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여름, 유로화 강세, 중국발 괴질 사스 탓에 울고 웃어

‘3C를 아십니까?’일본 상장기업들의 올해 2/4분기 실적이 8월10일을 전후해 속속 베일을 벗으면서 ‘상반기 장사는 순전히 3C가 좌우했다’는 조크가 산업계의 유행어로 떠올랐다.일본 기업들이 꼽은 3C는 기후(Climate), 통화(Currency)와 중국(China)의 세 단어에서 각각 머리글자를 따온 것. 업종과 개별기업의 특성에 따라 결과가 다를 수 있지만 거의 모든 기업의 사업전개에 중대 변수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3C는 2003년 상반기 일본의 경제기상도에 큰 흔적을 남긴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기후의 경우 일본 산업계는 예년보다 부쩍 길어진 장마와 냉해로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반짝 회복 기미를 보였던 개인소비도 장마 빗줄기에 파묻혔으며 쌀농사는 일조량 부족으로 지난 93년 이후 10년 만의 흉작을 이미 피할 수 없게 된 상태다. 날씨변화에 특히 민감한 맥주, 청량음료, 의류 관련 업종은 7월 말까지 장마가 계속된데다 8월 들어서도 태풍 10호가 일본열도를 덮치자 여름장사는 물건너갔다며 아예 기대를 접은 눈치다.기린, 아사히, 삿포로 등 대형 맥주회사는 올 들어 계속 내리막길을 달린 맥주, 발포주(맥아 함량이 적은 유사맥주) 판매가 냉해로 더 위축될 것으로 보고 최근 하반기 목표를 또 한차례 수정했다. 이들 3사는 소비부진으로 상반기 영업도 신통치 않았던 터라 상처가 만만치 않을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최대 메이커인 아사히는 상반기 매출이 6,396억엔에 달했지만 경상이익은 187억엔으로 지난해 동기보다 20억엔 줄어들었다. 2,155억엔의 매출을 올린 삿포로는 적자가 지난해 동기의 54억엔에서 올해는 88억엔으로 폭이 훨씬 더 커졌다. 이들 3사는 신규사업 등 다각화를 통해 전년 수준의 매출을 유지했지만 맥주와 발포주의 전체 판매량은 업체마다 6~14%씩 감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빗줄기로 타격을 입기는 음료업체도 마찬가지다. 기린음료의 사무로 미즈호 사장은 “일기불순으로 7월 한 달만 해도 줄잡아 300만 상자의 차질이 생겼다”고 한숨을 내쉬고 있다. 다카시마야, 이세탄 등 유명 백화점들은 샐러리맨들의 보너스 지급 시기에 맞춰 지난 6월부터 일제히 시작한 여름세일이 장마와 겹치면서 거의 모두 골탕을 먹었다. 다카시마야의 한 관계자는 “수영복, 의류 등 여름 대목 상품이 모조리 죽을 쑤었다”며 “세일 매출이 지난해보다 최고 10%는 줄어든 것 같다”고 말했다.장마와 함께 서늘한 여름이 장기화되면서 쌀농사는 일본열도의 과반수 지역에서 지난해보다 수확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냉해는 센다이, 이와테, 미야기, 이바라키 등 도쿄 동북부 지방에서 특히 심각한 것으로 보고 되고 있으며 농부들은 벼가 한창 감수분열에 들어갈 때 일조량이 줄어 타격이 더 심하다고 울상짓고 있다.서늘한 여름이 모든 기업들에 걱정을 안겨준 것은 아니다. 여름이면 소비가 격감하는 가스, 석유 등 에너지는 반사이익에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다. 오사카가스는 4~6월에 서늘한 날씨가 계속된 덕에 가스판매량이 지난해 동기보다 5.5%나 늘어난 것으로 알려졌다.기업실적에 큰 변수로 작용한 통화 중 유로화는 리코, 코니카, 캐논 등 사무기기업체에 두둑한 이익을 안겼다. 4~6월 결산에서 세전순익이 지난해 동기보다 16%보다 늘어난 리코는 유로화 강세의 덕을 톡톡히 입은 것으로 나타났다. 리코는 115억엔의 전체 증가 이익 중 32억엔을 환차익으로 챙겼다. 리코의 히라가와 다쓰오 부사장은 “복사기 마켓셰어 1위를 달리는 유럽시장을 신형모델로 적극 공략한 것이 주효한데다 엔화에 대한 유로화 가치가 강세를 지속하면서 흑자폭이 커졌다”고 말했다.