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광고카피처럼 바쁘게 움직이는 샐러리맨들이 짬이 났을 때 가장 하고 싶어 하는 여가 아이템은 여행이다. 도시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일에 억눌려 사는 사람에게 여행은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는 매력적인 일이다. 그러나 막상 여행을 떠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고 비용도 만만치 않으며, 궂은 날씨 등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칠 수도 있다.만약 업무가 끝난 다음 경주 불국사나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 주변을 거닐다가 집에 돌아갈 수 있다면 어떨까. 이런 꿈같은 일이 현실이 돼 가고 있다. 바로 사이버 공간에서 실제와 똑같은 경험을 할 수 있는 가상현실 기술이 눈부시게 발달하고 있기 때문이다.이용자가 주인공이 된다가상현실(Virtual RealityㆍVR)이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세계 속에서 주인공이 된 이용자가 주체적으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기술을 가리킨다. 용어는 80년대 만들어졌지만 개념 자체는 상당히 오래됐다. 간접적으로 얻는 지식보다 자신의 직접적인 경험을 소중히 여기는 인간에게 가상현실은 오랜 숙원인 셈이다.가상현실이 낯설지 않은 이유는 SF영화에 등장하는 단골 소재이기 때문이다. <토탈리콜 designtimesp=24151> <론머맨 designtimesp=24152> 등 SF 고전에서 최근 후속편이 개봉된 <매트릭스 designtimesp=24153>까지 영화에 등장하는 가상현실은 현실과 완벽히 똑같다. 그러나 현실과 구분 못할 수준까지 도달하려면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전문가들은 10년 후면 가상현실이 진짜 현실과 90% 닮은 수준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현재 개발이 진행 중인 가상현실 시스템은 크게 데스크톱 가상현실, 합성형 가상현실, 몰입형 가상현실로 구분할 수 있다. 데스크톱 가상현실은 컴퓨터 화면에 나타나는 3차원 그래픽 영상을 이용하는 방법으로, 사용자는 입체안경을 끼고 마우스를 움직이면서 가상현실을 느끼게 된다. 합성형 가상현실은 카메라로 촬영되는 영상을 가상세계의 영상으로 합성해 가상현실을 느끼도록 하는 방법이다.몰입형 가상현실은 체험자에게 다양한 장치를 달아 가상현실을 느끼도록 하는 시스템이다. 기본적으로 헬멧 모양의 HMD(Head Mounted Display)를 머리에 착용하는데 위치추적장치가 달려 있어 헬멧을 쓴 사람의 움직임이나 시선이 분석된다. 이 정보를 바탕으로 헬멧창에 달려 있는 디스플레이장치에 3차원 영상이 펼쳐진다. 시각과 함께 인간이 경험을 하는데 사용하는 오감, 즉 청각, 미각, 후각, 촉각을 자극하는 장치가 연구되기 때문에 사실성은 더욱 뛰어날 전망이다.그러나 보조장치를 통해 느끼는 가상현실에는 결국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가상현실은 궁극적으로 뇌공학에 기반을 둔 인공지능기술을 통해 완벽히 실현될 전망이다. 인간의 감각중추와 신경계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이뤄지면, 뇌를 자극함으로써 실제와 똑같은 경험을 느끼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자동차 설계에서 우주체험까지가상현실은 현재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히 이용되고 있다. 하이테크미디어 등 가상현실 관련 기업들은 유명관광지와 박물관 등을 사이버 공간에 만들고 있다. 사이버 공간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360도의 실제 모습을 구경할 수 있다. 가상현실을 이용한 사이버관광은 움직이기 어려운 노약자나 환자, 장애인에게도 희망을 제시해준다.일반인들이 이와 같은 가상현실을 직접 느낄 기회가 마련된다. 8월13일부터 10월23일까지 열리는 ‘2003 경주 세계문화엑스포’에서는 경주의 옛 모습을 배경으로 활약하는 화랑 기파랑을 가상현실에서 만날 수 있다. 