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대화경영 활동일지 '빼곡' … 심리적 거리감 줄여 활발한 의사소통 구조 실현

한국인들은 어려서부터 ‘침묵은 금’이라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주변에는 이 말을 금언처럼 여겨 가슴에 새기고 생활하는 사람도 많다. 그렇다고 무조건 말을 삼가고 고민거리를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경솔한 언행을 경계하는 얘기일 뿐 의사소통을 불가능하게 하는 정도의 침묵을 높이 사지는 않는다.조직생활에서 구성원간의 의사소통은 기본이다. 때로는 눈빛을 통해서도 의사소통은 가능하다. 말이나 글을 통해서도 대화를 한다. 예를 들어 방년의 아가씨에게 청혼을 한다면 굳이 감언이설을 늘어놓지 않아도 된다. 정성껏 포장한 서푼 반지로 충분히 뜻을 전할 수 있다.자녀가 비뚤어진 길을 가는 가정은 주로 대화가 부족하다. 아버지는 사회생활에 늘 바쁘다. 구성원의 불만이 큰 회사 역시 최고경영자 및 상사와 말단직원간의 의사소통이 부족하다. 최고경영자는 외부의 ‘큰일’을 처리하기에 바쁘고 상사도 윗사람에게 눈길이 고정돼 있다. 일하기에 훌륭한 일터(Great WorkplaceㆍGWP)를 구현하는 데 최대의 적은 의사소통의 단절이다.LG석유화학(대표이사 사장 김반석)에는 ‘대화가 곧 경영’이라는 모토가 있다. 현장중심의 대화경영을 강조하는 말이다. 최고경영자와 현장직원과의 커뮤니케이션 채널은 다양하게 열려 있다. 일단 접촉하여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 지난 3월 최고경영자의 대화경영 활동일지를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3월5일: NCC생산팀 A조에서 3월29일: 팀장모임’에 이르기까지 한 달 동안에만 10여 차례에 걸쳐 다양한 구성원들을 접촉하고 있다.3월에만 특별히 많았던 것은 아니다. 2001년 현장중심의 대화경영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래 최고경영자와 구성원간의 커뮤니케이션 횟수와 방식이 갈수록 많아지고 다양화되고 있다. 최고경영자의 공장방문을 통한 ‘사원과의 대화’는 월 4~5회씩 총 80여차례 이어져 왔다. 또 본사직원들과는 1대1의 커뮤니케이션이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사원가족과의 대화에도 수시로 앞장선다. 물론 e메일을 통한 최고경영자와 사원간의 커뮤니케이션은 상시 이뤄지고 있다.최고경영자는 ‘사원과의 대화’와 더불어 ‘현장방문’에도 주력하고 있다. 주1회 연간 40회 정도 이뤄지는 현장방문으로 올해 들어서만 HDPE생산팀, 노동조합, 창원혁신학교, 건강관리실, 혁신팀, 연구소, 생산지원팀, 폐수처리장, NCC생산팀 QA팀, 공무팀, 계전팀, 환경안전팀 등을 최소 1회 이상 방문하고 있다.최고경영자가 앞장서는 만큼 중간간부들도 대화의 기회와 시간이 늘어난다. 공장장과 부문장은 월 1회 사원과의 대화, 월 1회 전체사원 대상 경영실적 설명회, 매일 출근시 현장근무자와의 대화를 실시하고 있다.많은 대화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이 회사의 노조는 지난 4월 올해 임금교섭을 생략하고 그 권한을 회사에 일임했다. 한마디로 신뢰가 쌓이고 있음을 의미한다. 회사의 주요 의사결정은 전사조직인 운영위원회, 인재위원회와 공장조직인 공장운영위원회, 인재소위원회를 통해서 이뤄진다. 신입사원을 채용할 때 함께 근무하게 될 동료들의 사전면접이 실시된다.위로부터의 대화노력이 있다는 것은 다른 측면에서도 같은 변화의 노력이 일어나고 있음을 충분히 짐작케 한다. 팀장이 부사장이라고 할 만큼 상당한 수준의 아래로 권한이 위임돼 있다. 예를 들어 팀원과 팀장 본인의 해외출장은 지난해부터 팀장의 전결사항으로 바뀌었다. 임원은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최고경영자 및 임원에 대한 의전절차도 폐지되거나 축소됐다. 과거 임원과 VIP용 숙소로 사용됐던 영빈관은 사원가족에게 개방되는 숙박시설로 바뀌었다. 외부에 출장을 갈 때도 수행자나 영접자를 따로 두지 않는다. 사장 응접실은 회의실 용도로 전환됐다. 이 모든 것이 대화가 기반이 돼서 가능해진 것이다.“사장님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십시오. 회신해 주신 메일을 집에서 집사람과 같이 읽어 보았습니다. 사장님께서 직접 이렇게 답장까지 해주신 것만 해도 송구할 따름인데 자상하고 다정한 답장과 더불어 너무 과분한 칭찬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LG석유화학에는 한달에도 수십건씩 이런 메일이 최고경영자와 구성원간에 오간다.직급간 거리와 심리적 거리라는 것이 있다. 켈의 법칙(Kel’s Law)에 따르면 기업에서 상하간 심리적 거리는 직급간 거리의 제곱에 비례한다. 즉 말단사원과 대리의 직급간 거리, 심리적 거리를 1로 생각하면 사원과 과장의 직급간 거리는 2이지만 그 심리적 거리는 4가 된다. 사원과 부장의 관계에서는 직급간 거리가 3이고 심리적 거리는 9가 된다. 사원과 임원은 4와 16으로 더욱 확대된다. 수직적인 피라미드 조직에서는 이처럼 직급 차이가 벌어질수록 그 심리적 거리감은 더욱 큰 격차를 보이게 된다. 높은 사람 앞에서는 주눅이 들어 말이 잘 나오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이 같은 심리적 거리감을 허물어뜨리기 위해 시행하는 것이 직급을 뛰어넘는 대화(Skip Level Meeting)다. LG석유화학의 최고경영자가 사원과의 대화에 나서는 것도 직급을 뛰어넘는 만남을 통해 그 사이에 존재하는 심리적 거리감을 없애기 위한 것이다. 일하기 훌륭한 기업(GWP)의 대명사 격인 미국의 ‘포천 100대 기업’들은 이처럼 직급간의 거리감을 없애기 위한 커뮤니케이션의 기회들을 다양하게 마련해 놓고 있다.사실 과장과 대리의 관계처럼 직급간의 격차가 크지 않다면 가급적 직접적인 대면접촉을 통해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의 의견을 교환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직급 격차가 큰 최고경영자와 사원이 수시로 만나서 대화를 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최고경영자의 입장에서는 매달 수차례 공장을 방문해 각 부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노력한다. 이는 상당한 노력이 수반되지 않으면 지키기 어렵다. 그러나 순서대로 돌아가다 보면 말단직원의 입장에서는 그 같은 최고경영자의 노력도 1년에 많아야 한두 번 만날 기회가 생기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그렇게 때문에 직급간 거리가 존재할 때는 제도적인 장치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인트라넷상에 최고경영자와의 대화방을 만들어 수시로 의견을 제시하도록 하는 것도 이런 장치 중의 하나다. 이때 중요한 것은 제도적인 장치나 대면적인 접촉이나 상대방의 얘기를 듣고 있음을 확실히 알 수 있게 하는 피드백의 과정이다. 메아리가 없으면 더 이상 함성을 지르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