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인재론은 필자 같은 둔재들로서는 다소 불만스럽다. 한 사람의 천재가 수천 수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지적이야 옳다 하더라도 수백 수천의 둔재들이 쌓아가는 사소한 생활의 무게 역시 결코 가볍다고 할 수는 없다. 둔재들의 축적이 없다면 천재들의 천재성이 발휘될 것이며 더구나 관중 없는 스타플레이어가 있을 것인가 말이다….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역시 천재성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들도 많다. 바둑 10급짜리 1만명을 모아놓는다고 해서 이창호나 이세돌을 이길 수는 없다. 아마추어들이 밤을 새워 작곡한다고 해도 모차르트를 능가할 수 없는 법이다. 증권투자 분야만 하더라도 한 명의 천재투자가를 투자 대중이 결코 이길 수는 없다. 오히려 다수의 대중이 관여하기 때문에 일이 망쳐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투자 타이밍은 언제나 엇나가기 마련이고 시세의 앞이 아닌 뒤를 잡기 마련이며 시장 분위기에 휩쓸린 끝에 필연적으로 큰 손실을 보게 된다.대중이 저마다 자신의 개성을 주장하면서 일에 끼어들면 결과적으로 몰개성이 남게 되는 것은 불문가지다. 모두가 상대의 개성을 부정하고 자신의 개성을 주장하기에 이르면 창조적 개성들은 깎여나가고 결과적으로는 견딜 수 있는 최저한의 개성, 다시 말해 몰개성만 남게 된다. 투자의 세계도 그렇고 경영의 세계도 그렇고…. 사실 돌아보면 그렇지 않은 일이 오히려 드물 정도다.정치는 어떤지 모르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정치를 중우(衆愚)의 정치로 규정한 바 있지만 역시 그런 일면도 부정하기 어렵다. 그래서 대의정치라든가 국회라든가 사법과 입법 행정의 분리 같은 ‘직접민주주의를 제한하는’ 복잡한 장치들을 두는 모양이다.필자가 굳이 ‘대중’을 경계하는 논지를 펴고 있는 것은 최근 들어 다수의 대중이 직접 사회적 의사결정 과정에 개입하면서 여러 가지 걱정할 만한 상황이 나타나고 있어서다. 경제분야는 동기와 목적, 그리고 결과가 서로 달리 나타나는 대표적인 경우라 하겠지만(우리는 그런 현상들을 포퓰리즘이라는 독특한 단어로 부른다) 남북문제에서나 환경문제 등에 이르면 그런 현상은 더욱 심화된다.아마추어들이 슬로건에 함몰되면 의사결정은 심각하게 왜곡되고 엉뚱한 방향으로 치닫기 마련이다. 새만금 문제만 해도 그렇다. 필자는 새만금에 관한 수많은 주장들 가운데 과연 무엇이 옳은 것인지 지금껏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 개펄이 다시 조성된다는 주장까지도 옳아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드넓은 땅을 인위적으로 메워 무엇에 쓰려는지도 의심쩍어 한다. 개펄이 생산적 가치가 있다는 주장은 아무래도 미래의 상대가치를 과대평가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동시에 김포매립지의 허망한 결론을 보면 새만금 역시 비슷한 사연으로 흘러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된다.문제는 이 분야에 문외한인 인사들, 예를 들어 종교인들까지 어느날 이 논쟁의 한쪽에 뛰어들어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논란의 중심이 까닭 없이 흔들린다는 점이다.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뙤약볕을 삼보일배하는 것인지, 종교인들은 원래부터가 가볍게 판단하고 무겁게 행동하는 것인지 모든 것이 아리송하다. 학교 선생님들 중 어떤 분들은 또 무엇을 근거로 학생들까지 새만금 반대에 동원하는 것인지도 종잡기 어렵다.잘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이상한 버릇들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저 아름답기만 한 말들과 현실을 혼동하는 유아적 사고경향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모든 자가 잘사는 사회라는 슬로건과 그것에 도달하는 방법론은 너무도 큰 차이가 난다. 전문가들에게 맡길 일은 전문가들에게 맡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