KCC)그룹을 이끌고 있는 정상영 명예회장(68)이 계열사들을 동원해 현대엘리베이터, 현대상선 등의 주식을 사들이면서 정몽헌 회장 사후에 현대그룹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의 막내동생이자 고 정몽헌 회장의 삼촌이기도 한 그는 경영권 공백상태에 빠진 현대그룹이 안정될 때까지 과도적으로 ‘관리’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정명예회장은 지난 8월21일 <한국경제신문 designtimesp=24191>과의 인터뷰를 통해 “외부세력의 경영권 도전을 차단하고 주요 계열사들의 경영을 안정시키기 위해 당분간 내가 나설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정명예회장은 현대그룹에 대한 KCC의 이 같은 태도가 “결코 경영권 인수를 노린 것은 아니며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다”고 분명히 못박았다.정명예회장은 정몽헌 회장의 49재가 끝나는 9월 말께 범(汎)현대일가 오너들과 전문경영인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아 현대그룹의 앞날에 대한 종합적인 방안을 모색할 예정이다.◆KCC 왜 나섰나 = 정명예회장은 유난히 가족간의 우애의식이 강한데다 평소에 고 정몽헌 회장을 아꼈다고 한다. 그는 정회장의 때이른 죽음을 크게 슬퍼하며 그가 남기고 떠난 현대그룹을 어떻게든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이에 따라 정명예회장은 정회장의 장례식이 끝난 직후 정몽구 현대ㆍ기아차 회장과 정몽근 현대백화점 회장, 김윤수 한국프랜지 회장 등을 불러 긴급 가족회의를 갖고 현대그룹을 가족들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마침 현대그룹의 지주회사격인 현대엘리베이터에 갑자기 외국인투자가들이 몰리면서 경영권 방어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시점이기도 했다.KCC측은 이에 따라 8월13일 계열사인 금강종합건설을 비롯해 현대백화점 한국프랜지 현대시멘트 등을 앞세워 현대엘리베이터의 자사주 43만주(7.7%)를 인수한 데 이어 장내에서도 엘리베이터 주식매수에 나서 경영권을 방어할 수 있는 지분을 확보했다.KCC측은 이어 현대그룹의 중간 지주회사격인 현대상선 지분도 2.98%를 사들여 현대그룹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다.정명예회장이 이렇게 나설 수 있었던 것은 KCC그룹이 현대차 현대중공업 등의 지분을 폭넓게 확보하고 있는데다 이미 ‘2세 경영’으로 넘어간 범현대그룹에서 사실상 가족들의 ‘어른’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이끌던 현대그룹은 자동차 중공업 시멘트 금융사 해운 기계 건설 등의 업종으로 사분오열됐지만 각 계열사들과 지분 투자관계를 맺고 있는 곳은 KCC가 거의 유일하다. 이번에 현대엘리베이터 현대상선 지분을 확보한 것을 비롯해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현대모비스 현대산업개발 등에 출자를 해놓고 있다. KCC 관계자는 “도료 유리제품 등을 주력으로 하고 있는 만큼 사업적인 측면에서도 이들 기업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며 “하지만 명예회장은 기본적으로 모든 기업들이 한뿌리요, 한가족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KCC가 지난 6월 현대중공업 지분을 8.2%나 확보한 것은 내부 지분이 취약한 정몽준 현대중공업 전 고문을 측면지원하기 위한 성격이 강하다는 설명이다.◆현대그룹의 후계구도는 = 앞으로 현대그룹을 이끌 수 있는 또 다른 축은 고 정몽헌 회장의 장모인 김문희 용문학원 이사장(75)이다. 김이사장은 엘리베이터의 최대주주(18.6%)로 마음만 먹으면 현대그룹의 ‘계열주’ 역할을 해낼 수 있는 위치에 있다.김이사장은 현대그룹에 대한 정명예회장의 ‘관리’ 방침을 선의로 해석하며 감사의 뜻을 표시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대주주로서의 역할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다만 고 정몽헌 회장의 아들이 아직 고등학생인데다 김이사장 쪽에서도 당장 현대그룹을 맡을 만한 인물이 없는 것이 고민이라는 지적이다.