달러 약세로 대미수출에서 별 재미를 보지 못했던 캐논은 유로화 수입으로 구멍을 메우면서 전체적으로 45억엔의 환차익을 남겼다. 지난해 4~6월 결산에서 89억엔의 환차손을 기록했던 후지사진필름 역시 유럽 수출 호조에 힘입어 올해는 23억엔의 환차익을 낸 것으로 전해졌다. 유로화와 달리 미 달러화의 거래 비중이 큰 자동차메이커들은 대외거래가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 눈길을 끌었다. 엔화에 대한 달러화 가치가 상반기에 전반적으로 약세를 면치 못했기 때문이다.4~6월 세전순이익이 3,712억엔으로 지난해 동기보다 12% 감소한 도요타자동차는 엔/달러 환율이 예상치보다 8엔 낮게(가치는 높게) 형성되면서 환율에서만 500억엔의 돈을 날렸다. 혼다 역시 엔화 강세 역풍에 휘말린 탓에 이익이 190억엔 줄었다. 혼다는 코스트다운과 매출증가로 260억엔의 플러스 이익 효과가 생겼지만 이의 대부분을 엔화 강세로 놓쳐버린 것으로 평가됐다. 혼다의 4~6월 세전순이익은 1,179억엔으로 지난해 동기보다 10% 감소했다.기후와 통화가 일본 기업들의 실적을 좌우한 것은 분명하지만 중국만큼 대다수 기업들의 장부 사정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변수는 되지 못했다. 전세계를 공포로 몰아넣은 중국발 괴질(SARS)은 중국 의존도가 높은 기업들을 한때 다운 직전으로 몰아넣었다. 일본항공시스템은 4-6월 중 중국노선의 여객수가 지난해 동기보다 68%나 격감한 탓에 이 기간에 무려 772억엔의 적자를 냈다. 라이벌 항공사인 전일본공수(ANA)는 183억엔의 적자를 안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여행사인 긴키일본튜리스트는 괴질로 수학여행과 출장수요가 끊어지면서 4~6월 중 60억엔의 적자를 기록했다.괴질 타격이 여행, 항공운수업체들의 숨통을 조였어도 중국 특수는 전체적으로 일본 산업계의 대형 호재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 결산을 통해 확인됐다. 중장비업체 고마쓰는 4~6월 순이익이 지난해 동기보다 거의 6배 늘어난 37억엔에 달했다. 회사 관계자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과 2010년 상하이만국박람회를 앞두고 수요가 급증한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각종 건축공사가 러시를 이루면서 여기에 쓰이는 셔블카 등 중장비의 대중국수출이 연일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건축장비업체인 히타치건기는 중국 관련 사업에서만 34%의 매출증가를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운업체들도 소리 없이 중국 특수를 만끽하고 있다. ‘메이드 인 차이나’ 제품이 전세계를 뒤덮으면서 이를 실어나르는 컨테이너선 대열에서 일본 선박들도 한몫을 챙기고 있다. 또 조강생산 증가로 중국의 철광석 수요가 급팽창하자 일본 해운회사들의 운반선도 운임 수입 증가로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가와사키기선의 경우 4~6월 경상이익은 115억엔으로 예년의 4.1배까지 급증한 것으로 알려졌다.일본 산업계는 괴질 파동으로 중국 특수가 올해 상반기 중 큰 타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하반기에는 본격 회복될 가능성이 높다고 점치고 있다. 사스 공포가 가라앉으면서 일본여행, 출장자들의 왕래가 예년 수준으로 돌아설 전망인데다 중국의 고성장 스피드가 앞으로도 변함없이 이어질 것이라는 근거에서다.여행·관광업계는 특히 중국 관광객 유치를 겨냥해 일본 정부가 상하이사무소를 개설하기로 방침을 세운 것을 주목, 중국인들의 일본여행이 본격화될 경우 중국은 엄청난 달러박스로 등장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일본제품의 수출시장 내지 제조 거점 역할에 치중해 왔던 과거와 달리 새로운 외화수입원으로 여행수지에 막중한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