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전 면담 의무화 … 우수인재 이탈 막아

얼마전 고등학교 동창모임이 있었다. 서로의 근황을 묻고 술잔이 몇 잔 돌아가자 인천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는 친구가 양복 안주머니에서 편지봉투 하나를 꺼내 보여줬다. “이렇게 갖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하더라”는 말과 함께 친구가 내민 것은 다름 아닌 사직서였다.‘일신상의 이유로 사직하고자 합니다. ○○년 ○○월 ○○일 홍길동’회사를 그만두는 과정은 때로 너무나 단순하다. 종이 한 장에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암호 같은 이유를 적어 제출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어렵게 입사해서 사람들과 친해지고 업무에도 익숙해지는 입사의 과정과 비교하면 허무감이 들기도 한다. 내심의 이유야 따로 있겠지만 토를 달면 구차해지는 것 같기에 그저 마음 맞았던 동료들이 열어주는 한두 번의 환송연을 갖는 것이 고작이다. 평생 등돌리고 이제는 다시 보지 않을 듯이 헤어지는 연인들처럼 그렇게 정리하고 만다.이수화학(대표이사 사장 윤신박)은 어렵게 선발한 인재를 떠나보내는 절차가 이러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최소한 왜 떠나는지를 명확히 알아서 인재관리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 회사가 퇴직자 트래킹(Tracking) 프로세스를 정해 시행에 들어간 것은 지난해 4월이다. 트래킹한다는 것은 퇴직의 사유, 그동안 회사에서의 애로사항, 회사에 대한 건의사항 등을 파악하는 작업이다.물론 과거에도 그런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현업에서 인력을 책임지는 부서장이 따로 불러 애로사항을 청취하고 퇴직을 만류하기도 했었다. 그것을 좀더 명확하게 규정된 프로세스가 있는 시스템으로 정착시킬 필요가 있었다.퇴직자 트래킹 프로세스의 목적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가급적 애로사항을 해결해 교육된 인재가 이탈하는 것을 막는다. 둘째, 이 같은 의견수렴을 통해 대안 제도를 마련하고 퇴직의사 표명 전에 사전 예방적인 관리 및 지원방안을 도출하는 자료로 활용한다. 셋째, 퇴직자가 조직을 떠나게 된 이후에도 이수화학에 긍정적인 시각을 갖는 고객으로 남도록 신뢰의 밑거름을 쌓는다.HR팀의 김병태 차장은 “과거에는 퇴직의사자를 관리하는 프로세스가 표준화돼 있지 않고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스킬이 부족하다 보니 체계적 관리가 이뤄지지 않았다”며 “시행한 지 1년이 지났을 뿐이지만 프로세스의 도입으로 퇴직이 결정되기 전 단계에서 마음을 돌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한다. 애로를 들어주고 그 해결방안을 제시함으로써 굳이 퇴직하지 않아도 될 인재의 유출을 막는 효과를 보고 있는 것이다.퇴직자 트래킹 프로세스가 도입되면서 구체적으로 강화된 부분은 퇴직 면담의 의무화다. 과거에는 현업 부서장의 자체 판단에 의해 필요한 경우에 면담이 이뤄지는 식이었다. 그러나 프로세스 도입을 계기로 소속 부서장과 HR부서장이 1, 2차에 걸쳐 퇴직면담을 의무적으로 실시하고 있으며 우수 핵심인력이라고 판단될 경우 대표이사가 직접 나서서 퇴직희망자와 면담한다.면담을 통해서 반드시 파악해야 하는 항목은 체계적으로 만들어졌다. 일정하게 정해진 양식에 따라 구체적인 퇴직사유를 파악하고 근무여건, 애로사항이나 회사에 대한 건의사항을 청취한다. 또 퇴직을 하더라고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긴급연락처를 반드시 기입하도록 해서 네트워크를 유지한다.면담자로 들어가야 하는 부서장급이나 HR담당자들을 대상으로는 면담 프로세스와 트래킹을 위한 스킬 강화교육이 주기적으로 실시된다.핵심인력이라고 판단되는 퇴직희망자의 경우 그 사유가 처우 보상에 있을 때는 반드시 대안을 제시해서 수용 여부를 다시 한 번 신중히 판단하도록 유도한다. 나아가 영업비밀의 유출방지를 위한 서약서를 작성하도록 하는 일도 중요한 과정이다.퇴직자 트래킹 프로세스가 확립되면서 평상시에도 인재를 유지하기 위한 활동이 강화됐다. 특히 HR부서장은 우수인력이 퇴직의사를 갖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경우 퇴직절차와 관계없이 지체하지 않고 당사자와 면담을 실시하는 것이 의무화됐다.이수화학은 이른바 잘나가는 중견그룹이다. 지난 99년에는 미국의 경영전문지 <포브스 designtimesp=24137>가 선정한 세계 100대 유망 중견기업에서 35위에 랭크되기도 했다. 과거 5년간 자기자본이익률(ROE), 매출증가율, 당기순이익증가율이 평균 10% 이상인 기업을 대상으로 한 조사였다. 이 같은 재무 안정성에도 불구하고 소비제품을 취급하지 않기 때문에 걸맞은 지명도를 갖지 못했다. 퇴직자 트래킹 프로세스는 지명도 높은 대기업과의 인재경영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제도로 보다 일하기 훌륭한 일터(GWP)의 구현에도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세상사에는 늘 적절한 절차가 있기 마련이다. ‘똑똑’ 노크를 하는 서양인이나 ‘어흠’ 하고 헛기침하는 한국인이나 화장실 사용의 절차를 따르는 것이다.관혼상제와 같은 절차도 마찬가지다. 돌아가신 조상을 기리고 큰뜻을 본받고자 하는 정신이 있고 그 정신을 구체적 행위로 풀어내는 제사의 절차가 있는 것이다. 제사의 절차를 둘러싸고 당파싸움까지 벌였던 조선의 유림들이 지나친 형식주의에 빠졌다는 지탄을 받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만큼 법도를 따르는 절차가 중요함을 알 수 있다.이수화학의 퇴직자 트래킹 프로그램은 어찌 보면 단순하게 짜여진 하나의 절차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같은 절차가 없을 때와 있을 때 나타나는 결과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실제로 퇴직의 사유는 보다 진지한 대화를 통해서 해결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구체적으로 처우 보상에 대한 불만이 누적됐을 수도 있고 상사ㆍ동료와의 관계, 자기계발의 욕구 등이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책임자와의 면담을 통해서 해소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만큼 인재의 유출을 막을 수 있다.중견그룹으로서 이수화학은 키워놓은 인재가 대기업으로 전직하는 사례가 간혹 있었다고 한다. 대기업들이 결원이 생기면 눈독을 들이고 있다고 좀더 좋은 조건을 들이밀면서 사람을 빼가곤 한다. 이를 사전에 예방하는 일은 궁극적으로 일하기에 훌륭한 일터(GWP)의 조성했을 때 가능하다.퇴직자 트래킹 프로세스는 신뢰경영의 개념적 범주에서 개인존중(Respect)과 가장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제도다. 개인존중은 적극적으로 구성원을 회사의 운영 및 정책결정 과정에 참여시키고 개인의 능력계발을 위해 지원하며 그 구성원이 사내외에서 겪는 고민을 적극적으로 해결해주려는 노력을 통해서 표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