따라서 현대그룹은 당분간 정명예회장이 김이사장측과 협의를 거쳐 현대그룹을 ‘섭정’하되 그룹을 이끌 후계자는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이해당사자들의 의견을 모아 추대될 것으로 보인다.이 과정에서 현재 교보생명 등에 담보로 맡겨져 있는 정몽헌 회장의 현대상선 지분(4.9%)을 누가 찾아가느냐에 따라 후계구도의 부분적인 윤곽이 드러날 것으로 예상된다.노무현 정부 경제정책 집중 분석세법 개정안의 의미와 한계정부는 올해 정기국회에 제출할 세법 개정안을 최근 확정했다. 근로소득자에 대한 세금혜택을 늘리기 위해 각종 소득공제를 늘리고 기업의 설비투자에 대한 조세감면 등 세제지원도 강화하겠다는 내용을 담았다. 보유기간이 2년 미만인 부동산에 대해서는 매매차익의 40~50%를 세금(양도세)으로 물리고 서화와 골동품에 대해서도 판매가액의 1~3%의 양도세를 부과하겠다는 것도 이번 세제개편안에 포함됐다.올해 세제개편안의 특징은 조세형평성 강화, 기업설비투자 촉진, 불로소득에 대한 과세강화 등 세 가지로 요약된다. 조세형평성이란 세금을 부담할 능력이 큰 사람에게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는 원칙을 말한다. 자영업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득이 투명한 근로소득 생활자들이 많은 세금을 부담하는 것은 조세형평성에 맞지 않는다. 의사, 변호사 등 전문직 자영업자들이 세금을 더 낼 능력이 있는데도 근로소득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세금을 내왔기 때문이다. 이번에 단행된 소득공제 혜택의 대부분이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조세형평성을 개선하는 데 어느 정도 기여할 것으로 예상된다.임시투자세액 공제율을 10%에서 15%로 확대하고 연구개발투자와 석박사급 고급인력 인건비로 지출한 돈의 일부를 세금에서 깎아주는 기업 조세감면 혜택도 이번에 상당히 큰 편이다. 삼성전자는 내년에 3,000억원 가까운 세금을 절약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정부 입장에서는 7월 중 설비투자가 전년 동기 대비 11%나 감소할 만큼 기업투자가 부진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볼 수 있다.불로소득에 대한 과세강화는 부동산 양도세 중과에서 확인된다. 정부는 1년 미만으로 보유한 부동산을 팔면 양도차익의 50%, 1년에서 2년 미만을 보유한 부동산을 처분하면 차익의 40%를 세금으로 징수하기로 했다. 부동산 거래와 관련된 각종 비용부담까지 합치면 부동산 투자자들에게 돌아갈 몫은 거의 없다. 서화, 골동품 등 미술품의 매매차익에도 세금을 매기고 상속 및 증여세를 포괄과세하겠다는 것도 불로소득에 대한 과세 강화다.그러나 정부는 이번 세제개편에서 ‘낮은 세율’과 ‘단순한 세제’라는 정책 목표를 사실상 포기했다. 복잡한 조세감면을 계속 실시하는 것보다는 세율을 낮추는 것이 사회비용을 줄이는 최선의 방법이지만 정부는 이를 외면했다. 소득세율을 내리거나 소득구간을 늘리는 방식을 채택하지 않는 대신 각종 공제와 조세감면만 단행했을 뿐이다.특히 소득구간은 지난 96년 개편된 이후 한 차례도 바뀌지 않았다. 대체적으로 물가상승률과 경제성장률을 합친 증가율에 비례해 매년 임금이 올라가는 상황에서 소득세 과세표준구간을 매년 늘려주지 않는다면 세금부담은 급격히 늘어날 수밖에 없다. 정부는 소득세 과표구간을 상향조정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과도한 세금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각종 공제제도를 활용하는 것은 일종의 편법이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보면 올해 세제개편안은 정부의 재량에 따른 조세행정만 돋보였을 뿐 조세원칙에는 그다지 충실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현승윤ㆍ한국경제신문 기자 hyuns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