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실업이 늘어나고 있다. 줄어들 가능성도 없어 보인다. 언젠가 이 칼럼에 “이제 (젊은이들의) 잔치는 끝나고 청구서 받을 일만 남았다”고 썼지만 바로 그런 상황이 구체화되고 있다. 월드컵에서부터 대통령선거까지 젊음은 넘쳐났고 나라의 운명까지도 젊은이들이 결정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채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일그러진 현실은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다.모모 하는 경제학 교수, 심지어 경영학을 가르치는 교수들까지 학생들을 반기업연대로 내몰고, 투쟁하면 일자리가 생기는 양 가르치고 있는 터에 일자리인들 있을 수가 없다. 기업을 사회봉사단체 정도로 가르치고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게 하며 ‘경제는 악한 자들이 모여 선한 사회를 만드는 과정’이라는 사실은 자신조차 모르는데 항차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나설 것인가.대기업들의 강고한 노동조합을 부수지 않고는 일자리가 없다는 것, 비정규직 보호의 순진한 구호가 오히려 그나마의 쪽박까지 깨고 말 것이라는 것, 기업에 대한 적대적 비판의식 따위를 거두지 않으면 기업들의 일자리는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무슨 수로 알아먹도록 가르칠 것인지 모르겠다. 청년실업이 8%에 달할 정도가 되고 고시촌의 그 수많은 실업군을 빼고도 40만명의 청년실업자가 쏟아지고서야 비로소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만 상황은 이미 어지간히 나빠져 있다. 말이 8%이지 일자리가 없는 사람을 모두 합치면 4분의 1이 백수 처지라는 것도 이제는 분명해지고 있다.현대자동차 노조의 임금이 평균 6,000만원을 넘어서고 지난 수년간 불과 400명도 안되는 생산직 정규사원만이 일자리를 얻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서야 이제 조금씩 사태의 본질을 깨닫고 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문제의 해법이 곧바로 열리는 것도 아니다. 시장경제에 대한 확고한 신념 없이 다만 귀에 듣기 좋은 소리, 선한 자들의 선한 의지만이 표현된다고 해서 곧바로 경제가 좋아지지 않는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불행히도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선하다’는 말이 때로 무지하다는 말과 같다는 점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우리사회가 덜 성숙돼 있다고 봐도 무방할 테다. 선한 의지가 악한 사회, 독재적 사회를 만든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는 어느 정도 정신의 성숙이 필요하다. 아니, 그것을 이해하고서야 비로소 정신이 성숙했다고 말할 수 있다.지금 청년들의 일자리가 줄어든 것은 경기의 부진, 고용채널의 변화, 기존 노동자들의 완고한 철밥통, 인적 자질에 대한 학교와 기업의 시각차 등 다양한 요인이 동시적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하나의 요인이 해소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상황이 좋아진다고 기대하기도 어렵다. “대졸 신입사원을 왜 뽑습니까”라고 말하는 기업인들은 갈수록 늘어나는 중이다.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양극화가 심해지고 하층부는 동남아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채우고 있다. 테헤란로에조차 월 100만원을 밑도는 대졸 근로자들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번듯한 직장이란 정말 눈을 씻고 찾아도 없다.기업을 죽이고 기업가를 적대시하는 상황에서 누가 일자리를 만들어낼 것인가. 눈은 높아지고 기업에 대한 요구조건은 까다로워지고 그 모든 것이 비용으로 전가된다면 앞으로도 가망이 없다. 요구조건과 사회적 눈높이를 낮추고 대중없는 슬로건은 접는 자세의 전환이 필요하다. 불행히도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이마에 굵은 땀방울을 흘려야 비로소 빵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성경에 있는 말이다. 그것이 노동의 신성함이 아니라 굴욕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서야 경제는 나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