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으로 판촉전략을 짜느라 하루하루가 힘들겠습니다.”(김성진 사장)“미국경기가 어렵지만 그래도 인기가 괜찮아요.”(이성진 사장)“신제품 디자인 개발은 잘되고 있나요.”(김성진 사장)“다음달쯤 완성될 예정인데 디자인이 세련되고 멋집니다.”(서니정 사장)이는 엠아이텍의 김성진 사장(53)과 미국에 있는 현지 판매법인 MKW 이성진 사장, 디자인개발회사인 디자인인피니 서니정 사장과의 통화내용이다.김사장은 서울에서 시화공단으로 출근하는 매일 아침에 오전에 1시간씩 국제통화를 한다. 전화를 통해 그날그날의 판매실적과 미국시장 분위기를 파악한다. 김사장은 “어려운 경기상황 때문에 요즘의 통화내용은 판매 실적과 전략 등 회사경영과 직접적인 것이 주를 이룬다”고 말했다. 그는 “출근길 통화가 불황 대응책을 마련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김사장은 미국 현지전화를 통해 초대형 크롬도금 알루미늄휠을 세계적인 명품으로 키우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국내에서보다는 해외에서 더 유명한 엠아이텍의 김사장은 전남 광주에서 중학교와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8년 종합상사인 금호실업에 입사했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한 그는 사글세로 정릉, 신촌 등을 옮겨다니며 자취생활을 했다. 그러면서도 공부에 대한 욕심으로 틈틈이 책과 씨름했다. 이렇게 해서 72년에는 명지대에 들어가 주경야독 생활을 했다. “회사와 학교생활로 매일 오후 11시가 넘어 집에 들어갔지만 배울 수 있다는 것에 늘 감사했다”며 환하게 웃었다.회사측은 김사장의 성실성을 높이 평가, 대학을 졸업하자 76년 말 일본주재원으로 발령을 냈다. 3년간의 짧은 일본 생활이었지만 김사장은 많은 것을 배웠다고 당시를 돌아봤다. 그는 미쓰비시, 미쓰이 등 일본 굴지의 종합상사맨들과 업무를 진행했다. 이미 세계시장을 넘나드는 일본의 종합상사들과 부딪치면서 느슨했던 국내 기업과 달리 톱니바퀴 움직이듯 돌아가는 일본 기업의 역동성을 몸으로 체득할 수 있었다.“일본생활을 하면서 이들처럼 사업에 몰두한다면 성공할 것만 같은 자신감이 생겨나더군요.” 당시만 하더라도 직장인들은 오퍼상을 내는 것이 자그마한 꿈이었다. 게다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배운 것이 수출입업무였으니 김사장에게는 오퍼상이 안성맞춤이었다.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79년 12월 말 귀국해 사표를 내고 독립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손에는 퇴직금으로 받은 400만원이 전부였다. 서울 종로구 장사동에 허름한 월세 사무실을 얻고 여직원 한 명을 뽑았다. 책상 등 집기는 친구들한테 낡은 것을 얻어 마련했다. 궁색했지만 전화(당시 백색전화기)설치에는 100만원이라는 거금을 들였다. 그리고 손수 만든 어설픈 간판을 내걸었다. 그때가 긴 겨울이 지나고 희망의 봄기운이 움트기 시작할 무렵인 80년 2월 하순이었다.그는 공구, 자동차부품, 베어링 등을 일본과 독일 등지에서 수입해 국내 기업에 공급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사업시작 석 달 만에 독일에서 수입해 공급한 자동차부품대금 870만원을 떼이는 쓰라림을 겪었다. 당시 수입은 무역자격증 소지자만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금호실업이 김사장의 수입대행 창구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납품대금을 떼여 빈털터리가 된 김사장은 수입대행을 해준 금호실업에 대금지급을 할 수가 없는 처지가 되자 난감했다. “금호실업으로 달려가 대금지급일을 연기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박삼구 금호그룹 회장(당시 전무)의 선처로 1년 연기를 받았어요.” 그는 악착같이 일해 6개월 만에 갚았다. “박회장의 격려가 큰힘이 되고 있다”고 그는 강조했다.이 일이 있은 후 품목을 다양화하면서 사업을 키워나간 김사장은 94년에는 제조업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일본의 프로프사와 94년 5월 머플러(소음기)생산회사를 세웠다. 자금은 은행에서 차입해 마련했고 생산제품 전량은 일본으로 수출했다. “합작공장 설립은 일본생활을 할 때 알고 지냈던 후지즈 보 사장의 제안으로 이뤄졌어요.” 하지만 3년 뒤 일본경기가 위축되면서 머플러 수출이 중단돼 내수로 근근이 버텨나갔다. 없는 살림에 프로프사의 지분(49%)까지 사들였다. 게다가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공장건립을 위해 빌린 대출금 이자가 두 배 이상 뛰어 자급압박을 받았다. “당시 은행으로부터 추가 담보물 요구와 대출금상환을 독촉받고 있었습니다.”김사장의 어려움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보유부동산을 정리해 은행빚을 갚아나갔지만 계속되는 반품과 부도를 맞으면서 빚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피를 말리는 고통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꼈습니다.”하지만 99년은 그에게 서광이 비치던 해였다. 머플러의 고급화를 위해 크롬도금업체를 찾던 중 알루미늄휠의 크롬도금이 가능하다는 얘기를 들은 김사장은 아예 부가가치가 높은 휠로 방향을 바꿨다. 당시 알루미늄휠에 크롬도금하는 기술은 미국, 일본 등 몇몇 기업만이 하는 고난도 기술이었다.도금업체를 찾아 알루미늄휠에 크롬도금을 했다. 매월 일본으로 2,000개씩 수출했다. 하지만 문제가 많았다. 불량품이 과반수였던 것. “바이어를 설득해 매번 납기일을 늦춰야만 했어요.”김사장은 이렇게 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직접 생산하기로 하고 99년 말 5억원을 들여 주조기 한 대를 들여놓았다. 올해 8월 말이면 모두 8대의 주조기가 가동된다. 월 3만개 이상을 생산할 수 있는 시설이다. 엠아이텍은 초대형 휠을 만든다. 국내에서는 상용화되지 않은 20~26인치다. (최근에는 28인치도 개발했다.)김사장은 공장에서 담요 한 장 덮고 생활하면서 초대형 알루미늄휠에 크롬도금하는 기술을 개발해냈다. “크롬도금은 표면에 기포발생을 없애는 것이 노하우입니다.”이렇게 해서 탄생된 제품은 ‘MKW’와 ‘BAZO’ 브랜드로 해외시장에 팔려나가고 있다. 생산제품 전량을 수출하는 엠아이텍은 주력시장인 미국을 비롯해 일본, 호주, 필리핀, 중동국가 등 10여개국과 거래한다.김사장은 “매년 매출액의 6%를 연구개발비로 투입하고 있다”며 “품질과 디자인 면에서 세계적인 수준을 자랑한다”고 강조했다.엠아이텍은 지난해 11월에는 중국에 320만달러를 단독 투자해 휠 후가공처리(연마도금) 공장을 세우기도 했다. 엠아이텍의 올해 매출목표는 350억원이다. 세계적인 크롬도금 알루미늄휠 업체로 성장시키겠다는 게 김사장의 각오다. (031-499-62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