경주 세계문화엑스포공원의 가상현실극장은 과학기술연구원이 구축한 것으로 세계적인 규모다. 또 8월13일부터 17일까지 열리는 ‘2003 대한민국 과학축전’에서 한국해양연구원은 가상현실로 바닷속 수중환경을 보여준다.가상현실 속에서는 색다른 체험도 가능하다. 지난 2001년 첫 우주관광객이 국제우주정거장(ISS)을 방문하기 위해 무려 2,000만달러(230억원)를 지불했다. 그러나 거액을 들이지 않더라도 미국 실리콘그래픽스사가 만든 가상 국제우주정거장을 이용하면 우주정거장 내 생활이 어떤지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다. 가상 국제우주정거장은 지상에서 우주인을 훈련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산업현장에서도 가상현실이 맹활약하고 있다. 현대자동차 남양연구소에서는 가상현실 기술로 자동차디자인을 마무리하고 있다. 디자이너는 3면을 둘러싼 스크린 속에서 입체안경을 끼고 자동차를 빙빙 돌려가면서 살펴본다. 차의 외관뿐만 아니라 내부 인테리어까지 모형이나 컴퓨터 화면을 통해서는 불가능한 세심한 디자인을 완벽히 다듬을 수 있다.집안 인테리어나 건축설계에서도 유용하다. 가상현실을 이용하면 인테리어를 설계할 때 자유롭게 배치나 색깔을 바꿔보면서 확인할 수 있다. 산업단지나 대규모 아파트단지를 조성할 때도 마찬가지다.약간 거리가 있어 보이는 생명공학ㆍ의학분야에서도 가상현실이 사용된다. 과학기술정보연구원에서는 생체 내 일꾼인 단백질의 복잡한 입체구조를 가상현실센터에서 연구 중이다. 또한 대인공포증이나 고소공포증 환자를 가상현실로 치료하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인명을 다루기 때문에 결코 연습이 있을 수 없는 수술에서도 가상현실은 의사들의 숙련도를 높여 성공률을 높일 수 있다.게임은 가상현실이 가장 주목하는 분야다. 아직 젊은층에 한정돼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게임을 즐기는 층은 점점 넓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문화콘텐츠산업으로 부상하고 있는 게임에 가상현실을 적용하면 더욱 사실성이 뛰어나진다. 현실과 똑같은 게임은 이용자들이 그 속으로 직접 들어와 즐기도록 유혹한다. 이외에도 가상현실은 이용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사이버 공간에서 나누는 섹스가상현실 기술의 발달로 인한 부작용도 예견되고 있다. 가상현실은 섹스 관련 산업이 가장 환영하는 기술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1년 동안 인터넷 포르노 사이트에 흘러가는 돈만 20억달러(약 2조4,000억원)가 넘을 정도로 포르노산업은 거대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세계 최대의 자동차업체 GM, 미국 최대의 통신회사인 AT&T 등 거대기업들이 포르노시장에 뛰어들어 짭짤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 결국 돈이 되기 때문에 새로운 기술개발을 위한 연구도 적극적으로 이뤄진다.과학기술과 섹스산업의 최고 접점은 실제와 똑같은 감각을 느낄 수 있는 가상현실 속의 사이버섹스다. 사이버섹스가 가능해지면 결혼하는 사람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 것으로 우려된다. 성에 대한 욕구를 완벽히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가족이나 자녀를 갖는 일을 귀찮게 여기고 꺼리는 것이다. 결국 사회의 기본단위인 가정이 흔들리면서 큰 사회문제를 야기한다.가상현실이 현실과 닮아지면서 가상세계와 현실세계의 구분은 더욱 모호해질 전망이다. 실제의 자신과 가상현실 속 자신의 아바타를 혼동하면서 일상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문제가 심각한 사회현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 또 기분전환으로 다양한 인생을 원하는 대로 살아볼 수 있게 되면서 인간의 삶 자체가 한낱 기분전환용 오락거리로 전락할 위험도 있다.가상현실은 우리가 상상하는 모든 일을 직접 경험해 볼 수 있게 해주는 꿈의 기술이다. 동시에 다양한 산업분야에서 활약할 인류의 미래기술이기도 하다. 중요성이 큰 만큼 부작용에 대한 대비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